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두나 더블유 9월호 커버 화보 풀 스토리 (Dual Doona)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배두나 더블유 9월호 커버 화보 풀 스토리 (Dual Doona)

2020-08-23T23:11:43+00:002020.08.24|FASHION, FEATURE, 피플, 화보|

셀린느의 여성과 남성이 배두나라는 하나의 몸에서 교차한다. 많은 이야기와 경험치를 안고 돌아와 눈앞에 선 배두나는 여전히 멋지다.

캐시미어 고트 코트와 카프스킨 멜로디 로퍼는 Celine 제품.

오늘 배두나라는 한 몸으로 셀린느의 남녀 의상을 번갈아가며 소화했다. 나른한 애티튜드는 비슷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남성 룩을 취했을 때의 당신이 더 마음에 든다.

배두나 남성 룩이 상당히 슬림한 사이즈였지만 나 역시 남성 쪽이 특히 좋았다. 하나하나 예뻐서 다 사고 싶은데 그건 무리겠지.

<비밀의 숲 2>가 사전 제작이라 첫 방송을 앞두고 이렇게 하루를 온전히 화보와 인터뷰에 할애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얼마 전에 본 드라마 티저 영상에서는 아주 긴 머리였는데, 그사이 헤어스타일을 바꿨다. <비밀의 숲> 촬영은 올 초에 시작해서 5개월 정도 하고 마쳤다. 머리는 새 작품 때문에 짧게 잘랐다. 곧 촬영에 들어 가는 건 SF물이다.

상반기에는 <킹덤 2>가 줄곧 회자됐고, 하반기에는 <비밀의 숲 2>로 연기하는 배두나를 금세 다시 만난다. 한동안 당신이 할리우드라는 먼 곳으로 떠나가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작년 한 해도 바쁘게 보내지 않았나? 작년에는 <킹덤 2> 촬영을 마친 다음 김윤석 선배와 함께하는 영화 <바이러스> 작업에 들어갔다. 그 촬영을 10월쯤 마 쳤지. 연말 두 달은 온전히 쉬기 위해 유럽에서 보냈다.

작가를 비롯해 배두나와 조승우라는 ‘오리지널’이 다시 모였다. 2017년 <비밀의 숲>이 방송됐을 때 화제 중 하나가 그러한 수작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점이었다. 이수연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날카로운 분이다. 황시목 같아. 조승우 씨가 연기하는 황시목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우회하지 않고 그냥 찌르는 스타일이잖나. 곧고 타협하지 않는 사람. 작가님도 그런 느낌이 있다.

전편이 워낙 좋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에 기대하는 시선이 크다. 우선 나는 그 드라마가 건조해서 좋았다. 이번에는 더 건조할 수도 있다(웃음).

블랙 다이아몬드 패턴의 자카드 벨벳 베스트, 비스코스 조젯 빅토리언 블라우스, 자카드 벨벳 빅토리언 스커트, 금빛 애니타 귀고리와 커프, 틴사이즈 트리옹프 캔버스와 카프스킨 소재의 트리옹프 백은 모두 Celine 제품.

흰색 러플 장식의 검정 세이블
드레스, 벨트, 트리옹프 버클 장식의 페이턴트 카프스킨 소재 멜로디 로퍼는 모두 Celine 제품.

당신이 연기하는 한여진이라는 경찰의 분위기는 전편과 비슷한가? 음, 촬영하면서 가끔 뭔가 부대낀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시즌제 작품의 경우 전편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다시 그 작품에 임할 때 적응기가 필요할 수 있다. 나는 <센스 8>이나 <킹덤>처럼 시즌제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왜 유독 부대낀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생각해보니, 한여진이 처한 상황 때문인 것 같았다. 시즌 1에 비하면 한여진이 통과하는 과정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 원래 한여진은 어떤 상황이 닥치면 그냥 행동으로 들이받으려는 인물이었는데, 이제는 좀 다르다.

