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것들 (이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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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남는다. 시간이 흘러도, 또 극장을 찾는 일이 예전 같지 않다 해도. 영화 속 이제훈에게서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무너지고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들의 표정이다. 이제 영화 <도굴>은 그의 능글맞은 모습을 남길 것이다.

검정 가죽 재킷과 팬츠는 생로랑 제품.

‘우유가 인간화한 줄.’ 이제훈이 등장하는 한 영상에 달린 댓글이다. 건국우유에 담았다 건져낸 듯이 맑고 윤이 나는 것, 그건 피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년성 어린 그 얼굴의 기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훈의 얼굴은 무너지고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의 표정을 담을 때 더욱 효과적이었다.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의 내밀한 상처가 드러날 때 (<파수꾼>), 첫사랑의 환상을 품게 했던 여자에게 꺼지라고 말할 때(<건축학개론>), 악몽 같은 현실을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전달하는 디스토피아적 풍경 속에서 사냥감이 되어 끝없이 쫓길 때(<사냥의 시간>). 이준익 감독은 그의 깨끗한 외모를 지저분하게 흐트러뜨린 뒤 무정부주의자의 도발적이고 순수한 신념을 심어주기도 했다(<박열>). 이제훈의 클로즈업된 얼굴 위로 ‘나는 조선의 개새끼로소이다’라는 문장이 박힌 영화 포스터를 보는 건 즐거운 발견이었다. 이제훈은 인터뷰를 하며 작품이 ‘남는다’는 표현을 유독 자주 썼다. 누구나 과거에서 보정하고 싶은 역사가 있기 마련이지만, 영화가 한번 세상에 공개되면 그건 영화인에겐 표식으로, 관객에겐 여운으로 남는다. 그는 작품을 지울 수 없는 표식으로 대하고 매번 순정을 다 바치는 식으로 임해온 것 같다. 11월 개봉할 <도굴> 이야기를 하는 그는 계속 미소를 지었다. 금동불상과 고분벽화 등의 고미술이 재현되고, 강남의 선릉까지 ‘삽질’의 배경이 되는 범죄 오락영화. <도굴>을 촬영하면서 처음으로 현장을 온전히 즐겼다는 그는 낯설더라도 새로운 경험을 한창 즐기는 중이다. 그를 위해 ‘우유가 인간화 한’ 이제훈은 잊었다. 어딘지 모를 은밀한 곳에 그를 불시착시킨 뒤, 굴처럼 으슥한 곳에서, 여전히 윤이 나는 그와 대화를 시작했다.

검정 시스루 니트는 릭 오웬스 제품.

오늘 현장에 나오기 전엔 뭘 했나?

이제훈 1년 반 정도 수염을 기른 상태로 지냈는데, 여기 오기 전에 잘랐다. 지금 내 얼굴이 낯설다.

‘이제훈과 수염’이 더 낯선 느낌이다. 물론 영화 <박열>에서는 영화 포스터부터 수염 있는 당신의 얼굴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박열>은 사극이라 수염을 붙이고 임했다. 이번 영화 <도굴>이 수염 기른 상태로 출연한 첫 작품이다. 분장팀과 캐릭터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다, 도굴꾼이니 거칠고 조금은 지저분한 것도 어울리겠다 싶어 수염을 택했다. 헤어스타일도 파마를 해서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나온다.

수염을 다듬지 않은 모습으로 출연한다는 점이 처음에는 조금 허들이 됐나? 그렇다. 그런데 한번 그 허들을 넘으니까 몰랐던 내 또 다른 이미지가 출현한 거다. 달라진 외양을 나름 즐겼다 (웃음). 작품이라는 건 그 상태로 세상에 쭉 남는 것이라 이상하거나 어색한 선택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변화 자체에는 마음이 열려 있고 과거와 비슷한 선택을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으로 수염은 그 캐릭터에 꼭 필요하지 않은 이상 웬만하면 택하지 않을 것 같고, 다음엔 뭘 해보고 싶을까? 탈색? 탈색하는 게 어울리는 캐릭터, 해보고 싶다. 그런데 탈색하면 많이 아플 수 있다고 들었다. <사냥의 시간>을 촬영할 때 안재홍 배우가 길이도 짧은 머리를 자주 탈색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봤다(웃음).

