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요하고 창의적인 실험 정신이 탄생시킨 '젊은 막걸리'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막걸리의 봄

2020-05-02T22:00:31+00:002020.05.03|FEATURE, 리빙|

젊은 양조자들이 빚은 막걸리가 우리 술 시장의 판을 뒤흔들고 있다. 집요하고 창의적인 실험 정신이 탄생시킨 ‘젊은 막걸리’는 마침내 봄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1. Hangang Brewery 나루 생 막걸리 서울시 강서구 오곡동과 개화동 일대에서 재배한 ‘경복쌀’을 주원료로 한다. 기존 막걸리가 가진 텁텁함을 줄이는 대신,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매끄러운 질감을 살렸다.

2. DOK Brewery 뉴트로 맥주의 ‘드라이 호핑’ 기법을 차용해 발효가 끝난 술에 레몬,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 등의 부재료를 넣어 냉침했다. 조금씩 홀짝이면 홉에서 느껴지는 씁쓸하면서 시트러스한 풍미가 피어오른다.

3. Guruma Brewery 만남의 장소 전분질이 풍부한 철원 오대미로 양조한다. 뒷맛에 남는 부드러운 쌀의 여운과 생강, 통후추의 뉘앙스가 매력적이다. 미쉐린 1스타 한식당 ‘주옥’에서도 만날 수 있다.

4. Soolawon 술아 핸드메이드 막걸리 여주 햇찹쌀로 양조했으며, 첨가물을 넣지 않고 알코올 도수를 높여 쌀과 누룩의 깊은 향을 느낄 수 있다. 입 안을 화사하게 돋우는 청량감으로 치킨, 족발 등 기름진 음식과 궁합이 좋다. 글라스웨어는 모두 오르에르 아카이브 제품.

“지금 물살을 타기 시작한 국내 막걸리 시장을 지켜보면, 2002년 주세법 개정으로 ‘소규모 맥주 제조 면허’가 도입되면서 순풍에 돛을 단 듯 성장한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떠올라요. 기존의 문법 에서 벗어난 막걸리가 우후죽순으로 출시되면서, 눈 빠른 사람이라면 머지않아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리라 예측했죠.” 올해 석류와 히비스커스 풍미가 진동하듯 피어오르는 막걸리 ‘걍즐겨’로 ‘대한민국 주류 대상’을 거머쥔 DOK 브루어리 이규민 대표의 설명처럼, 소규모 설비에서 개성 있는 재료와 레시피로 양조한 ‘젊은 막걸리’가 현재 우리 술 시장을 견인하고 있다. 작년 12월 인스타그램을 통해 통후추와 생강을 넣어 발효한 막걸리 ‘만남의 장소’의 첫 개시를 알린 ‘구름아 양조장’의 양유미 팀장도 이러한 신선한 흐름을 귀띔한다. “최근 다섯 번째 배치를 예약 판매했는데, 공지를 올린 지 3분 만에 전량이 동났어요.”

우리 술 시장에 유쾌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막걸리 리부트’는 사실 일찌감치 예견된 일이었다. 대기업이 제시하는 천편일률적인 막걸리 맛에 시들해진 소비자가 새로운 선택지에 손을 뻗기 시작하며 젊은 막걸리의 등장에 시동을 걸었다면, 제2의 막걸리 부흥을 꿈꾸는 젊은 생산자의 실험 정신은 열풍의 증폭기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전문가들은 지금 태동하고 있는 막걸리 리부트의 실마리를 2016년에서 찾는다. “사실 막걸리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1998년 막걸리의 지역 제한 판매가 철폐되면서 전국 팔도에 다양한 지역의 막걸리가 유통되기 시작했어요. 막걸리 업계에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며 ‘서울장수’를 비롯한 주류 대기업이 생겨난 때이기도 하죠. 이후 2011년 한류에 힘입어 한바탕 막걸리 열풍이 불다가 반한 감정 등으로 인기가 시들 해지면서 수출이 급격히 뒷걸음치는 사건이 발생해요. 그러다 오랜 시간 제자리걸음을 걷던 막걸리 업계에 숨통을 트이게 한 사건이 2016년 ‘소규모 주류 제조 면허’의 개정이죠. 1000L 이상의 저장 용기를 보유한 시설이라면 막걸리를 소규모로 제조해 판매할 수 있도록 주세법이 개정되며 청년들이 막걸리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어요.” 애주살롱 천수현 대표의 말이다.

