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국 영화의 키워드,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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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와 OTT는 왜 SF로 향했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묘사하는 이 장르는 한국 영화의 신선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TYIMAGES KOREA

2020년은 한국 SF의 분기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9월 23일 개봉을 확정한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는 2092년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승리호’의 선원들이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하며 펼쳐지는 우주 액션 활극이다. 겨울 개봉을 준비 중인 박보검과 공유 주연의 <서복>은 영생의 비밀을 지닌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다. 현재 촬영 중인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는 AI 기술로 세상을 떠난 가족, 연인과 영상 통화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배수지, 박보검, 최우식, 정유미, 탕웨이, 공유가 캐스팅됐다.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베일에 싸인 채 촬영 중인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주연 류준열, 김태리, 김우빈) 역시 SF다. OTT 플랫폼에서는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도 물살을 탔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의 8인 감독이 참여한 웨이브(wavve) 오리지널 시리즈 <SF8>은 7월 웨이브에서 감독판을 선공개한 후 8월 중순부터 MBC에서 방영될 예정이며, 정우성이 제작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고요의 바다>는 세계적인 사막화로 물과 식량이 부족한 미래, 달에 버려진 연구 기지로 향하는 대원들의 이야기다. 여기에 김용화 감독의 <더 문> 등 현재 개발 중인 프로젝트까지 더하면, SF는 지금 충무로의 미래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됐다.

창작자들은 SF를 선택한 이유가 ‘새로움’에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SF8>에 참여한 오기환 감독은 “영화 역사 125년 동안 이미 나올 건 다 나왔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은 미래밖에 없다.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SF에 관심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장철수 감독 역시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닌 현실적인 공통분모가 있으면서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신대륙 같은 느낌”이라고 SF의 매력을 설명했다. 여기에 기술의 발전과 이제 SF를 받아들일 관객층이 충분히 형성됐다는 시그널은 투자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려 속에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쌍천만 기록을 세운 <신과 함께> 시리즈가 한국 VFX 기술의 가능성을 보여줬고, VFX 전문 기업 덱스터스튜디오가 참여한 중국 SF 영화 <유랑지구>는 중국 역대 흥행작 2위에 올랐다. 출판계에서는 지난해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을 비롯한 SF 장르 소설 열풍이 있었다. 대중은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 같은 작품을 익숙하게 감상한다. 할리우드 영화로 눈이 높아진 관객을 만족시키려면 완성도 높은 CG가 뒷받침 되어야 하며 CG는 돈을 많이 들인 만큼 좋아진다.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매체를 넘나들며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을 뜻하는 트랜스미디어와 글로벌 마켓의 성장은 이를 실현할 새로운 자본을 끌어왔다. <승리호>는 처음부터 영화, 게임, 웹툰, 드라마 제작 등을 논의하며 카카오페이지와 NC소프트의 투자를 받았다. 글로벌 OTT는 설사 국내에선 ‘마이너’하다고 평가받는 콘텐츠도 전 세계 잠재적 소비자에게 가 닿을 기회를 제공하며 과감하게 투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새 흐름을 형성한 SF 장르에서 신진 감독과 상대적으로 젊은 배우의 활약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장르의 새로운 시도가 감독과 배우의 패키징에서도 신선한 도전을 끌어내는 것은 자연스럽다. <SF8>은 한국영화감독조합 내 젊은 감독의 참여를 적극 권장했다. 김의석, 안국진, 한가람 감독은 장편 독립영화 데뷔작을 통해 최근 몇 년 새 주목받고 있는 신진들이다. 김보라, 최성은, 신은수 등 지금 라이징 중인 젊은 배우를 기용하거나 이연희 같은 기성 배우의 이미지를 비튼 점도 주목할 만하다. <승리호>는 봉준호, 박찬욱, 류승완, 김지운 감독 등의 뒤를 이을 차세대 기대주로 손꼽히던 조성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주연을 맡은 송중기와 김태리는 물론 톱스타지만, 대체로 충무로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40~50대 남자배우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젊은 패키징이다. <승리호>를 투자 및 배급한 유정훈 메리크리스마스 대표는 “송중기, 김태리는 신선한 얼굴이다. 대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배우들이 갖고 있는 앞으로의 포텐셜을 봤다”고 연초에 전했다. <서복>에서 복제인간 서복으로 분해 영화를 이끌 박보검은 1993년생이며, <원더랜드>의 배수지, 박보검, 최우식은 모두 90년대생 배우다. 현재 <외계인>을 촬영 중인 류준열, 김태리, 김우빈 등의 캐스팅도 주목할 만하다.

극장 수익만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워진 현실에서 투자자들은 더더욱 보수적으로 시나리오와 배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미 흥행을 검증받은 중년 남자배우를 중심에 둔 기획이 되풀이되는 이유다.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수년째 이어지며 심지어 피로를 호소하는 관객도 많지만, 눈에 띄는 변화를 찾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SF 장르와 젊은 재능이 만나 새로운 시도를 꾀한다는 것은 산업의 다양성과 건강을 위해서도 반가운 일이다. SF가 다소 어렵고 생소한 장르라는 벽을 갖고 있는 관객도 새로운 스토리, 젊은 배우가 활약하는 토대로서 SF를 바라본다면 생각지 못 한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SF 장르의 성패는 어디에 달려 있는가. 물론 앞서 언급한 기술력도 중요하다. <SF8>의 경우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원천 스토리들로부터 시작된 프로젝트지만, 웨이브 공개 버전만 놓고 보면 CG를 포함한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할리우드만큼 자본을 투입할 수 없다면 무엇에 힘을 주고 뺄 것인지, 선택과 집중의 미덕이 필요할 것이다. <승리호>는 여러 업체에 VFX 작업을 나누어 맡겨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SF 장르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상상력에 있다. 기술은 시간과 경험이 축적될수록 자연스럽게 발전하지만 좋은 스토리는 창작자의 기본적인 마인드와 세계관 등에서 온다. SF의 매력은 언제나 과학을 토대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그려 내러티브를 담는 기이하고 새로운 그릇을 창조하는 데 있었다. 앞으로 쏟아져 나올 SF 영화의 면면이 단지 할리우드 영화를 복제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새로움을 무기로 하는 장르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클리셰의 반복이 된다면, 장르 본연의 진짜 매력을 놓치는 셈이 된다. 이 숙제를 해낸다면 SF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2020년은 한국 영화계의 진정한 분기점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임수연( 기자)
사진
GETTYIMAGES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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