진회색 슈트와 안에 입은 셔츠, 머플러와 머플러처럼 두른 반다나, 브로치는 모두 디올맨 제품.

<도굴>은 땅 파서 장사하는 이들이 이끌어가는 범죄 오락영화다. 당신은 흙 맛만 봐도 보물이 있는지 찾아내는 타고난 천재 도굴꾼으로 나온다고?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강동구라는 인물에 대해 딱 떠오른 하나의 표현이 ‘능글맞음’이었다. 자신감 넘치고,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말재주와 여유가 있고. 이제껏 작품을 할 때 나는 주로 내 안에 있는 어떤 면을 끄집어내서 연기하는 편이었다. 이번 캐릭터는 내가 갖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야 해서 나에겐 발견이고 즐거운 도전이었다. 능글맞고 능청스러움, 장난기, 사기꾼의 면모… 이런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없는 거였다.

이제훈에게 그런 건 없구나. 당신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성격에 관해 자주 듣는 표현은 뭔가? 뭐가 있을까… ‘의외로 재밌다’?

확인할 길이 없어서 아쉽다. 과연…. 왜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가끔 ‘드립’ 치는 거 말이다. 물론 여전히 재미없는 사람이긴 하다.

인물 연기를 위해 사사로운 말투 하나라도 따오기 좋은 모티프나 레퍼런스가 필요했을 텐데. 주변에 왠지 미워하기 힘든 사기꾼 기질 있는 사람 없나? 글쎄, 없는 것 같다. 사기꾼은 달콤하게 속여서 그 꼬임에 넘어가게 만드는 사람인데.

상대가 속아도 속은 줄 모르게 만드는 게 전문 사기꾼 아닌가?(웃음) 참고한 작품이나 연기는 있나? 보통은 그런 게 있기 마련인데, 이번 작품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저절로 찾아진 면이 있다. 시나리오 안에 짜임새와 캐릭터 색깔이 분명하게 잡혀 있었다. 그러니까 풀어가기 위해 고민하기보단 캐릭터와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나는 ‘플로우’만 탔다. 재밌는 경험이었다.

계속 설레는 표정을 띠며 말하는 걸 보니 신선한 경험이었나 보다. 연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내가 이런 연기 할 거라는 생각을 딱히 안 해봤다. 촬영장 나가는 게 놀러 가는 것처럼 신난 경우도 처음 같다.

트렌치코트와 안에 입은 셔츠는 디올맨 제품.

상반기에 공개된 <사냥의 시간>은 상당히 힘든 경험이었다고 들었다.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촬영이었다고.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드나 ?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또 하라면 못하겠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일단 촬영 기간 자체가 길었고, 한 컷 한 컷을 공들여 만드느라 체력과 감정 모든 면에서 다 쏟아내야 했다. 어느 정도 계산하면서 감정 소모와 체력 안배를 할 수 있는 촬영이 아니었다. <도굴> 촬영장에 갈 때는 ‘와! 신난다! 가자!’였다면 <사냥의 시간> 현장 나갈 때는 ‘아이고 싫다….’

이렇게 말로 듣고 활자로 적어두면 ‘이제훈, <사냥의 시간>은 악몽,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같은 기사 헤드라인 나가기 딱 좋은데. 당신과 윤성현 감독은 궁합이 참 좋은 거로 안다. 윤성현 감독에게 동지 이상의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 워낙 영화적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이라 <파수꾼> 같은 작 품은 물론 <사냥의 시간>처럼 텐션을 끌어올리는 작품도 가능했다. 앞으로도 더 기대되는 감독이다.

