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이학주의 살아 있는 순간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부부의 세계’ 이학주의 살아 있는 순간

2020-06-23T16:07:28+00:002020.06.23|FEATURE, 피플|

<부부의 세계>에서 서늘한 얼굴을 각인시키고 퇴장한 이학주가 대화 내내 가장 자주 쓴 말은 ‘재미’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긴장되고 난감한 경험도 그에겐 재미로 남는다. 그거야말로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주니까.

로고 장식 티셔츠는 벨루티, 겹쳐 입은 망사 셔츠는 Cmnm 스튜디오, 체인 목걸이는 오네 제품.

얼마 전 JTBC <아는 형님>에 출연한 모습 재밌게 봤다. 당신이 스튜디오에 등장하자 앉아 있던 전원이 비명을 지르면서 진지한 콩트를 하던데? 누군가는 ‘쓰레기!’ 라고 소리치고(웃음). 나 너무 방청객처럼 있지 않던가?(웃음) 워낙 출중한 MC분들이 분위기를 잘 살려주어서 크게 웃곤 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저 그분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경험이었다.

예능에 출연한 자기 모습을 보는 일이 상당히 낯설었을 듯하다. 내가 웃음 터진 장면 위주로 편집해주셨다. 그러지 않으면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많이 잡혔을 거다. 거기 있다 보면 아무래도 본래의 얼굴이 보일 때가 있더라. 그러니까 <아는 형님>의 김영철 선배가 아니라 그냥 김영철이라는 사람이 보일 때. 교탁 쪽에 앉아 방청객처럼 앞을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자연인 모드로 돌아온 그분과 계속 자연인 상태였던 내가 서로 눈이 딱 맞은 순간이 있다. 그럼 둘 다 뭔가 웃긴 거지.

이학주를 잘 아는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나? 까불거리면서 내 모습을 더 보여줄 수 있 었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아쉬웠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분들 앞에서 어떻게 까부나?(웃음) 어떤 이들은 ‘그래, 나서지 않길 잘했다’고 했다. 뭘 하려고 했으면 더 어색했을 테니 그 정도면 됐다고.

예능에서 활짝 웃는 표정을 봐서 괜히 마음이 편해졌다. 나쁜 놈의 얼굴은 좀 거두어지고 드디어 ‘휴먼’의 얼굴을 목격했달까?(웃음) 당신에 대한 이런 댓글을 봤다. ‘저 배우가 저런 미소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네?’ 일부러 웃으려고 하면 이상하고 어색한 표정이 나온다. ‘나 웃어야 하는데’라는 압박에 가까운 생각을 상당히 오랫동안 품고 살다가 어느 순간 버렸다. 안 되는 건 안 된다. 그냥 웃길 때 웃으면서 살아야지 했다.

친구들은 당신의 성격이 어떻다고 말하나? 장난을 잘 치는 편이라 하고. 낯을 좀 가리는 편이지만 서먹한 게 풀리면 얘기도 잘 나누고. 축구와 농구를 좋아하는데, 골을 넣으면 굉장한 희열을 느낀다. 아마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어서 그렇겠지(웃 음). 한 친구 말로는 공 쫓아다니는 강아지 같다고 한다. 내가 잘은 못하면서 진짜 열심히 뛰어다니거든.

강아지라니, JTBC <부부의 세계>에서 무서웠던 인상을 효과적으로 중화시킬 만한 귀여운 표현인데? 뭐, 한마디로 ‘개 같다’는 소리니까….

검정 셔츠는 자라 맨, 가죽 팬츠는 문선, 부츠는 후망 제품.

<부부의 세계> 첫 촬영 전날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하나? 다음 날 뭘 입고 가야 하나 고민했다. 집에 박인규다운 의상이 많다. 무채색의, 어떻게 보면 남루한 옷들. 그런 스타일은 입던 걸 입어야 또 더 자연스러우니까 내가 직접 준비해 감독님께 보여드리려고 했다. 그리고 운동을 좀 했다.

위협적인 역할이라 몸을 만들 필요가 있었나? 아니. 당분간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는 나날일 테니 삶이 쪼그라들 거라 생각했다. 운동을 하면 그냥 서있을 때도 좀 더 안정감 있는 자세가 나오겠지 싶어서. 아침에 일어나서도 운동하고 현장 나가고 그랬다.

