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변의 맛 (더블유 12월호 유병재 인터뷰)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눌변의 맛 (유병재)

2020-11-25T21:57:07+00:002020.11.26|FEATURE, 피플|

더블유 12월호 유병재 인터뷰.

명을 달리할 때까지

들고 늙어서도

미를 탐구하고 싶습니다.’

삼행시집을 낸 유병재, 코미디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말수도 별로 없는 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셔츠와 모자는 코스, 넥타이는 던힐 제품. 바닥까지 끌리는 커다란 팬츠는 에디터 소장품.

유병재, 1988년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가족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자랐다. 집안에서 아래 세대의 유일한 남자아이였던 그가 재롱을 피울 때마다 즐거워한 일가친척이 훗날 스탠딩 코미디 무대에 서게 된 그의 생애 최초의 관객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웃기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유병재는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타입이다. 자기가 놀림을 받는 상황도 반긴다. ‘어떻게 해서든 웃음을 만들고 싶은데 그럴 때면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웃음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크게 떠들며 좌중을 휘어잡기보다 낮고 조용한 자세로 웃음을 추구하는 그는 뭔가 어눌하고, 억울해 보인다. 이왕 그런 인상을 유병재는 자기 코미디의 정서적 동기로 삼기도 한다. 방송작가, 방송인, 코미디언, 유튜버 등 여러 캐릭터로 재능을 방출하고 사는 그가 최근 <말장난>(아르테)이라는 책을 냈다. 2017년 출간해 6개월 만에 8만 부를 찍은 <블랙코미디>(비채)가 짧은 에세이와 아이디어 노트 모음집이었다면, 이번엔 ‘삼행시집’이다. 삼행시 약 200편이 그 내용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레이아웃 속에 흐른다. 그는 ‘목차’라는 단어에마저 ‘목적은 일단 / 차례대로 읽어주시는 건데…’ 식으로 처음부터 끝 페이지까지 N행시 작문을 부렸다. 가벼운 농담으로 스쳐 지나갈 삼행시라는 형식이 유병재를 만나니 웃기고, 귀엽고, 다정하고, 기발하고, 때로는 의미 있는 메시지까지 던진다. ‘삼행시의 끝’을 보여주는 <말장난> 이후 과연 출판계에서 삼행시를 테마 삼은 책 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유병재와의 인터뷰는 작은 방에서 청문회를 하는 듯한 공기 속에 시작했다. 화보 촬영 때와 달리, 그는 신기할 정도로 정적인 하나의 표정을 지켰다.

셔츠와 팬츠, 벨트는 모두 보테가 베네타, 신발은 크록스 제품.

당신의 매니저가 잡지 중에서는 꼭 <더블유>와 화보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다고, 삼고초려를 해달라며 기다려줘서 은근히 감동했다. <더블유>를 원한 건 당신과 상관없는 매니지먼트의 선택인가?

유병재 아니다, 회사는 물론 나의 의지이기도 했다. 더블유와 유병재는 일단 같은 ‘유’씨이기도 하고…. 한때는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오랜만에 이런 자리를 갖는다.

삼행시집을 냈으니 ‘더블유’로 삼행시 한번 읊고 대화를 시작하면 어떨까? 책처럼 활자화 됐을 때 더 적합한 버전이 있고, 예능에 어울리는 버전이 있다. 서로 문법이 좀 다른데 뭘 해야 할까.

둘 다 원한다. 너무 금방 끝나면 아쉬우니까. ‘더러운 / 블랙헤드 / 유분 제거로 예방하세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랍니다 / 블로소득 / 유튜브도 쉬운 게 아니에요.’