<사냥의 시간>은 코로나19가 막 번지던 시점에 개봉일이 잡혀 있다가 결국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이 영화에 말들이 많았지만, 내 방에서 TV로 보는데도 그렇게 긴장감에 휩싸이고 몰입할 수 있다는 건 감독의 연출력이 대단했다는 의미다. 그 작품 이후 무엇을 해도 체력적으로 훨씬 수월한 느낌이다. 힘들었던 걸 몸이 기억하니까 좀 더 담담해지고 그릇이 커진 기분도 든다. 내가 <고지전>이라는 전쟁 영화도 했잖아. 산에 올라가고 장비 들고 꽤 고통스러운 부분이 많았는데 그 전쟁 영화보다 더했으니(웃음). 앞으로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이제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지 않겠어?’ 싶고. 글쎄, 가장 추운 한겨울 어느 날 제주도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야 한다면 그게 더 힘들려나….

그 사이 여러 피드백을 접했을 텐데, 영화에 대한 좋지 않은 평도 살펴봤나? 그리 많이 찾아보진 않았다. 베를린영화제에서 공개되어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보긴 했지만, 한국 관객과 스크린으로 즐길 수 없었다는 점은 아무래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런데 10월 21일부터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서 우리 부산 간다. 관객과 함께 보고 대화도 나눌 기회가 있겠지. 그거 생각하면 요즘 기분이 아주 좋다. 기대 중이다.

검정 벨벳 소재 슈트, 흰 블라우스는 셀린느 제품.

당신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두 가지가 있었다. <건축학개론>은 2012년 개봉했는데, 그 전해에 개봉한 <파수꾼>과 <고지전>으로 청룡영화상이며 대종상 영화제며 여러 곳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두 작품의 이제훈이 후보에 나란히 오르기도 하고. 솔직히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뭐 그저 믿기지가 않았지. 그때까지 영화제는 집에서 TV로 보기만 하던 나인데. 사실 당시 꽤 바쁜 시기였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작품을 남겨놓으려고 여러 일을 병행하면서 열심히 움직였다. 좀 정신이 없는 나날이어서, 영화제 참석을 하나의 설레는 이벤트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던 듯하다. ‘후보라네, 어, 가자’ 이런 식에 가까웠달까.

정말인가? ‘이제 내가 한국 영화계 다 씹어 먹겠다’ 같은 마음이었을 줄 알았는데. 하하, 전혀 아니다. 신인상은 내가 특별히 잘해서 받았다기보다는 앞으로 지켜볼 테니 실망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나는 비교적 늦게 데뷔한 데다 군대도 가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열심히 잘할 수 있을까, 사명감 비슷한 게 들 정도였다.

꼭 묻고 싶었던 나머지 하나는 이거다. 필모그래피에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물이 별로 없는 이유는 뭘까? 그런 장르를 보는 건 좋아하는데, 막상 내가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사랑 이야기가 필모그래피에 자주 쌓이는 걸 바라지 않았다. 우선 나에겐 <건축학개론>이 있다. 20대 초에 첫사랑을 경험한 인물 승민이로 남겨진 거다. 이후 나에게 그 작품과 비슷한 역할을 원하는 수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원치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웬만큼 흘렀으니 나도 내 나이에 맞는 사랑 이야기가 점점 끌리고 이제는 너무 하고 싶다. 그런 작품을 찾고 있기도 하다.

<건축학개론>의 승민이와 그 작품의 여운을 지키고 싶었나? 사랑이 너무 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로 다른 작품이어도 모두 나라는 한 사람이 연기로 표현하는 일이다. 작품 수가 많으면 내가 이 사랑도 하고 저 사랑도 하는 것만 같다.

