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적인 이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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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 전 멤버, 기타리스트, 이효리의 남편, 조지 리, 방송인, 그리고 디제이. 무엇으로 불리든 이상순은 즐거운 인생을 찾아 단독자의 길을 가고 있다. 강박 없이 느슨하지만 길을 잃는 법이 없고, 집 안에 머물 때도 세상에 대한 냉소보다 궁금함이 큰 그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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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신세대적’이라 불린 어떤 음악들은 지금 들어보면 귀엽다. 어린 날의 내가 반응한 획기적인 창작물을 시간이 지나 되짚어보면, 나와 달리 나이 들지 않은 그것은 그 시절을 보여주는 추억의 좌표로 그곳에 계속 남아 있다. 그런데 어떤 음악은 시간이 흘러도 충분히 ‘현대적’이다. 시대를 앞서가겠다는 욕망이 가득한 것도 아니고, 그 당시의 시크함과 충실함으로 가득한데 지금 들어도 어쩐지 동시대적인 음악. 롤러코스터가 그렇다. 20세기에 데뷔한 그들의 음악을 지금 다시 끄집어내도 거기에 복고풍이라는 말을 붙이긴 힘들다. 자미로콰이 같은 뮤지션이 새로운 출현이라고 느껴진 후 몇 년이 지나, 가요계에는 애시드 재즈를 흡수해 훵키한 스타일을 선보이는 롤러코스터가 있었다. 롤러코스터는 음반 판매량이나 인지도 면에서 성공한 밴드이기 때문에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가수’ 대접을 받는 경우와는 거리가 있다. 다만 그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이상순을, ‘이효리의 음악 하는 남편’이라고 인지할 전국의 시청자 중 일부를 상상하니 조급함이 들 뿐이다. 언젠가부터 그가 디제잉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주목받기 좋은 행사장에서 디제잉을 하는 식으로 새 시작을 알리진 않았다. 사진과 영상 촬영도 금지하며 프라이빗한 파티를 여는 어느 클럽에서는 시크릿 게스트로 등장해 음악을 틀었다. “디제잉을 하면서 뭘 느끼냐면, ‘이거 왜 이렇게 재밌어?’ 하는 거예요. 이 나이에 이런 느낌을 갖기가 쉽지 않잖아요. 즐겁게 음악 한다는 점에서 만족해요. 디제잉은 삶에 활력소가 되는 것이기도 하고, 나중에 봤을 때 음악 인생에서 의미 있는 챕터가 될 수도 있겠죠.” 머지않아 그는 테크노 음악을 담은 EP를 낼 것 같다. 그 음악은 그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는 마이너한 클럽이나 규모가 작은 페스티벌에서만 들릴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제법 익숙한 이상순이 이렇게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가 될지 모를 일이다.

벨벳 소재 코트, 팬츠, 실크 셔츠는 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목걸이는 램쉐클, 가죽 부츠는 벨루티 제품.

<W Korea> 요즘 어떤 날들을 보내고 있나?

이상순 뭐, 늘 그랬듯이 개들 돌보고. 효리를 돌보기도 하고(웃음). 음악 만들면서 가끔 디제잉하러 왔다 갔다 한다.

디제잉을 한다는 소식은 예전부터 들었다. 이제 디제이 이상순으로 본격 활동하려는 건가? 나름 본격적으로 한 지는 몇 년 됐는데, 내가 트는 음악은 워낙 언더그라운드 신에 속해서 본격적으로 한다 해도 별로 티가 안 난다. 게다가 제주에 사니까 한 달에 한두 번 클럽에 가서 디제잉하는 정도다.