유병재 유튜브 채널은 종종 재밌게 보고 있다. 히트 캐릭터인 ‘카피추’도 당신의 유튜브를 통해 알려졌고, ‘제1회 타짜 덕력 시험평가’라는 콘텐츠가 퍼지면서 전설의 곽철용이 난데없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곽철용이야 나의 요인만은 아니고, 이진호 형이 방송에서 가끔 곽철용 성대모사를 선보인 것도 맞물렸다. 남자들 중에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자주 방영하는 영화를 두고 유명 대사보다 시답잖은 대사를 외우면서 웃고 즐기는 경우가 있다. 주변 또래들이 재미밌어 하는 문화를 콘텐츠로 풀어보고 싶었다. ‘우리끼리 웃고 좋아했던 게 이렇게 이슈가 되기도 하는구나, 재밌네’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이렇게 만났을 때 유병재 스타일의 삼행시를 문학 작품 낭독하듯이 해보는 콘텐츠를 만들면 어떨까 싶었는데, 바로 며칠 전 당신 채널에 그런 콘텐츠가 올라왔더라(웃음). 그래서 <더블유>와는 삼행시 ASMR을 해보자고 제안한 거다. 2011년부터 유튜브에 뛰어들었는데, 그간 어떤 노하우가 생겼나? 유튜브를 시작하는 이들이 나에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본다. 그런데 이게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지향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지 않은 연예인이 스스로 즐거운 걸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서 시작했다가 점점 시간이든 뭐든 생각보다 많은 걸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본업이 있는데 새로운 업이 또 생기는 거다. 결국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참여가 필요하고, 그러다 보면 처음의 목적과 달라지는 점이 생겨서 힘들어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나도 기획부터 모든 걸 내가 해보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그 욕심을 충족하려니 꾸준히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에 비하면 이번에 낸 책 <말장난>은 왠지 수월하게 기지를 발휘하여 완성했을 것만 같다. 뭐 한 번에 다 한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시기에 걸쳐 썼으니까. 흡족한 N행시가 직관적으로 잘 떠오른 경우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서 고민한 경우가 다 있다. 잘 안 풀릴 때면 해당 단어의 각 음절로 시작하는 단어를 쭉 써본다. 거기서 얻는 이미 지나 환기되는 감정을 또 쭉쭉 연결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짧은 삼행시 안에 메시지를 담거나 단어의 뜻까지 고려한 경우가 많아 인상적이다. 이를테면 ‘월요병’은 ‘월급 받잖아 / 요것만 이겨내자, 내일만 견디고 내일 모레까지만 참고 그다음 날 극복하고 하루만 더… / 병가 낼까.’ ‘상담원’은 ‘상처 주지 말기 / 담백하게 말하기 / 원래 사람에겐 그래야 하니까.’ 예능 안에서 종종 갑자기 삼행시를 짜내야 하는 순간에는 몇 초만 늦게 치고 들어가면 재밌는 내용도 재미없어지곤 한다. 예능이란 타이밍 싸움이기도 하니까, 두음법칙 같은 거 무시하고 말이 안 되는 삼행시가 등장해도 다들 웃는 분위기로 흐를 수 있다. 그런데 책을 만들 때는 인쇄하고 출판하기까지 나도 고민의 시간을 거친다. 그 제시어를 봤을 때 되도록 단어의 의미가 환기되는 느낌으로 쓰고자 했다. 예능용 삼행시와 활자화가 목적인 삼행시의 성격이 다르다는 걸 나도 이번에 책 쓰면서 깨달았다.

자신이 글쓰기에 소질이 좀 있다는 걸 어렴풋이라도 느낀 게 몇 살 즈음인가? 아직까지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전부터 내 관심은 글보다는 코미디에 좀 더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코미디 안에서도 어떤 걸 좋아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연기하고 콩트 하는 것도 좋지만 대본 쓰는 일이 훨씬 재밌더라. 스탠딩 코미디를 준비할 때도 집에서 대본 작업하면 즐겁고 행복했다.