2017년에 신민아와 <내일 그대와>라는 로맨스 드라마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시청률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요즘 유튜브에서 재조명되는 분위기다. 좋은 기회가 있으면 출연하고 싶은데 그런 장르의 시나리오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나도 곧 40대다. 40대에는 또 그 나이에 맞는 사랑의 모습이 있을 것 같다. 20대에는 승민이로 남고 싶었다면, 30대가 끝나기 전에 이 시기에 어울리면서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교감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

회색 재킷, 스카프, 검정 가죽 팬츠, 구두, 브로치는 모두 셀린느 제품.

스스로 커리어를 보면 비교적 잘 영위해왔다는 생각이 드나? 그런 걸 내 입으로 얘기하는 건 같이 작업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 아쉬운 점은 내 마음속에만 담아둬야 한다. 다만 지나간 작품을 보면서 ‘내가 저 때 왜 저렇게 했을까’ 혹은 ‘왜 저 작품을 선택했을까’ 하면서 의아해하는 상황을 갖고 싶지 않다. 작품이란 내가 시나리오를 보며 떠올리는 대로 온전히 탄생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선택을 하고 싶은 건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기도 하다.

선택은 주로 당신의 의지대로 하나, 주변에 많이 물어보는 편인가? 내가 잘 모르는 것도 많을 테니 주변에 많이 물어보고 의견을 종합하는 편이다. 물론 선택은 내가 한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드는 직관적 느낌, 그게 나에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거 하나만으로 선택하는 건 위험하니까 다른 이들의 생각을 공유하는 거다. 내 시각과 해석이 맞는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좋은 배우가 되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나? 글쎄… 그렇다면 나는 한참 모자란 배우 같은데? 내가 좋은 사람인가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안 좋을 건 또 뭔가? 나는 연기를 하는 주체가 되는 사람이지만 그런 존재를 위해서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고, 또 누군가는 화장도 해주고, 디렉션을 고민한다. 그 모든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내가 연기할 수 있다면, 그들과의 관계가 즐겁고 화목해야 ‘좋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현장이란 나를 예민하게 만들 때도 있고, 항상 나이스하지만은 않게 만든다. 나는 일을 그리 일상적인 행위로 받아들이는 편이 아니다. 그저 분위기 따라 편하게, 설렁설렁하는 스타일은 썩 달갑지가 않다. 시간이 지나 작품을 다시 보면서 ‘내가 저때 너무 순진하게 임했다’는 후회를 하기는 싫다.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길 원한다면 너무 진중한 것 보다 쉽고 가볍게 나를 던지는 일도 필요할 텐데, 딜레마가 있진 않나? 그래서 다양화가 필요한 것 같다. 어느 하나에 너무 목을 매거나 ‘이거 아니면 안 돼’ 하는 거 말고, 시도할 수 있는 영역을 한정 짓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연기에 있어서는 주연, 조연, 카메오 출연 같은 구분이 크게 문제 되진 않는다.

다양화의 하나로 제작사도 차린 건가? 자연스럽게 기획이나 제작에도 관심이 생겼다. 지금 준비 중인 작품도 있고. 아직은 설명하기 이르지만, 언젠가는 공개되겠지. 이젠 내가 이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이 캐릭터에 어울릴지 떠올리는 순간도 되게 설레고 신난다. 영화를 볼 때 생각지도 못한 편집이나 미술 등등의 황홀함에 빠지면서 ‘와, 나도 저기에 속하고 싶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극장을 나서면서 또 꿈을 꾸는 거지. 요즘은 또 다른 꿈을 꾸는 셈이다.

당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건 영화에 대한 순도 높은 사랑인가 보다. 그렇다. 일이 되면 제대로 즐기기 힘든 경우도 있다지만 내가 좋아하는 게 일과 연결되는 점 자체도 즐길 수 있는 요소다. 좋은 작품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이 내 큰 원동력이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 같다. 그 마음이 나를 긴장하게 한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컨트리뷰팅 에디터
최진우
포토그래퍼
김재훈
헤어
박민경(에이바이봄)
메이크업
서미연(에이바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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