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게 쓴 재밌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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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좀 두툼하다. 그런데 재밌다. 잘 읽힌다. 박용만 회장의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이야기다.

두산매거진의 초대 발행인이자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박용만이 첫 책을 낸다고 하자, 그가 접한 대부분의 반응은 비슷했다고 한다. 다들 표지 한가운데 ‘회장님 얼굴’이 크게 자리 잡고 있거나 일대기를 기록한 자서전이라고 짐작한 거다. 그는 그런 책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머리에서 나오는 글을 누가 대신 써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마음산책)는 박용만 회장의 ‘산문집’이다. 신간을 볼 때면 늘 그렇듯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페이지부터 펼쳤는데, 이런 제목이 있다. ‘이야기를 솔직하게 쏟아내는 작업.’ 이 서문으로 말하자면, 앞으로 펼쳐질 무수한 활자들에 앞서 어떤 짐작이나 편견을 가졌을지도 모를 독자를 금세 무장 해제시킨다. 사실 박용만 회장은 그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감각과 그 감각으로 인한 생각들은 결국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때문에 글쓰기에 방해가 된다는 것, 그래서 바깥이 주는 자극을 차단하고 오롯이 혼자인 채 들어앉아 글을 써야 솔직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 매달 마감을 치르며 사는 에디터로서 ‘외로울 만큼 철저히 혼자, 충분히 몰입해 이야기를 쏟아내서 더없이 즐거웠다’는 그의 말은 400페이지가 넘는 볼륨의 원고를 성공적으로 털어낸 자의 진정한 소회임을 알 수 있었다.

8년 전쯤, 박용만 회장을 ‘취재원’으로 삼고 싶어서 그에게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심리분석 프로그램에 관한 기사를 쓸 때였다. 조사하다가 우연히 박용만 회장도 관련 프로그램 경험자라는 걸 알았다. 그에게서 온 답장의 첫 문장은 ‘나 바쁜뎅 ㅠㅜ’. 그는 시간을 쪼개 쓰기 위한 효율적인 동선을 찾아 ‘접선지’를 제안했고, 기꺼이 체험담을 들려줬다. 그것도 능숙한 그 스토리텔링으로. 글 쓰는 사람의 문장과 어투는 역시 그 사람을 닮는다.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를 읽다가, 유려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의 말맛과 글맛을 느꼈다. ‘졸업하면 어떡할 거야?’, ‘멀쩡하게 즐겁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상대가 바보인가?’, ‘내가 잘 몰라서 판단이 안 된다’, ‘처절한데 참 따뜻하네’ 등의 글 제목은 박용만 회장의 유쾌하고 호탕한 말투를 연상시킨다. 인상적인 것은 그 에피소드들이 하나같이 구체적이어서 재밌다는 점이다. 성묘하러 갔다가 땅벌의 공격을 받고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던 때를 전투 상황으로 묘사하고(‘내 몸의 비밀이 얼마나 더 있을지’), 시사 매체 보급소에서 나온 이를 기자로 착각하고는 ‘방어’ 하기 위해 쉬지 않고 따발총처럼 떠들었을 때의 일화(‘너무 떠들었나?’)를 기술하는 데서는 그의 기억력과 촘촘한 관찰력에 호기심이 생긴다. 10대 때 친구 여동생을 보고 한눈에 반한 경험을 소상히 고백하는 것이야 ‘첫사랑’의 힘이라는 게 그렇게 만들어주기 때문일 것이다(그 ‘첫사랑’이 지금 그의 부인이다). 유명 기업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기자들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지만, 세상사에 관심 많은 공감대 때문인지 기자들을 좋아한다는 점, 드라마 속 기업 회장들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서 방송작가협회의 강연 요청을 승낙하는 면 등은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그의 특성을 보여준다. 약간씩 스치는 위트는 디폴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교황에게 할 말을 스페인어로 달달 외워 준비하고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제발 교황님이 스페인어로 반문하지 않게 해주세요.’

생각해보면 박용만 회장은 트위터 초창기에 ‘회장님의 언변’으로 화제가 되곤 했다. ‘Q. 회장님은 술 드실 때 어떻게 드세요? A. 잔에 따라서 건배하고 마십니다.’ ‘Q. 회장님은 가장 갖고 싶은 차가 어떤 차세요? A. 아들이 번 돈으로 사주는 차.’ ‘Q. 회장님~ 요즘 신입사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뭘까요? A. 귀엽다는 거져.’ 그 시절에 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는 책에서 사업과 구조 조정, 컨설팅사를 바라보는 관점, 대한상공회의소와 정부 간 협업, 리더의 덕목, 신입사원 면접의 기억 같은 이야기도 펼친다. 종로 노인 급식소에서 요리 봉사를 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골목골목 찾아다니기도 즐긴다. 이쯤 되면 여느 ‘회장님’들은 산문집을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 아닐까 싶은 생각도 좀 든다. 박용만 회장의 책이 술술 읽히는 건 단지 필력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읽을 맛이 가득한 에세이는 사상과 관념보다는 실생활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소재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모두 박용만 회장이 직접 찍은 것이다. 그는 졸업 후 사진 기자를 꿈꿨던 시절이 있다. 사진 기자는 되지 못했지만, 그는 이후 유수의 라이선스 패션지들을 발행했다. 박용만 회장의 글과 사진을 보니 왜 그가 ‘매거진’을 사랑하는지 알 것 같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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