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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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의 흔적을 통해 기억을 곱씹는 것으로 소중한 여행이 다시 시작된다. 출발지는 9명의 여행자가 꺼낸 23가지의 물건들이다.

구리카와상점 부채 돌이키면 도쿄라는 도시에선 응접실의 꽃병처럼 지내는 시간이 숱했다. 단정한 부채. 도쿄에 발걸음 할 때면 타협 없이 단단하게 만든 부채를 사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던 건, 도쿄가 내게 강요하는 어떤 자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리카와상점의 부채는 족히 백 개의 부채를 지나쳐 처음으로 확신에 가득 차 구매한 부채다. 오모테산도였는지, 아오야마였는지, 기억은 도통 나지 않는다. 어쨌든 두 거리와 비슷하게 적당히 세련되고 적당히 되바라진 곳에 위치한 상점에서 손에 넣었다.

일본 민예관 부채 일본 민예관으로 가는 길은 늘 험난했다. 기껏 발걸음 하면 휴관일이라 퇴짜를 맞거나, 무더운 날 지하철역에서 내려 민예관으로 향하다 홧김에 택시를 잡아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단단하고도 연한 돌바닥의 촉감, 데칼코마니마냥 양옆으로 펼쳐진 연식 지긋한 나무 계단을 마주하면 금세 머릿속에 맑은 물이 고이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설립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집품을 숨을 고르며 구경한 뒤, 제일 맛있는 한 점을 남겨놓고 밥상을 치르는 기분으로 민예관 내부의 소품 매장으로 향하곤 했다. 사진의 청색 부채는 2년 전 민예관에서 골랐다. 나무 손잡이가 유난히 시원스러워 한여름이면 외출할 때 곧잘 들고 나선다. – 전여울(<더블유> 피처 에디터)

당나귀 인형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에 자리한 론다는 까마득한 깊이의 협곡과 위용 있는 누에보 다리로 유명한 소도시다. <론리 플래닛>이 ‘안달루시아 지역 여행은 너무 뜨거운 7월만 피하자’고 권유한 사실을 뒤로한 채, 어느 해 7월, 걸어서 세상 끝까지 갈 기세로 론다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상점 쇼윈도 너머로 본 작은 인형이다. 양손에 봉투를 들고서 시지프스처럼 걷던 내 눈에 비슷한 처지의 이 작은 것이 눈에 띈 기념으로 구입했다. 스페인 일부 지역에서는 경사면에서 수확한 포도를 실어 나르기 위해 당나귀를 이용했다고 한다.

아줄레주 타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6박을 지내는 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바로 타일이다. 보통은 바닥이나 벽 정도를 타일로 장식하지만, 포르투갈의 핸드메이드 세라믹 타일 양식을 일컫는 ‘아줄레주’ 스타일은 옛 궁전부터 주소지를 표기한 시내의 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정사각 타일을 막상 한국에서 찾으려고 하면 어딘가 조악한 데가 있을 것이다. 대량으로 갖추지 않는 한 유의미한 인테리어로 활용하진 못하지만, 다분히 포르투갈적인 오브제다. – 권은경(<더블유> 피처 디렉터)

RX-FS27 파나소닉 카세트 플레이어 코로나19 바로 직전 떠난 도쿄 여행. 레코드 숍에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1집 오리지널 카세트 테이프를 먼저 구매했는데, 당장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대형 전자상가인 요도바시카메라에 달려가 충동적으로 샀다.

키야 손톱깎이 도쿄 미드타운에 있는 상점에서 손에 넣었다. 키야는 칼이나 커틀러리로 유명한데, 손톱깎이의 완성도도 제법 훌륭하다. 손톱깎이의 구조, 특히 손톱을 무는 칼선 부분의 곡선이 유려하다. 강철로 만들어 튼튼하기까지 하다.

책 <The making of “The Pale Fox”> 프랑스 예술가 카미유 앙로의 <The making of “The Pale Fox”>는 작년 도쿄 오페라 시티 아트 갤러리에서 진행된 그의 개인전 <The Pale Fox>를 기념하며 발행한 출판물이다. 표지에 쓰인 두꺼운 펠트가 인상적이기도 하고, 수제로 만든 느낌이 묻어나는 클립 제본과 미싱 띠지도 재미있어 고민 않고 구입했다.

미야가와 스포츠의 사코슈 메구로이 어느 시장 골목 한가운데에 자리한 등산용품 숍 미야가와 스포츠. 가방의 안쪽 천을 들여다보면 불꽃이나 꽃무늬, 복고양이 같은 패턴이 나와 숍 특유의 센스가 느껴진다. – 맛깔손(그래픽 디자이너)

어린이를 위한 드로잉북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어릴 적 나에게 수차례 혼란을 안겨주었다. 주인공에게 양을 그려달라 청한 어린 왕자가 여러 번의 거절 끝에 이 그림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만족하고, 잠결에 빠지려던 양을 위해 목소리를 낮추던 순간이 어린 시절 나에게는 수수께끼처럼 다가오곤 했다. 2009년 파리 마레 지구의 한 서점에서 팔던 이 ‘어린이를 위한 드로잉북’은 한동안 겹겹이 쌓인 짐더미 속에 자리하고 있다가, 그로부터 10년 뒤, 이사를 계기로 다시 찾아냈다. 아니, 발견해냈다. 이제 액자 안 상자 속에서 숨 쉬는 양은 한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지는 일상의 리듬과 삶의 속도를 잠시나마 늦춰주고 있다.

비트라 나무 인형 파리를 찾을 때마다 잊지 않고 들르는 퐁피두센터 아트 숍에서 2014년 만났다. 알렉산더 지라드의 나무 인형은 으레 여럿이 한데 모여 있어야 어우러지기 마련인데, 형형색색을 뽐내는 인형들 사이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멀뚱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현혹되었다.