주로 어떤 클럽에 가나? 이태원의 리빈, 홍대의 모데시, 부산에 있는 아웃풋… 모두 테크노 음악을 틀 수 있는 클럽들이다. 국내에선 아무래도 EDM이 강세라 미니멀 테크노, 테크 하우스, 딥 하우스 같은 음악을 틀 만한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작년에 남양주에서 열린 뮤직 페스티벌 ‘디 에어하우스’에서 당신이 디제잉 중인 90분짜리 영상을 봤다. 살면서 ‘힙하다’는 표현을 웬만하면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는데, 산속에서 캠핑하며 1박 2일간 논스톱으로 즐기는 그 분위기는 정말이지 힙하더라(웃음). 바이닐로 디제잉하는 이들끼리 모여서 만든 페스티벌이다. 숲속에서 하니까 분위기가 아주 색다르고 좋다. 요즘 디제이들은 주로 USB나 CD를 사용하기 때문에 바이닐을 위한 세팅이 갖춰진 곳은 제한적이다. 나도 바이닐을 틀 수 있는 곳, 그리고 내가 주로 트는 음악과 그 분위기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는 곳만 골라 다닌다. 테크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런 음악을 틀면 거기 있는 사람들도 디제이도 모두 분위기가 어색하고 불편해질 수 있어서다.

당신의 디제잉을 들어봤을 때 적당히 신나고 비교적 편안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 장르에 좀 묘한 데가 있어서, 현장 분위기까지 더해지면 음악이 최음제처럼 느껴질 것 같다. 그걸 최음제라고 말한다면, 내가 트는 음악이 최음제의 집합체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다. 테크노 안에서도 음악에 따라 스타일이 세분화되고 종류가 많다. 내가 하는 건 멜로디 없이 리듬 위주여서, 자극적인 것들에 비하면 절제되고 편안하다고 느낄 법하다. 그런 리듬 속에 몇 시간 있으면 어느 순간 정말 취하는 느낌이 든다. 언젠가 그런 경험을 하고서 ‘이런 거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 디제잉을 시작한 여러 계기 중 하나다.

이상순이 기타 치는 모습만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테크노 음악과 클럽에 대해 말하는 당신을 낯설게 볼 것이다. 90년대생 에디터에게 물어보니, 2010년에 당신과 김동률이 발표한 베란다 프로젝트의 음악은 가끔 들었다고 하더라. 롤러코스터를 모른다면 지금의 내가 낯설 수 있겠다. 그 이후부터는 어쿠스틱 쪽으로 향해 있었으니. 그런데 롤러코스터가 일렉트로닉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팀이라 그 시절과 지금을 생각하면 연관성이 없진 않다.

1999년에 나온 롤러코스터 1집의 ‘내게로 와’, ‘습관’을 아직도 종종 듣는다. 2006년 5집과 디지털 싱글을 낸 이후 당신과 지누, 조원선은 각자의 음악 활동을 펼쳤다. 롤러코스터 시절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대중음악을 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음악만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이번에는 더 히트를 쳐야 하니까 이렇게 좀 가보자’ 식으로 타협한 적 없이, 우리 셋 이 정말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자는 생각이 일치했다. 공연이든 뭐든 우리가 썩 나가고 싶지 않은 어딘가에서 우리를 찾는 바람에 억지로 가서 활동한 기억도 없고. 하고 싶은 걸 하고, 나가고 싶은 곳에만 나갔다.

대중음악 시장에서 활동하며 가장 힘들다고 느낀 점은 뭐였나? 혹은 힘들다고 느낄 만큼의 적극적 활동은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추구하는 바대로 했으니 힘들다고 할 만한 건 없었지만, 우리 나름대로는 활동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음악 시장 분위기에서는 롤러코스터를 자꾸 ‘인디’라고 여기는 시선이 있더라. 우리는 음반도 다 계약 맺어 발표했고 메이저로 활동했는데!

아, 나는 메이저에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인디로 바라볼 때의 그 난감함. 롤러코스터 앨범은 유통도 제법 큰 회사에서 하지 않았나? 그렇다. 녹음을 홈 레코딩으로 하긴 했지만. 어떤 가수들에 비하면 활동 영역이 상대적으로 작았을 뿐이지 그 영역 안에서는 열심히, 활발히 했다. 대학교 축제 시즌이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행사도 많이 했고.