그사이 세상과 부조리를 더 겪으면서 한여진도 어떻게 보면 성숙해진 걸까? 한여진은 황시목이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볼 줄 알고, 그래서 사람의 감정이나 도리를 생각할 줄 아는 인물이다. 시즌 1 때 처음엔 작품을 고사했다.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캐릭터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내 모든 대사에서 ‘느낌표’를 뺐다. “뭐라고요?” 같은 한마디를 할 때도 낮고,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지 않는 톤으로.

캐릭터가 밝기 때문에 자칫 ‘오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했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 따뜻하고, 극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발랄함으로 건조한 황시목과 대치되는 인물이라면, ‘프로페셔널한 부분을 얼마만큼 염두에 둘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한 따뜻함은 이런 거다. 인정이 넘치고 정서적인 부분과 결부되는 따뜻함이 아닌, 아주 유능하고 유연한 사람의 여유에서 풍기는 따뜻함.

기억을 더듬어보니, 정서적인 면에서의 따뜻함이 강조됐다면 뭔가 전형적인 캐릭터가 나왔을 듯하다. ‘피도 건조할 것 같은 황시목과 달리 인정 많고 발랄하며 따뜻한 여자 형사’ 뭐 이런 것. 시즌 1에서는 의상도 마음대로 입었다. 직업군이나 성별에 따라 ‘형사면 형사답게’, ‘여자면 여자답게’ 식으로 존재하는 기준과 고정관념이 싫다. 나는 셜록 홈즈나 콜롬보 형사처럼 입고 싶다고 의견을 냈다. 트렌치코트나 재킷도 입고, 흔히 ‘강력계’라고 할 때 떠올리지 않는 차림으로 일하기도 하고. 이 여자는 경찰대를 나왔으니 이미 엘리트다. 여고생 같은 단발머리 스타일이든 옷차림이든 조금 괴짜 같은 면이 있어도 똑 부러지고, 잘 뛰어다니고, 범인도 잘 잡는 유능한 형사기 때문에 아무도 왈가왈부하지 못하는 거다.

처음 그 인물을 받아들고 전사 작업을 거칠 때는 어떤 스토리를 상상했나? 애초에는 한여진의 나름 사연 있는 전사가 대본에 주어져 있었다. 그런데 제작진과 여러 논의 끝에 원래 설정된 전사를 없애자고 결론이 났다. 연기하는 내 입장에선 그게 큰 도움이 됐다. 구체적 사연을 지녔다는 설정이 있으면 특정 상황에서 보이는 반응이나 뱉는 말이 사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는데, 얽매인 전제가 사라지니까 투명한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그때부터는 상상의 여지도 생긴다. 이 여자는 어렸을 때 만화나 <셜록 홈즈> 같은 탐정 소설을 보면서 꿈을 키우지 않았을까 싶었다. 개인적인 사정이나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 말이다.

<비밀의 숲>은 직업에 관한 이야기 같다고도 느꼈다. 그런 느낌을 받은 이유가 바로 당신이 얘기한 부분 때문인 것 같다. 배두나와 조승우 모두 순수한 직업 정신이 밑바탕에 있고, 딴 마음 없이 직진했다. 그래서 일부 시청자가 고대하던 러브 라인 따위도 일어나지 않았고(웃음). 사실 한여진은 아주 부잣집 딸일지도 모르지. 형사 생활을 하느라 바쁘지만 알고 보니 옷은 다 명품이고, 옥탑방에 살아보는 게 로망인 그런 여자(웃음). 이렇게 열려 있는 면 때문에 어떻게 보면 판타지적인 인물이다. ‘이런 사람은 현실에 없을 것 같아, 하지만 있다면 이런 사람 덕분에 세상은 살 만할 거야’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검정 가죽 소재의 톱 스티치 재킷과 페이즐리 프린트의 실크 셔츠, 검정 팬츠, 보틀 오프너 형태의 스톤 장식 펜던트 목걸이, 트리옹프 캔버스 백, 스웨이드 카프스킨 부츠는 모두 Celine Homme by Hedi Slimane 제품.