2012년 칸영화제 단편영화 비경쟁부문에 진출한 <밥덩이>로 데뷔했고, 그 후 많은 단편 영화와 독립영화를 비롯해 스무 개가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부부의 세계> 감독이 <뺑반>에 나온 당신 모습을 보고 캐스팅할 생각을 했다고 들었다. 조정석의 수하 중 하나였던가? 사실 <뺑반>에서의 역할과 인규는 아주 다르다. <뺑반>에서는 말수 적은 경호원, 싸움 좀 하는 해결사였다. 그런데 그 느낌이 괜찮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에 비하면 인규는 위해를 가하기도 하지만 말이 많은 ‘입 파이터’였다.

새로운 인물을 처음 받아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착수하는 편인가? <부부의 세계>의 인규는 성정이 거친 데다 연인에게 비정상적인 집착과 의존을 하는 남자인데. 작품 할 때 마다 일정한 루틴이 있는 건 아닌데, ‘이런 행동을 왜 하지?’ 싶을 때가 많다. 인규 역시 도덕적인 잣대로 봤을 때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이니까. 여자친구인 현서가 “원래 그런 애 아닌데, 지금 안 좋아서 그래요”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었다. 아마 작품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하는 포인트가 있었을 것 같고, 그래서 현서가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다 둘이 무슨 일을 겪고서 나락까지 떨어졌을 테고.

떠나려는 현서를 기차역에서 무섭게 찾아 헤매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드디어 맞닥뜨렸을 때, 분노만 담은 게 아닌 복합적 표정을 보여줬다. 현실에서는 온갖 악인의 서사에 감정 이입할 필요가 없지만, 극 속의 그 얼굴에 잠시 짠한 데가 있다고 느꼈다. 현서와 새 출발을 할 생각이었는데 거부당하니까 ‘나에겐 이제 정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감정이 들었을 것 같았다. 대본을 보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잡는 그 순간 ‘어떤 표정이 나오겠구나’ 상상은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예상한 수준까지는 가지 않더라. 쭈그리고 앉아 있는 현서를 그냥 바라보게 됐다. 그저 바라봤다.

대본을 숙지하고 있어도 막상 현장에서는 어떤 감정을 가져가야 하는지 헷갈릴 때가 있진 않았나? 감정 면보다는 어떤 자세로, 어디에 어떻게 있어야 할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김희애 선배님 병원에 찾아가서 “이천? 싫어? 그럼 삼천”이라고 협박하는 신이 원래 계속 앉아서 말하는 거였는데, 위압적으로 하려면 어디에 어떻게 앉아서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 여기저기 움직이며 자리를 보다가 책상에 걸터앉으니까 선배님이 웃었다(웃음). 그냥 서서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결국 서서 말하다가 앉는 쪽으로 갔다. 그렇게 하니까 단조롭지 않고 움직임이 있어서 더 재밌게 나왔다.

가죽 재킷은 문선, 안에 입은 줄무늬 셔츠는 디올 맨, 목걸이는 오네 제품.

이병헌 감독의 JTBC <멜로가 체질>에서는 인규와는 또 다른 나쁜 놈이었다(웃음).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직진 구애를 하고 아이도 생겼는데, ‘한번 태어난 인생 이렇게 살 수 없다’며 행복을 찾아 떠나겠다고 했지. ‘그럼 내 행복은 어떡해’라고 묻는 여자에게 당신이 해맑게 한 대사를 잊을 수 없다. “니 행복을 왜 나한테 물어?” 결혼했다가 금방 또 자기 삶 찾아 떠나겠다고 하고, 그런 것 역시 내 잣대로는 이상한 행동이지(웃음). 그렇게 이상하거나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턱’ 하고 걸리는 기분이다. 이걸 어째야 하나 싶다. 그래서 인간 이학주의 생각과 이미 글로 쓰인 인물을 서로 분리시키려고 애쓴다. 그러지 않으면 연기를 하다가 내가 나를 제어하게 되니까 온전한 표현을 하기 힘들다. 나와 그 인물을 떨어뜨리는 일이 중요하다.

<부부의 세계>가 끝난 후 방영 시작한 JTBC <야식남녀>에서는 정일우를 흠모하는 디자이너로 나온다.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측면에서는 ‘게이’에 방점 찍을 필요 없이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물로 접근하면 될 텐데, 다만 두 남자의 케미스트리는 중요할 것 같다. 정일우 형과 잘 맞는 편이라 연기하지 않을 때도 잘 지낸다. 드라마가 진행되면 내가 그에게 ‘정확하게’ 이야기를 한다. 내 마음 표현을, 정확하게.

