우리는 전설이 될 거야 – 이승훈, 정재원

이채민

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한 스피드 스케이팅의 강자 이승훈, 그런 이승훈이 손을 번쩍 들어 추켜세워준 정재원. 국가대표 숙소에서 한 방을 쓰며 함께 호흡한 두 선후배는, 평창에서 돌아온 지금도 함께다.

정재원이 입은 줄무늬 셔츠는 에디터 소장품, 집업 후디는 발렌시아가, 팬츠는 존 화이트 제품. 이승훈이 입은 티셔츠는 H&M, 겹쳐 입은 셔츠는 앤 드뮐미스터, 아우터는 프라다, 팬츠는 아미 제품.

정재원이 입은 줄무늬 셔츠는 에디터 소장품, 집업 후디는 발렌시아가, 팬츠는 존 화이트 제품. 이승훈이 입은 티셔츠는 H&M, 겹쳐 입은 셔츠는 앤 드뮐미스터, 아우터는 프라다, 팬츠는 아미 제품.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대다수가 처음 목격했을 진기한 경기가 있다. 바로, 스피드 스케이팅 매스 스타트(Mass Start)다. 마라톤처럼 여러 선수가 동시에 출발해 승자를 가리는 이 경기는 크로스컨트리 같은 다른 종목에도 존재하지만, 스피드 스케이팅 매스 스타트의 경우 평창에서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됐다. 올림픽 폐막을 하루 앞두고 남자 결승전에 올라선 16명의 선수 중에 이승훈과 정재원이 있었다. 팀이 아닌 개인의 승리를 가리지만, 실질적으로 전술에 기반한 팀 플레이가 상당수 펼쳐지는 매스 스타트. 유럽 선수들은 국적이 달라도 한 클럽에 소속된 인물끼리 전략적으로 움직이곤 한다. 지켜야할 레이스 선도 없고,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선수들이 자꾸 뒤를 살피는 경기. 정재원은 경기 중반까지 레이스를 이끌었고, 그보다 한참 뒤에서 힘을 분배하던 이승훈은 경기 후반에 이르러 무서운 속도로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팀추월 경기에서 김민석과 한 조로 은메달을 딴 두 사람이었다. 이승훈은 금메달을 확정 지으며, 먼저 정재원을 찾아 후배의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평창을 떠난 정재원이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느라 2주간 미국에 머문 사이, 이승훈은 MBC <라디오 스타>, SBS <집사부일체>, KBS <연예가 중계> 등의 예능을 소화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맘 편히 자니까, 오전 10시 정도에 깨고 그랬어요. 집에서 아내와 TV를 보다가 밤늦게야 잠들기도 하고요.” 매일 오전 5시경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기 전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하던 그는, 예나 지금이나 알람을 맞추지 않고 눈 떠질 때 일어나보고 싶다고 했다.

이승훈 (1988년생)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매스 스타트 금메달, 팀추월 은메달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10000미터, 5000미터 금메달

이승훈이 입은 스웨트 셔츠는 오프화이트 by 존 화이트, 팬츠는 존 화이트 제품.

이승훈이 입은 스웨트 셔츠는 오프화이트 by 존 화이트, 팬츠는 존 화이트 제품.

평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 소치에서 팀추월 경기로 은메달, 첫 올림픽이었던 밴쿠버에서 남자 10000미터 금메달과 5000미터 은메달.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두루 좋은 성적을 거둔 이승훈은 현재 아시아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중 동계올림픽 최다 메달 보유자다.

이승훈과 4년 전 소치에 함께 간 후배 중 “다음 번 평창에서 금메달 딸게요”라고 말한 이가 있었다. 이번에 못하면 다음에, 다음에도 못하면 그다음에 더욱 잘하면 된다는 말은 국가대표에게 안일한 위안인지도 모른다. 그 후배는 결국 평창에 가지 못했다. 이승훈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다음이란 없어요. 다음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항상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창 동계올림픽이 제 마지막이라 여기고 준비했고요.” 지금껏 만나본 어린 국가대표 선수들은 모두 꿈과 목표로 올림픽을 언급했다. 국가대표로 뽑히는 것이 꿈인 시절을 지나 태극 마크를 달면, 그들의 목표는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따는 것으로 신속하게 수정된다. 그렇다면 이미 세 번의 올림픽을 경험했으며 자기 종목에서 아시아 최다 메달 보유자의 타이틀을 쥔 이승훈에게 다음 목표는? 또, 올림픽이다. “마음먹었다고 해서 올림픽행이 보장되는 게 아니거든요. 선발전을 치르고, 출전 티켓도 따내고, 사람 일이 어찌 될 지 모르니 베이징에 가는 것부터 목표로 삼아야죠. 그다음엔 다른 아시아 선수가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오르고 싶어요.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멈추려 했겠지만, 평창에 있는 동안 자신감을 얻었어요.”