그 사람의 말과 표정 연기와 상황의 맥락이 다 합체했을 때 비로소 웃음이 유발될 텐데, 활자만 존재할 때는 느낌이 꽤 다를 것 같다. 나는 말을 하면서 써본다. 일단은 글 대본을 써놓고, 그걸 말 대본 형식으로 바꿔서 여러 차례 반복한다. 그래서 입에 붙게, 노래 연습하듯이 하는 편이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말을 잘한다’거나 ‘내 말재주가 상대에게 통한다’라고 생각했나? 말을 잘하는 것과 남 웃기는 것은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좀 다른 문제인데. 그 두 가지가 다른 일이라고 먼저 전제를 깔아주니 고맙다(웃음). 내가 말을 잘한다는 생각 역시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좀 눌변 타입 같다.

여러 방송을 통해 본 당신의 인상은 눌변이라기보다 낯을 가린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어느 쪽이든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은 콩트의 구조를 짜는 논리와 동물적인 감을 갖춘 지적인 인간일 것이다. 적당한 눌변의 매력이란 것도 분명 있고. 우선 내 취향이 말을 중얼거리듯 하는 톤을 좋아해서 이런 스타일이 자리 잡게 된 점도 있을 거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릴 때 말 똑바로 하다가 아는 형인지 어른께 혼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린애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또박또박 말하는 게 말대꾸하면서 뺀질거리는 것처럼 보였는지…. 사실 나도 마음 먹으면 말을 똑 부러지게 잘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상황에서 ‘그거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식의 말도 잘 못한다. 자칫 싸우자는 것처럼 들릴 듯해서.

그래도 당신이 누군가를 웃게 했을 때 희열을 느끼거나 좌중에 주목받아 기분 좋은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코미디언을 꿈꾸게 된 건 아닌가? 우리 집에 누나가 둘 있고 아들은 나 혼자다. 큰누나가 엄마 같은 존재였다. 친가 외가 합쳐서 아들이 나밖에 없다. 요즘은 그런 시대 분위기가 아니지만 30년 전에는 내가 엄청 예쁨 받는 환경이었다. 친척들이 모이면 나보고 좀 까불어보라고 하면서 귀여워해줬고, 나는 내가 뭘 할 때마다 ‘어? 이렇게 하면 다들 좋아하시네?’라고 알아챈 것 같다. 그러다 사춘기 접어들면서 수줍음도 생기고 조용해졌다.

중고등학교 동창들이 유병재가 UCC로 이름 날리고 <SNL> 출연하는 거 보면서 놀랄 정도였나? 아니, 수줍고 조용한 와중에도 웃길 수 있는 일은 다 했지…. 학교 축제 때마다 뭔가를 했다. <개그 콘서트>의 ‘고음불가’ 같은 거 흉내 내고, 이상한 옷 입고서 좋아하는 가수들 노래 부르고. 막 까불면서 오락반장 하는 캐릭터가 아니었을 뿐이지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쟤 좀 웃긴 애’라고 통했다. ‘너는 뭐가 되도 될 것 같았어’ 식의 반응이었다.

벨벳 재킷과 데님 셔츠, 넥타이는 모두 폴로 랄프 로렌 제품.

사람마다 유머 코드가 다른데, 유병재가 생각하는 가장 웃기는 사람은 누구인가? 최양락 선배님. 그분은 그냥 천재 같다. 그가 30년 전에 만든 콩트들은 지금 봐도 놀랍다. 나는 개그맨 공채 출신도 아니고, 어디서 배울 데가 없으니까 옛날 영상을 뒤지면서 혼자 공부하는 식으로 컸다. 그러면서 여러 코미디언에게서 고루고루 섭취한 면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최양락 선배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본다.