디자이너 역할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기본적인 드로잉과 현업에서 사용되는 용어 등등을 배웠다. 아마 배운 걸 실제로 드러낼 수 있는 신은 많지 않을 거다. 그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인물이 어떤 포즈를 취하는지, 눈길은 어디에 두는지, 그들의 부담감은 뭔지 엿보는 일이 즐거웠다. 라프 시몬스를 다룬 <디올 앤 아이>를 봤는데 재밌더라. 다큐는 아니지만 영화 <이브 생 로랑>도 재밌게 봤고.

정일우와 당신은 한양대 연극영화과 동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신이 연출 전공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방송과 영화를 좋아했다. 실기 없이 수능 성적으로만 입학할 수 있어서 지원했는데, 내가 연출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걸 1학년 때 바로 알아챘다. 그냥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여부는 다른 문제였다.

카메라 뒤편에서 이야기를 연출하는 것보다 연기를 하는 게 적성에 맞던가? 연출 전공도 연기 수업을 필수로 들어야 한다. 앞에 나가 독백하는 수업을 하는데 떨리면서도 재미를 느꼈다. 그래서 2학년이 되어 노래 배우는 수업도 재빨리 신청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즐거운 취미 정도로 생각하면서, 군대 가기 전에 연극을 한번 경험해보려고 학교에서 오디션을 봤다가… 분명 나는 떨어져야 맞는데, 역할이 많이 필요한 연극이라 오디션 본 전원을 합격시키면서 무대에 오르게 됐다. 손과 발을 다 잘라버리고 싶은 경험이었지만 재밌게 했다. 그렇게 시작됐지.

흰색 티셔츠는 제임스 펄스 by 비이커, 팬츠는 캘빈 진, 벨트는 자라 맨, 부츠는 후망, 체인 네크리스와 반지는 모두 디올 맨 제품.

재미로 시작해서 배우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만든 작품은 뭔가? 단편영화 <12번째 보조사제>인 듯하다.

장재현 감독이 <검은 사제들>을 만들기 전에 작업한 단편. 그러니까 강동원 이전에 이학주가 있었던 셈이다(웃음). 안 그래도 당신과 만남을 앞두고 그 영화를 봤는데, 악령이 트라우마를 건드리자 울며 뛰쳐나가는 모습이나 두려워하면서도 다짐하는 눈빛이 짠해서 인상적이었다.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한 게 그 작품을 통해선가? 그렇다. 수상은 좀 민망했고, 나도 보면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저게 나야?’ 했으니까.

그 이후 몇 년 동안 여러 영화의 작은 역할, 연극, 드라마 등을 하며 다수의 작품을 소화했다. 연기를 하면서 오랫동안 함께한 고민이 있다면 뭔가? 배우를 하기에 나는 다소 편견이 있고 옹졸한 면도 있는 사람이다. 여러 유형의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능력이 부족하달까? 그러나 내가 세상을 허용하는 범위가 좁다면, 그 안에서 깊고 세밀하게 표현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나와 인물을 분리하면서, 나의 가치 판단 없이 인물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해왔고.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건 이성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 같다. 배우란 어떤 면에서 종교인 같은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듣고 보니 그건 연기뿐 아니라 인간사에 적용할 만한 얘기 같은데? 관대하게, 투명하게 사람과 세상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면 성숙한 배우, 성숙한 사람으로 갈 수 있겠다는 교훈이… 그렇다. 배우에게 엔터테이너의 기질이 필요한 면도 있지만, 어떤 한 특성을 가진 배우에게선 진정 종교적인 느낌이 든다. 그래도 내 경우 처음 독백 수업을 할 때나 현장에서 생각지도 못한 디렉션을 받을 때, 머리가 하얘지면서 덜컹거리는 그 순간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물 흐르듯이 가는 게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가 긴장하는 경험이 재밌지. 그러다 즉사할 수도 있지만(웃음). 그리고 사람과 세상을 볼 때 좀 더 예민해지기 위해서 일기를 쓰기도 한다.

일기? 무슨 이야기를 쓰나? 어떤 날은 감상적일 때도 있고, 누가 보내준 별자리 운세 같은 것에 대해 쓸 때도 있고. 읽는 것보다 쓰는 게 낯선 세상이니까 좀 쓰면서 살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바빠서 못 썼지만.

조만간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하길 바란다. 오늘 쓰겠다. 재밌는 시간이었으니까(웃음).

 

지면에 실리지 않은 B컷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