롤러코스터 1집 뮤직비디오에서는 형광색 바지를 입고 외계인 탈을 쓴 채 기타 치는 이상순을 볼 수 있다. 그보다 전 록 밴드 생활을 할 때는 맨몸에 멋진 슈트를 입고 단추를 풀어헤친 모습, 잘 봤다. 젊은 날의 자신을 떠올리면 어떤가? 그걸 다 찾아서 보다니…(웃음) 글쎄, 그때와 지금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외양이야 달라졌겠지만 큰 음악관은 변함없다. 나는 늘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주의다. 군대 전역 후 바로 들어가게 된 밴드는 내 의지로 결성된 팀은 아니어서 성격이 좀 다르지만, 덕분에 스튜디오 녹음도 해보고 좋은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롤러코스터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롤러코스터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유학 생활도 할 수 있었고. 과거의 선택들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제일 좋구나’라는 깨달음이 그 이유가 되어줬을 것이다.

시어링 코트는 톰 포드, 팬츠는 준지, 부츠는 피어 오브 갓 X 제냐 제품.

네덜란드에서는 뭘 공부했나? 음악 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을 좀 받았나, 아니면 다른 세상에서 머리 식히며 문화적 자양분을 취하는 정도였을까? 재즈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좀 있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유학 생활에 대한 동경도 있었고. 암스테르담은 재즈 음악 분위기가 잘 조성된 도시이고, 훌륭한 선생님이 많았다. 거기 가서야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유럽이면서 영어권인 것도, 학비가 저렴한 것도 좋았다. 3년 동안 내가 잘 모르는 것들을 공부했으니 음악적으로 당연히 도움이 됐다. 그보다 인생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에 영향을 받은 점이 더 크다.

어떤 점이 결정적이었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낯선 뭔가를 받아들이는 데 열려 있는 분위기다. 그 자유로움이 좋았다. 유학을 서른셋에 떠났는데,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졌을지 모른다. 음악을 오래 하다 보면 자기가 듣는 음악만 듣고, 잘 모르거나 싫은 건 피하게 되니까. 그런데 거기서 같이 생활한 어린 친구들이 새로운 것들을 진지하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면서 나도 전에 접하지 않던 음악을 많이 듣고 살았다. 원래는 클래식을 잘 듣지 않았는데 거기 클래식 콘서트홀이 많으니 자연스레 접하게 되고.

최근 몇 년간 이상순의 이름이 크레딧에 오른 곡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양희은&이상순의 ‘산책’이다. 당신의 차분한 기타와 고상지의 애절한 반도네온, 박창학의 문학적인 가사가 흐르는 남미풍 곡. 요즘 가요에선 접하기 힘든 스타일이다. 그런 음악을, 우리나라에서 메르세데스 소사처럼 연륜 있는 가수가 부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양희은 선배님과 서로 뜻이 맞았으니 내겐 영광이었다.

기타리스트들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아주 다른 이미지인 경우가 적지 않다. 기타를 잡은 사람이라면 하드한 록에 심취했을 확률도 높으니까. 고등학생 때 한창 헤비메탈에 빠졌지(웃음). 기타 연습을 해봤더니 같이 시작한 친구들보다 내가 상대적으로 빨리 늘었다. 주변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금방 늘어?’라는 반응이었고. 고2 무렵부터 앞으로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기타가 너무 재밌었다. 종일 기타를 쳐도 지루하지가 않고 해야 할 것이나 궁금한 것이 많은 게 신기했다. 매일 학교를 마치면 버스 타고 기타 학원에 가서, 막차로 돌아오곤했다.