비트라 미니어처 체어 2019년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 ‘루이 비통 메종 서울’의 오픈을 앞두고 주어진 휴식을 만끽하고자 떠난 여행길, 독일의 비트라 미술관에서 만난 미니어처 체어다. 청담동에서 학이 너울거리는 사이, 물고기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닮은 게리의 곡선이 집 한켠에서 춤추고 있다.

모빌 비트라 나무 한동안 퐁피두센터 앞 광장에 칼더의 조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비록 칼더의 작품은 아니지만 여백 위에 줄타기하는 흑백과 세 가지 색채의 향연에 반하기까지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퐁피두 아트 숍에서 구매했다. – 황다나(루이 비통 기업홍보문화예술부장)

바우하우스 빈티지 책 일본 여행 중 구매한 책이다. 여행을 가면 잘 알려진 곳을 가기보다는 골목 사이 사이에 숨은 공간을 찾곤 한다. 골목 깊숙이 위치한 2층짜리 중고 서점은 외관과 다르게 올라가는 계단부터 좁고 가팔랐는데, 그곳에는 지난 세월에 비해 잘 보존된 책들이 유독 많아 신이 나 책장을 헤 집으며 구경했다. 그중 바우하우스에 관심이 많았을 무렵 이 책을 골랐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책 무게 때문에 씨름하며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다.

빈티지 램프 파리에 촬영을 갔다가 들른 빈티지 가구 스토어에서 구매한 빈티지 램프다. 우연히 찾은 스토어에서 컬렉션 가구를 구경하던 찰나 뭐라도 하나 사자는 심정으로 덜컥 지갑을 열어 구입했다. 평소 부피가 큰 제품은 들고 오는 데 어려움이 있어 포기하기 일쑤였지만 램프를 구매하던 당시는 컬러를 보고 꽤나 만족했던 기억이 있다. 벽에 쉽게 걸 수 없다 보니 여전히 사용하지 않고 애지중지 보관 중이다. – 지치구(탈로 서울 대표)

목기 2017년 교토의 작은 공방에서 구입한 목기는 몇년간 찾고 찾던 기계의 정확함과 사람의 감각, 자연물의 자유로움, 이 세 가지가 적절히 갖춰진 나의 애장품이다. 남들은 흔한 물건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에겐 공예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알려준 오브제다.

원석 어느 공간으로 이사를 가든 나의 테이블에는 항상 원석과 그를 담은 목기가 놓여 있다. 2013년 브루클린의 벼룩시장에서 만난 꼬마 셀러에게 각기 다른 7개의 원석을 구입했다. 원석과 목기 두 가지의 조합 그 자체가 주는 매력은 아직까지 그 어떤 것과도 교체가 되지 않는다. – 구병준(피피에스 대표)

어린이 중국 지도 퍼즐 상하이가 내 중국의 전부였을 때, 중국의 다른 지역이 궁금해서 지도를 많이 들여다 보았다. 그러던 중, 가장 좋아하는 상하이의 소품 가게 ‘마담 마오스 다우리’에서 각 지역의 어린이 일러스트가 그려진 이 퍼즐 지도를 발견했다. 퍼즐을 맞춰보며 생소한 지역을 상상하던 그때의 기억이 담겨 있는 아이템이다.

피영희 오래된 서적과 소품이 가득한 중국 상하이의 헌 책방 ‘메피스토’에서 건져온 그림이다. 중국의 전통 그림자 인형극인 피영희에 쓰이는 인형을 그린 그림인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부터 화려한 옷까지 모두 마음에 쏙 들었다. 3년 넘게 내 SNS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 중이다. – 김송은(작가)

우드 블록 치앙마이는 실크와 텍스타일, 목공예가 발달한 도시다. 우연히 목공예 마을에 구경 갔다가 발견한 이 블록들은 주로 원단에 문양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대학에서 텍스타일을 전공해 더욱 반가웠고, 집으로 돌아와 얼른 원단에 직접 찍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잔뜩 가져왔다.

배지 오래된 물건을 모으던 시절엔 런던, 바스, 에든버러에서 빈티지 마켓이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배지에 눈독을 들이며 장바구니를 채웠다.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나 글씨로 단체, 직위, 계급 등을 알아볼 수 있어 매력적인 배지. 컴퓨터 자수로 만든 것이 아니라 모두 손바느질로 완성한 배지라 더욱 특별하다. – 김재원(오르에르 대표)

마리아 동상 과테말라의 안티구아는 ‘앤티크 헌터’들의 천국이다. 마리아 동상의 눈썹이 망가졌다는 이유로 30분을 흥정해 구입한 후 슈트케이스에 들어가질 않아 자그마치 30시간 동안 손에 들고 다녀야 했던 물건이다. 애칭은 마돈나(Madonna).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나무 박스를 제작하면서 그녀의 속눈썹도 새로 달아주었다.

곰 마스크 패션의 도시 앤트워프에 위치한 오페라 플랑드르에서 코스튬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는 요사 맥스 (Josa Max)가 만들어준 가면. 지역에서 구입한 재료로 금세 만든 이 가면은 베를린에 8년 동안 거주하면서 파티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즐겨 착용했다.

불상 이마바리는 교툐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작은 마을이다. 그곳에서 티 마스터로 활약 중인 친구가 개최한 티 세레모니에 참석했다가, 일요일 장터에서 건진 보물 중 하나다. 이 부처상은 왠지 현대적이면서도 고대적인 엘레강스가 매혹적이어서 사게 됐다. – 윤리(건축가)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박종원, 장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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