취재로 만난 젊은 양조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가 있다. 2016년 주세법 개정이 막걸리 리부트의 도화선을 마련해줬다면, 막걸리에 잠재된 ‘시장성’은 본격적으로 양조 사업에 뛰어들게 만드는 열쇠가 되었다는 것. “막걸리 시장 규모는 약 3000억원으로 맥주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시장이지만 오히려 성장 동력이 크다고 생각했어요. 선물용으로 좋은 고가의 라인업을 꾸리는 방식으로 확장성을 꾀할 수 있고, 무엇보다 최근 식음료 시장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까이 호흡하는 ‘로컬리티’에 가치를 두며 재편되는 추세거든요. 소규모 주류 제조 면허로 생산한 막걸리는 제도상 인터넷 판매가 금지되어 있어서 소비자가 발품을 팔아 직접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수령해야 하는 구조예요. 생산자와 소비자가 밀접하게 접촉하니 자연스럽게 유대감이 생겨나고 재구매 의사가 높아지는 거죠..” 구름아 양조장 양유미 팀장의 말이다. 서울시 강서구 오곡동과 개화동 일대에서 재배한 ‘경복궁쌀’을 발효해 막걸리를 양조 하는 ‘한강주조’의 고성용 대표는 철저히 ‘국내 경쟁’만 존재하는 막걸리 시장의 현주소에 과녁을 맞춰 말한다. “국내 크래프트 맥주 산업은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리스크가 커서 간혹 ‘빛 좋은 개살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카스’, ‘하이트’ 등 대기업에서 생산한 맥주, 수입산 맥주 등 대체재도 많은 상황이죠. 반면 막걸리는 시장 규모는 작지만 철저히 국내 경쟁만 존재해요. 잠재적 가능성이 아주 높은 셈이죠.” 실제 농식품수출 정보에 따르면 막걸리는 여타의 주류와 달리 해외로부터 수입하는 물량이 200달러 수준으로 극소량이기 때문에 수입산 경쟁 제품이 국내 소비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상 전무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막걸리는 철저히 단골 장사였어요. 그러다 그저 ‘시큼털털’할 뿐이라는 기존 의 막걸리 맛에서 탈피하기 위해 레몬, 홍차 등 다양한 부재료를 활용한 새로운 풍미의 막걸리가 잇따라 쏟아지고, 도수도 다양화하면서 서서히 소비자층이 확대되는 움직임이 감지됐죠. 지금은 20~30대의 새로운 손님이 많이 유입되는 추세예요.” 삼각지역 부근의 전통주 보틀 숍 ‘이것이 술이다’를 운영하는 장현준 대표의 말이다. ‘장생 건강원’, ‘프레그릿’ 등 서울의 바 신에서도 막걸리를 기주로 사용한 창작 칵테일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막걸리는 제2의 전성기를 통과하고 있다. 그렇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나, 젊은 막걸리가 이끌고 있는 막걸리 시장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장애물이 존재한다. 가장 우선, 푼돈 몇 푼으로 거나하게 취할 수 있는 ‘싸구려’ 술이라는 고정관념과의 악전고투가 그렇다. 와인의 경우 산지와 생산자를 따지며 그 가치를 인정하지만, 막걸리 는 여전히 값싼 초록빛 페트병에 들어 얼큰한 숙취를 남기는 ‘서민의 술’이라는 이미지에 갇혀 있다. 장수 막걸리를 비롯해 익히 알려진 공장형 막걸리의 소비자 가격이 1000원대에 머문다는 사실을 들어, 얼마나 좋은 원재료를 사용했느냐의 여부를 저만치 밀어둔 채 젊은 양조자가 생산한 막걸리에 붙여진 고가의 가격표에 회초리를 드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러한 고정관념의 연장선으로 레스토랑, 카페, 와인 바 등에서 폭넓게 소비되는 맥주와 달리 여전히 한식 주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막걸리가 유통되고 있다는 점도 큰 허들로 남는다.

젊은 양조자들이 고정관념과의 결별을 위해 분투하는 동안, 취재를 하며 소비자로서 느낀 가장 큰 답답함은 정확한 용어의 부재다. 소규모 설비를 사용해 개성 있는 재료와 레시피로 양조한 막걸리는 ‘젊은 막걸리’, ‘모던 막걸리’, ‘크래프트 막걸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모두 한 겹 구부러진 가치 판단이 담기거나 정확한 정의를 유예시키고 마는 게으른 조어나 다름없다. 전문가들도 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동시에, 정확한 정의를 담보하는 통일된 조어가 있어야만 산업이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나아가 양조장끼리 레시피를 공유하고 서로 다른 양조장의 맥주를 ‘게스트 탭’ 형식으로 소개하며 활발히 정보를 교환하는 크래프트 맥주 문화와 달리, 아직까진 각개전투하며 양조장의 문을 굳게 지키고 있는 막걸리 문화의 보수성을 맹점으로 꼽는 이도 적지 않다. “시장이 작다 보니 출혈 경쟁이 심한 편이에요. ‘내 파이를 지켜야겠다’는 분위기가 암암리에 깔려 있죠.” 작년 첫 막걸리를 출시한 모양조장 대표의 말이다. “크래프트 맥주 시장이 단기간에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한 동력은 철저히 레시피 공유에 있다고 생각해요.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거 든요.” DOK 브루어리 이규민 대표가 말한다.

그럼에도, 막걸리의 봄은 찾아올 것이다. 맥주의 ‘드라이 호핑’ 기법을 차용해 막걸리 풍미의 다변화를 시도하는 DOK 브루어리, 서울에서 재배한 쌀을 주원료로 기본에 충실한 ‘서울표’ 막걸리를 양조하며 전통과 현재를 잇고 있는 한강주조, 로컬 커뮤니티와 적극적인 화음을 이루며 막걸리 문화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있는 구름아 양조자 등 젊은 양조자들의 실험 정신이 막걸리 산업에 변화의 악센트를 덧붙이고 있다. 히비스커스, 석류, 생강, 레몬 등 다양한 부재료를 활용하여 모험을 택하고, 천편일률적이던 패키지에 감각적인 새 옷을 입히며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시도도 기꺼이 박수 칠 만하다. 애주살롱 천수현 대표는 “빠르게 성장하는 막걸리 시장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 시장에서 좋은 반응이 쏟아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술맛에 집중해야 할 때다”라고 강조한다. 급변하는 시장의 흐름에도 자신만의 술독을 우직스럽게 지키며, 막걸리의 봄을 펼쳐 보여줄 젊은 양조장의 내일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