체크무늬 클래식 재킷, 네이비 보트넥 스웨터, 실크 트윌 프린트 스카프, 검정 가죽 팬츠, 카프스킨의 지퍼 장식 크롭트 부츠는 모두 Celine Homme by Hedi Slimane 제품.

검정 벨벳 소재의 클래식 턱시도 더블 재킷과 보타이 장식 셔츠, 검정 벨벳 턱시도 팬츠는 모두 Celine Homme by Hedi Slimane 제품.

<킹덤 2> 프로모션 기간에는 연기력에 대한 논란을 언급한 적이 있다. ‘안 좋은 반응도 있을 줄 알았지만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하다. 잘하는 것만 할 수도 있는데 못하는 것에도 과감하게 도전한 거다’ 식의 말. 솔직한 마음인가? 여러 언론사가 모인 라운드 인터뷰 자리에서 내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 감독이 현장에서 OK한 연기는 내 품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킹덤> 시즌 1의 김성훈 감독은 OK를 쉽게 내는 사람이 아니다. 몇 년 전 영화 <터널>을 작업할 때, 라디오 부스에서 나와 걸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냥 복도를 걸어가면 되는 그 장면을 두고 테이크를 15번 간 분이다(웃음). 그때 찍어둔 재미난 사진이 내 폰에 있는데… 나는 지치고 서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있고, 그 옆에 김성훈 감독이 말없이 서 있는 순간이다.

이 사진을 누가 보면 감독님한테 혼난 줄 알겠는데? 무슨 상황인가? 앞뒤 이야기가 쭉 있다. 이 사진을 찍기 전, 내가 라디오 부스에서 대사를 하는 신이 있었는데 감정 자제가 안 돼서 너무 많이 울었다. 또 울기가 싫어서 그다음 촬영 들어가기 전에 미리 울었거든.

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책에서 <공기 인형>을 찍을 때 놀란 일화를 소개한 것 봤다. 당신이 대기실에서 울고 있길래 걱정했는데, 촬영 중에는 인형이라 울면 안 되니까 미리 울어서 감정을 만들어둔다는 스태프의 말을 듣고 이 배우는 정말 놀랍구나 생각했다고. 그때는 연기하다 감정에 젖어들면 눈물이 나니까 감정을 비우고 들어가려 한 거고, <터널> 때는 미리 울어서 어떤 얼굴을 만들어두고자 했다. 라디오 부스에서 남편에 대한 말을 하기 전까지 이미 집에서 밤새 울었을 것 같은 거다. 퉁퉁 부은 얼굴, 눈물조차 다 빠져나간 표정으로 나타나야 현실적일 거라고 봤다. 그 얼굴로 담담하게 대사를 해야 좋은데 아니나 다를까 또 눈물이 줄줄 났다. 문제의 복도를 걷는 신은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서 다 진을 빼고 난 후에 찍었다.

그런데 걸음걸이에 문제가 있다던가? 이거 어떤 디테일의 문제가 숨어 있었을지 상당히 기대되는데. 예상치 못하게, 감독님이 좀 울컥하는 모습이 있으면 좋겠다고 주문하는 거다. 그런데 나는 이미 울 것 다 울었잖아? (웃음) 그 때문에 감독님이 원하는 지점까지 도달을 못해서 걸어가는 그 신을 찍는 데 4시간 정도 걸렸다. 처방책으로, 현장에 없는 우리 남편인 하정우의 목소리를 들어야 감정이 잡힐 것 같았다. 그래서 목소리를 들으려고 전화했는데 이 오빠는 또 전화를 안 받아….

하정우가 잘못했네. 한참 기를 쓰다 3시간인가 지나서야 오빠에게 전화가 왔고, 그 통화를 한 이후 감정이 잡혀서 드디어 OK를 받았다. 그러니까 김성훈 감독이 그런 사람이다. 배우의 얼굴이 아침 부터 퉁퉁 부어 있지, 안쓰럽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지, 스태프들도 고생하지, 그런 상황에서도 대충 넘어가는 감독이 아니다, 그는. 배우에게서 뭐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준다. 그날 김성훈 감독에게 반했다. 이렇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단 한 신만 찍자고 해도 달려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킹덤>의 서비로 나를 캐스팅하며 내가 머리를 쪽지게 만든 사람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극의 말투와 다른 내 말투를 마음에 들어 했다. 나는 감독에게 고용됐고, 연기를 납품하는 입장이다. 고용주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됐지.