기타로 어느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진 시기도 물론 있겠지? 있었지만, 금방 지나갔다.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려면 밴드를 하거나, 녹음이나 공연 전문으로 가야 할 텐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기타리스트’보다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기타라는 익숙한 악기를 가지고 음악 작업을 하는, 내가 만든 음악 안에서 연주를 잘하는 음악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음악 생활 초기엔 록과 훵키한 스타일을 해봤고, 포크와 보사노바에도 애정이 큰 거로 안다. 올여름엔 싹쓰리의 ‘다시 여기 바닷가’ 같은 곡도 만들었다. 전천후 스타일에 가까운데, ‘이런 음악은 도저히 못하겠다’ 싶은 게 있나? 싹쓰리 같은 경우가 내겐 제일 어렵다(웃음). 보다 많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만드는 것 말이다. 물론 음악을 만들 때마다 많은 이들이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의도와 목적으로 시작하는 작업은 거의 없었으니까. 우연히 좋은 기회가 닿아, 그리고 <놀면 뭐하니?>라는 프로그램에 녹아들면서 나도 도움을 받았다. 그 곡도 ‘차트 상위권에 올라갈 대중음악을 만들겠어!’라고 작정하고 만들었다면 그렇게 못 나왔을 거다.

싹쓰리로 음악 인생에서 차트 최상위권의 맛을 봤는데 기분이 어땠나? 아직 입금이 안 되어서…(웃음) 수익금은 모두 기부되고 아마 저작권료만 나올 텐데 어느 정도인지 지금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떠나서 기분이 되게 좋더라. 힘든 시기에 음악으로 위로를 받았다는 반응 들었을 때, 시간이 좀 흘렀는데 차트에서 안 내려오고 있는 걸 봤을 때도 기분 좋았다. ‘오 아직도 있어?’ 싶고. 이와 비슷한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롤러코스터 때도 성적을 확인하고서 우리끼리 신난 적 있다. 발표한 음악을 많은 사람이 들어준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아티스트는 결국 ‘자기 것’을 세상에 내놓는 사람이고, 그게 세상에 얼마나 통하느냐의 문제가 따른다. 이상순은 이상순이 하고 싶은 걸 내놔도 대중과 충분히 통할 것 같다. 아, 디제잉용 테크노는 좀 다르려나. 뭘 하든 내가 만족하는 음악만 나오면 된다. 그리고 내가 뭘 해도 그걸 들어주는 분들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뮤지션은 음악 하기가 좀 편하다. 수중에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적인 것에 영향을 잘 안 받는 스타일은 음악 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다. 나는 결혼을 하고 다행히도 큰 걱정 없이 사는 편이다. 그럼 과거에는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거나 걱정하면서 음악 생활을 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과거와 지금의 내가 똑같다고 느끼는 거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걸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점이 고맙다. 마니아틱한 음악이라도 그걸 듣고 싶어 하는 소수가 세상에 분명 있을 텐데, 내가 누군가의 그 부분을 만족시켜줄 수 있다면 또 고마운 일이다.

티셔츠는 블러, 가죽 팬츠는 준지, 부츠는 피어 오브 갓 X 제냐 제품.

음악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음악이 좀 싫어진 적은 없나? 음악을 할 때야 집중해서 하지만, 기본적으로 뭔가를 치열하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음악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 적지 않다. ‘나에겐 오직 음악이 최고’, 이런 건 아니다.

음악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라, 예를 들면 어떤 게 있나?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집 안도 돌봐야 한다. 우리는 개들도 돌봐야 하고.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하다가 이제 음악 붙들고 있어도 되는 시간이 오면 너무 좋은 거지. 작업이 더 즐거워졌다. 제주도에 살다가 가끔 서울에 오면 뭔가 신나고 재밌는데, 딱 그런 느낌이다. 만약 아이가 생기면 이런 현상이 더 강해지지 않을까? 생활 속에서 그 작고 좁은 틈을 더 잘 활용하려 하겠지.

<놀면 뭐하니?>에서 환불원정대 활동을 앞두고 이효리가 ‘임신하면 활동 중단하겠다’고 가벼운 드립처럼 한마디 던졌는데, 여기저기서 엽산 보내주는 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우리는 전에도 아이를 갖지 말자는 주의는 아니었다. 억지로 할 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가려고 한다.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배우자를 만나 좋은 점은 뭔가? 효리 같은 사람을 만나 가장 좋은 건 정말이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대화가 잘 통한다. 음악적으로는 성향이 다른 부분도 있지만, ‘쿵짝’이 잘 맞고 끝없이 대화할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난 건 행운이다.