이승훈은 4년 전 소치에서 돌아온 후에도 <더블유>와 만났다. 그때 그는 평창을 끝으로 무조건 은퇴할 생각이며, 너무 힘들면 그전에라도 그만둘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아니었더라도 한국 동계 스포츠의 스타다. 그런 인물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도전하겠다’고 했으니, 그 소식은 아시아 최다 메달 보유자가 출마 선언이라도 한 것처럼 홍조 띤 뉴스로 금세 퍼졌다. 그는 이번 올림픽을 무사히 치르는 동안 베이징으로 향할 마음을 키웠고, 특히 10000미터 경기를 치른 다음 결심을 굳혔다. 빙상장에서 얼음을 지치다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고 할 정도로 베테랑인 선수에게도 고통스러운 장거리 레이스. 서울 강남역에서 동대문 두산타워에 이르는 거리가 10000미터쯤 된다. 이승훈은 평창에서 자신의 종전 최고 기록인 12분 57초 27보다 빠른 12분 55초 54를 기록했음에도 4위를 했다. 그는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완주할 수 있다면 다시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는데, 아마 아깝게 메달을 놓쳐 아쉽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을 법하다. 스포츠에 변수는 늘 생기는 법. 소치 이후 매스 스타트를 주 종목으로 여기고 준비한 이승훈에게 애초 10000미터 경기는 제외 대상이었으나, 이 역시 평창행을 앞둔 상황에서 본인의 폼과 컨디션에 따라 참여 의지가 솟아난 것이다.

위대한 스포츠 선수에겐 그 사람을 위대한 자리에 오르게 만든 특징이 있다. 김연아 같은 선수에겐, 특유의 무덤덤함과 무심함이 그녀가 어릴 적부터 세계 무대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게 만들어준 성격적 요인일지도 모른다. “제 경우엔 누구보다 많다고 자부하는 운동량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심지어 재원이보다 제가 운동을 많이 할 거예요. 재원이 나이일 때는 아직 어린 대표팀의 막내였기 때문에 막내답게 운동을 많이 했고, 20대 때는 가장 왕성한 시기니까 많이 했죠. 30대가 되고선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또 많이 했어요. 한마디로 힘들게 훈련하는 생활이 몸에 밴 거죠.” 그의 말에 따르면, 스피드 스케이팅은 연습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종목이다. 정재원이 옆에서 말했다. “제 훈련 양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국가대표팀에 합류해 승훈이 형을 보면서 훈련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정재원 (2001년생)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팀추월 은메달
2018년 국제빙상경기연맹 세계주니어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권대회 남자 5000미터, 팀추월 금메달

정재원이 입은 스웨트 셔츠는 이지, 안에 입은 녹색 티셔츠는 지프, 팬츠는 발렌티노 제품.

정재원이 입은 스웨트 셔츠는 이지, 안에 입은 녹색 티셔츠는 지프, 팬츠는 발렌티노 제품.

매서울 만큼 기준치가 높은 이승훈을 생각하면 이제 열여덟 살인 정재원의 갈 길은 멀다. <더블유> 화보 촬영 전날 새벽, 세계주니어선수권 대회에서 개인전인 5000미터 금메달과 남자 팀추월 금메달을 따고 막 돌아온 정재원이지만 말이다. 평창에 있는 동안 재원의 친구들은 그에게 ‘부럽다’고 문자를 보냈다. “매스 스타트를 뛰는 선수들 간에 격차가 벌어지면서 저만치 앞으로 도망가는 그룹이 생길 거라 예상은 했죠. 그때마다 제가 바짝 쫓아붙었어요.” 이승훈과 정재원은 태릉 선수촌에서 한 방을 썼던 사이다. 이승훈이 없을 때, 정재원에게 다가가 슬며시 물었다. 대선배이자 엄청난 존재와 한 방을 쓰는 거 솔직히 숨 막히지 않냐고. 무표정이던 정재원이 씩 웃더니 말했다. “처음엔 저도 불편할 것 같아 긴장했는데, 좋았어요. 형이 친근하게 대해줬거든요.”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열세 살. 이승훈의 단점을 말해달라고 집요하게 묻는 <더블유> 디지털 에디터 앞에서 한참을 고민한 정재원은 이실직고하듯이 ‘형은 게임을 잘 못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게임이란, 정재원이 숙소 안에서 자주 즐겼다는 배틀그라운드다.

“재원이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번에 은메달을 땄으니까 다음에 금메달을 따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노력이 뒷받침돼야 해요. 아직 많은 날이 남은 재원이에게 지금까지보다 훨씬 힘들 날이 분명 올 겁니다. 그럴 때 주춤하고 멈춰서는 안 돼요. 간혹 선수들이 너무 힘들면 자기가 그만큼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데, 그 정도 노력은 최선을 다한 노력이 아닐 거예요. 어느 정도 노력 했다고 좀 쉰다면 남들보다 처지는 게 사실이고요. 스포츠 세계에서는 1등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누구나 하는 정도의 노력을 넘어서야 해요.” 이승훈의 이 말은 정재원뿐 아니라 후배 운동 선수들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정재원과 이승훈이 입은 티셔츠는 스튜디오 콘크리트, 팬츠는 존 화이트 제품.

정재원과 이승훈이 입은 티셔츠는 스튜디오 콘크리트, 팬츠는 존 화이트 제품.

그러나 아시아에서 견고한 타이틀의 소유자로 남기 위해 다시금 도전을 마음먹는 이승훈과 이제 첫 올림픽을 겪은 고등학생 정재원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스케이트를 타는 일이 재밌다는 것. 보통 사람은 쉬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훈련을 거듭하는 삶 속에서도 그들은 그런 말이 나온다. 정재원보다 많은 경험을 해본 이승훈은 선수 기량의 굴곡진 그래프 역시 과정일 뿐이라는 걸, 힘든 순간이 지나면 곧 재미를 더 크게 느끼는 시간이 온다는 걸 알고 있다. 통달한 자세로, 그러나 여전히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남은 이승훈. 그 선수가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어린 후배 정재원. 4년 후와 8년 후, 어쩌면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이들은 각자의 새로운 전설을 쓰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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