‘연기를 납품한다’는 표현이 재밌다. 그건 감독들의 배두나 사용법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이라는 소리 같다. 아주 그렇다. 물론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이 대중의 존재를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와 내 연기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사람들의 취향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연기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싶은 연기를 할 때도 많으니까. 내가 막 열연하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어깨의 큼직한 보 장식이 돋보이는 실크 드레스와 검정 카프스킨 벨트, 미디엄 사이즈의 검정 카프스킨 트리옹프 백, 트리옹프 버클 장식의 페이턴트 카프스킨 멜로디 로퍼는 모두 Celine 제품.

검정 벨벳 숄칼라 볼레로 재킷과 페이즐리 포크 드레스, 애니타 귀고리는 모두 Celine 제품.

카메라 앞에서는 감정을 크게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실상은 눈물을 주체하기 힘든 사람인가? 어릴 때부터 눈물이 많았다. 조승우 씨가 나보고 정말 신기 하다고 한 점이 있다. 나는 기분이 안 좋은 연기를 하는 신을 앞두고 있으면, 이미 기분이 안 좋은 상태가 되어 있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된다. 가끔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싶을 때 보면 그런 감정이 필요한 신을 앞두고 있을 때다. 나 너무 이상한가?

그런 건 ‘이상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메소드라고 하지 않나? 내 스타일이 메소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촬영장에서 발랄하고 까부는 건 또 잘한다. 울면 안 되는데, 관객과 시청자에게 감정을 강요하고 싶진 않은데 내 눈물이 안 멈출 때 는 있지.

당신이 연기를 납품하는 자라면 ‘내 느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내 것’을 하는 게 아니라 고용주의 의중을 살피는 게 우선순위겠다. 내가 배우에 대해 가진 가장 큰 생각은 ‘배우는 아티스트가 아니고 인스트루먼트’라는 점이다. 아티스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배우에겐 대본이 있다. 주어진 걸 표현하는 사람이다. 누군가 하고 싶은 말이 내 몸으로 체화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 주제로 라나 워쇼스키와 자주 부딪쳤다. 토론을 했다는 건데, 라나는 배우란 아티스트라고 했지.

어쩌면 개념을 설명하는 말의 차이가 있을 뿐, 두 사람이 서로 너무 다른 이야길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말은 말일 뿐 이니까. 내가 어떤 부분에서는 엄격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다른 배우들은 어떻게 하나 좀 살펴보고 배우려고 하는데,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경우도 많다. 배우가 감독이나 작가보다 자기 의견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감정이 와닿지 않아서일 거다. 비교적 내 멋대로 한 적이 한 번은 있다. 영화 <코리아>가 그랬다. 다행히 연기에 대한 반응도 좋았고, 내가 봐도 마음에 든다. 딜레마가 있는 셈이다. 감독에게 연기를 납품 하는 내가 감독의 뜻과 다른 의견을 주장해도 되나 하는.

그게 배두나식 직업 정신인가 보다. 모든 직업인에게는 각자의 직업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고. 내가 박찬욱, 봉준호, 정재은 감독 같은 분들을 배우 생활 초기에 만났다. 워낙 작가주의 감독님들이라 자기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걸 형상화하는 이들이고, 그래서 정확한 디렉션이 있었다. 가끔은 이상한 주문을 하는 거 같은데 일단 요청하는 대로 하고 나중에 결과물을 보면 ‘아, 저런 그림이 나오는구나’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냥 투명한 존재로 있으면 그들이 나를 칠할 거라는 생각이 일찍부터 자리 잡 은 것 같기도 하다. 배우 생활을 20여 년 하니까 이제는 누군가 알아서 나를 칠해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든다(웃음).