미혼 시절 스스로 결혼이라는 제도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아니, 나는 결혼 못할 줄 알았다. 연애의 끝이 꼭 결혼이라는 생각도 물론 안 했다. 결혼 생활의 장단점은 당연히 있다. 내 경우에는 좋은 영향이 더 크다.

‘다시 여기 바닷가’나 재작년에 발표한 ‘다시’라는 곡을 당신이 쓰고 이효리가 작사한 것처럼, 이효리가 단지 배우자가 아닌 음악적 동지가 될 때도 있다. 그럴 때 혹시 책임감 비슷한 것을 느낀 적은 없나? 가까운 사이기 때문에 조언해주고 싶은 순간이 있다거나. 내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고 싶지는 않다. 같이 즐기고 싶다. 그게 중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효리에게 들려주고, 효리도 자기가 발견한 좋은 음악을 나에게 들려주고, 그렇게 즐기는 관계가 이상적이기도 하다. 음악 생활을 한지 오래됐다거나 얼마 안 됐다는 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오래 했기 때문에 갇혀 있는 경우도 많다. 음악에 선후배 같은 것도 없다고 본다. 사실은 선생과 학생이라는 구분도 필요 없을지 모른다. 음악은 가르침 받아 알기보다 스스로 알아가는 것에 가까우니까. 그러니 필요하다면 조언이 아니라, 의견을 들려줄 수는 있겠지.

3년 전 가수 활동으로 컴백한 이효리를 인터뷰했을 때, 당시 <효리네 민박>의 영향으로 당신이 생각보다 더 예민해진 것 같아서 걱정된다는 말을 하더라. 그전까지 당신은 가장 가까운 이가 유명한 존재여서 겪는 일을 지켜봤을 텐데,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그 유명세에 함께 관여됐다. 그 시기를 어떻게 통과했나? 유명세를 느끼기엔 우리가 너무 숨어 지냈다. 하지만 효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집에 사람들이 계속 찾아와서 스트레스가 심했다. 유명세보다는 방송의 힘을 비로소 느꼈다. 나는 그런 면을 제대로 모르고 미리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박을 그냥 우리 집에서 하자고 했다. 만약 서울에 있는 집이었다면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제주도가 관광지라는 점을 간과했다. 그 스트레스를 벗어나는 방법은 이사밖에 없었다. 유명세로 인한 스트레스는 아니었고, 둘 다 워낙 집에 머무는 편이라 내 생활에 크게 지장받은 것도 없었다.

음악 말고 살면서 꽂혔던 것들엔 뭐가 있나? 음악만큼 오래 꽂힌 건 없지만, 나는 항상 뭔가에 조금씩 꽂혀 있다(웃음). 요 즘엔 커피 내려 마시는 데 꽂혔다. 우리가 사는 환경을 볼 때 맛있는 커피,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으면 차 타고 몇십 분은 달려야 한다. 그렇다면 그냥 집에서 내가 만들어 먹겠다는 거지. 어차피 밖에서 일하지 않을 때는 거의 집에만 있으니까.

거리 두기가 디폴트가 된 시절인데, 어쩌다 보니 요즘 시대 정신과도 부합하는 관심사다. 이상순의 인생은 건조하거나 심심할 새가 없어 보인다. 맞다. 늘 뭔가 할 거리가 있고, 찾아볼 것이 있다.

사람이 알려질수록 그 사람에 대한 세상의 오해도 그만큼 늘어난다. 이상순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나? 나라는 사람을 굳이 기억 안 해주셔도 된다. 나는 이왕 밥 먹을 거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 먹고, 효리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렇게 저렇게 잘 살아가고… 이 정도면 만족한다. 그냥 내 나름대로 재밌게 살다가 갈 때 되어 가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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