언젠가 개그맨 김학래가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최양락을 두고 ‘어눌하지만 누구도 흉내 못 내는 언어의 독특한 맛이 있다’고 한 것 기억난다. 그의 어떤 점이 그리 웃긴가? 그 사람은 진지한데, 막 웃기려고 애쓰는 것 같지 않은데 웃기는 스타일. 얼굴만 봐도 벌써 웃기다. 꼭 코미디언 아니라도 왜 캐릭터 자체로 그냥 웃음 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최양락 선배님의 특징 중 하나가 이야기할 때 한 문장 안에서 말을 끊어 읽는다. 최근에야 자각한 건데, 말을 그렇게 끊어 읽는다는 점에서는 나와 선배님이 비슷한 데가 있다.

발음 기호를 표시하자면 ‘알까:기’처럼 말을 아주 천천히 뱉다가 어떤 부분은 아주 빨리 뱉고 넘어가는 식으로 리드미컬한 걸 말하는가? 지금 대화하면서도 당신의 말에 속도감 있는 부분과 중얼거리듯이 쉼표처럼 처리되는 부분이 반복되는 듯하다고 느꼈다. 나는 선배님과 달리 목소리 톤도 낮고, 일부러 끊어 읽는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리되는 거지만 어릴 때부터 워낙 좋아 했으니 영향을 받은 면이 있을 거다. 참, 우리는 같은 충청도 출신이기도 하다.

당신이 재작년에 한 스탠딩 코미디 쇼 두 개를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소극장에서 한 첫 번째 쇼가 더 즐거웠다. 스탠딩 코미디란 언변, 연기력, 쇼맨십, 지구력, 뻔뻔함 등 넓고 깊은 내공이 필요한 위대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해보 니 그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던가? 윌 페럴이 스탠딩 코미디에 대해 ‘코미디언에게 가장 잔인한 무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무런 장치 없이 무대 위에서 홀로 마이크 잡고 1시간 정도를 채워가야 하니까. 일부러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고서 그에 대한 반응을 느끼는 코미디도 있지만 스탠딩 코미디는 그런 걸 시도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혼자 다 하고 스스로 피드백도 얻어내야 한다. 그 외로움이랄까, 아무튼 그 모든 걸 감당하고 견딜 수 있는 용기, 깡이 필요한 것 같다.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그 무대에 오른지라 다음 차례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준비하려 한다.

타인에게서 부러움을 느끼는 재능에는 어떤 게 있나? 일을 하려면 스위치를 딱 켜야 할 때가 많은데, 나는 스위치가 켜지기까지 오래 걸리는 편이다. 아예 안 켜질 때도 있다. 온 오프가 쉽게 되거나 늘 스위치가 켜져 있는 듯한 사람들 보면 좀 부럽기도 하다. 물론 그들이 속으로는 어떤 노력을 하는지 모르고서 내가 지레짐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본인에게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재능은 뭔가? 글쎄, 내가 생각이 많지만 나에게 그런 게 뭐가 있을지는 별로 생각을 안 해본 것 같다(웃음). 코미디에 국한해 말해보자면 최소한의 문학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접근하려는 점은 있다. 비유하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 게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좀 차별화된 점 같다.

그거 아나? 우리 대화가 활자화되면 당신의 육성보다 행간의 뉘앙스가 다듬어지겠지만, 당신이 내내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한다는 느낌이다. 방송작가들한테 ‘왜 그렇게 조심하려고 그래요’ 같은 말을 자주 듣는다. 말할 때 단어 선정에 애쓰거나 고민이 많은 건 원래 성격이 그렇다. MBTI 앞자리가 I로 시작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조심성, 소심함 같은 건 엄마에게 물려받은 면이 큰데,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남한테 폐 끼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내가 하는 일도 나름 칼을 쥐고 있는 직업이다. 웃음이라는 미명 아래 실수들은 되도록 하지 말자는 생각이다.

유병재의 포부는 뭔가? 어느 코미디언은 묘비명을 ‘웃기고 자빠졌네’로 하겠다고 일찍이 계획해놨던데. 딱히 앞날을 그리면서 살지 않는다. 바라는 게 있다면 ‘현상 유지’ 정도. 예전에는 도달할 수 있는 높이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냥 오래가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