누군가가 새롭게 발견해줬으면 하는 갈증이 있나? 갈증은 딱히 없다. 이제는 내가 나를 좀 재발견해야 하지 않을까?(웃음) 40년 넘게 살았고, 그중 절반은 지금 하는 일을 하며 보냈다. 나도 내가 지겨울 때가 있거든. 자신이 뭘 잘하고 못하는지 스스로 잘 아니까. 그러니 더 새롭게 계발하고 발견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패치워크가 돋보이는 램스킨 재킷과 검정 벨벳 팬츠는 Celine Homme by Hedi Slimane 제품.

패치워크가 돋보이는 램스킨 재킷과 검정 벨벳 팬츠는 Celine Homme by Hedi Slimane 제품.

일하면서 ‘천재’라고 느낀 대상이 있다면 누군가? 라나 워쇼스키. 훌륭함에 대한 여러 표현 중에서도 천재라고 하니까 딱 떠오르는 사람이 라나다. 라나는 촬영 현장에 서 갑자기 노트북을 펼치고 대사를 다시 쓰기도 한다.

천재 감독과 일할 때는 연기 과정이 어떤가? 라나는 아주 여러 테이크를 시도한다.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톰 행크스 정도의 배우에게도 그런다. 첫 테이크 때는 그냥 배우의 날것을 보고, 그다음 테이크를 시도할 때마다 계속 한두 개씩 새로운 지침을 준다. 나중에 한 15번째 테이크를 시도할 때가 되면 내 머릿속에 30가지 정도의 아이디어가 자리 잡는다. 그게 아주 좋은 훈련이 된다.

워쇼스키 감독의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개봉한 게 2013 년이다. 이후 영화 <주피터 어센딩>,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센스 8> 두 시즌을 찍으며 6년 정도 할리우드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자신이 뭘 한 건지 제대로 알 수 있나? 그냥 했다 나는. 흘러가는 대로 할 뿐이다. ‘미드’를 찍건 뭘 찍건 일할 때 힘든 면이 있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고, 배우는 그냥 배우다. 참, 그런데 누군가를 위로할 때 힘들다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는 게 과연 올바른 위로일까? 힘든데 어떻게 안 힘들어?

그래도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것이다. 그거야 그렇다. <센스 8>을 찍을 때는 몇 달 동안 여러 국가를 전전하며 살고, 아침저녁으로 액션 훈련을 했다. 그런 것들이 자양분이 돼서 강해진 면이 분명 있다.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좀 더 강해졌다는 뿌듯함 같은 거.

보다 큰 무대에서 쌓은 경험은 아무래도 경험치의 차원이 달라지는 일이겠지. 경험치가 많다고 다 좋을까?

이달에 인터뷰한 일본 아티스트가 ‘아는 게 많아지고 경험치가 쌓였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성이 없어지는 경우’에 대해 언급하더라. 해봤기 때문에 그 힘듦을 알아서 오히려 용감해지지 못할 때가 있긴 하다. 맞다. 꿈을 꿀 때가 가장 좋은 것 같다. 막연하게 꿈꾸는 상태일 때 오히려 더 파워풀하고 에너지가 넘칠 수 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이런저런 경험치가 많다. 처음 할리우드에 갈 때 매니저도 통역도 없이 혼자 배낭 메고 갔다. 거기서 스케줄도 내가 연출부와 직접 얘기하며 정리했다. 그러니 빠른 속도로 배웠지. 외로움도 있었지만, 그렇게 뭘 모를 때가 더 나은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스터드 장식의 검정 재킷과 실크 셔츠, 아이보리 술 장식 실크 스카프, 검정 벨벳 팬츠, 스웨이드 카프스킨 부츠는 모두 Celine Homme by Hedi Slimane 제품.

배우 된 걸 후회한 적은 없나? 없다. 배우는 정말 멋진 직업이다. 최고야. 대본이라는 활자만을 보면서 감정을 끌어올리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걸 카메라 앞에서 표현해내는 건 또 다른 차원이다. 그런 경험을 발전시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예민해지는 직업병도 생긴다. 감정을 극대화해놔야 카메라 앞에서 뭘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평상시에도 아주 사소한 일에 감동하고, 사소한 일에 슬퍼한다. 예민하게 극대화시킨 감정을 쓰고, 정화하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기 위해서 배우는 연기를 쉬지 않고 이어가야 좋은 것 같다.

배우라면 하지 못할 연기나 하지 말아야 할 연기는 없다고 생각하나? 하지 말아야 할 연기는 없는데, 하기 싫은 연기는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취향 문제다. N번방 사건 같은 소식을 접하면서 ‘왜 세상에는 여자들이 그런 취급을 받는 일이 만연할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 이유는 뭐지? 내가 속한 영화계에는 그런 경우가 없나? 생각해보니까, 있는 거다. 여배우를 아무런 이유와 맥락 없이 벗겨놓거나 학대하는 내용을 계속 접하는 사람은 그게 나쁜 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리 잡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하는데, 왜?’ 하겠지. 이런 식으로 차츰 나만의 기준이나 하고 싶지 않다는 작품은 생긴다.

당신의 약점은 뭔가? 약하다. 마음이 약하다. 사실은 그러한데 외양이나 분위기는 뭔가 세게 생겼다(웃음). 그 때문에 불리한 점도 있다. 그래서 나보다 강한 캐릭터, 어느 정도 내가 선망하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캐릭터를 택하는 걸 수도 있다. 일에 있어서는 뭐… 일할 때는 약점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프로페셔널하다(웃음). 그런데 요즘은 일보다 조카가 먼저인 것 같기도 하고.

검정 벨벳 재킷과 보타이 장식 블라우스, 타탄체크 버뮤다 팬츠, 멀티 카보숑 애니타 목걸이는 모두 Celine 제품.

오늘 촬영장에 조카 셋이 잠깐 다녀갔다. 그중 특히 둘째 조카가 배우 고모에게 관심이 많고 에너지가 있는 것 같더라. 고모가 ‘TV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라고 인지를 하던가? 한다. 둘째 조카가 어딘가에서 <킹덤> 소개글이 있는 걸 보고 ‘배두나다 배두나! 우리 고모!’ 했다더라. 아이들이란 정말 정말 훌륭한 존재다. 조카들과 이야기하다 그 놀라울 정도의 창의성과 순수함에 감탄할 때면, 인간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가는 게 아니라 완성형으로 태어나서 후퇴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연극배우를 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가장 큰 가르침은 뭔가? ‘배우는 열등감이 없어야 한다.’ 열등감을 갖는 순간 연기가 어려워진다고 나도 생각한다.

나는 배우들에게서 ‘열등감을 동력 삼는다’는 말을 더 자주 들었다. 카메라 앞에서 나를 내려놓을 수 있으려면, 열등감이 없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연기는 상처받을 준비를 하고 마음을 여는 일이다. 내가 너덜너덜해질 것까지 감내하고 시작하는 것. 너무 아픈 부분이 있으면 어떤 경우에도 카메라 앞에서 신나게 놀기가 힘들 거다.

이제 배두나의 꿈은 뭔가? 원래는 꿈이 있었지. 내 인생의 목표가 아이를 갖는 것이었다. 결혼 생각은 딱히 없어도 아이를 가질 수는 있잖아? 그런데 이제는 자포자기했다.(웃음). 별 꿈이 없다.

그럼 꿈은 없다 치고, 욕심이나 야망이라는 말도 배두나와 어울리진 않는 것 같은데? 어, 야망! 그거! 나한테 바로 그게 없다(웃음). 욕심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야망은 없지만 할리우드에 진출한 여자’와의 대화를 이만 마무리해야겠다. 야망이 없기 때문에 거기 가게 된 걸지도 모른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공기 인형>에 나를 불렀고, <공기 인형>을 본 워쇼스키가 또 나를 불렀다. 나의 초기작들이 나를 거기까지 보냈다고 생각한다. 일도 사람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특정 부분 이상으로까지 열정적으로 노력하진 않으려 한다. 그게 내가 이 일을 20여 년 하며 배우고 느낀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