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를 든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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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와인스타인이 할리우드의 암적인 존재였다면, 폭스 뉴스의 CEO는 정치적 입지를 위해 여성을 발아래 둔 수완 좋은 인물이었다. 직장에서 남자 상사와 여자 직원의 미묘한 역학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앵커가 미디어의 제왕을 고발한 상징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밤셸(Bombshell)>의 세 여자를 만났다.

샤를리즈 테론이 입은 호피무늬 코트는 셀린 by 에디 슬리먼 제품.

1996년부터 폭스 뉴스(Fox News)의 CEO를 맡은 남자, 로저 에일스는 여성 앵커와 기자가 특정 스타일을 취하도록 했다. 그 스타일이란 몸에 딱 붙는 무릎 위 길이의 화사한 반소매 드레스와 누드 톤 스타킹, 그리고 하이힐 차림이었다. 그는 부하 여직원을 가족이자 소유물로 여겼다. 그 점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매우 구체적이고 이상한 방식으로 몰개성화시킨 기제로 작동했다. 폭스 뉴스의 여직원들은 머리를 길게(가급적이면 금발로!)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은, 고도로 조직화된 섹스 로봇 같은 존재가 됐다. 20171월부터 미국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로 인해 미국에서는 보수적 시청자가 점점 더 늘거나 결집했고, 폭스 뉴스의 여성 앵커와 기자는 바로 그 시청자 층에 뉴스를 전달해야 했다. 미묘하게 외설적이면서 구태의연한 여성성을 투영한 존재들. 미스 아메리카 출신인 그레천 칼슨(Gretchen Carlson)이나 메 긴 켈리(Megyn Kelly) 같은 앵커는 수뇌부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서로 교체 가능한 인물이었다. 로저 에일스는 왜곡된 사고방식으로, 여성 앵커의 의상이 얼마나 즉각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용이하며 개성을 전달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 폭스 뉴스 채널이었다.

물론, 과거의 이야기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다. 2016년 여름, 그레천 칼슨은 로저 에일스를 성희롱 혐의로 고소했다. <밤셸(Bombshell)>은 폭스 뉴스를 둘러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작품은 폭스 뉴스의 내부 고발자 그레천 칼슨 역의 니콜 키드먼(Nicole Kidman), 권력 앞에서도 직설을 멈추지 않으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메긴 켈리 역의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 그리고 회사 내에서 성공의 사다리에 오르려는 광적인 목표를 가진 가상의 인물 카일라 역의 마고 로비(Margot Robbie)를 통해 로저 에일스의 몰락을 그린다. 소속 앵커가 CEO의 성희롱을 고소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유사한 고소와 고발이 연달아 일어났다. <밤셸>의 감독 제이 로치는 말한다. “로저 에일스는 고소가 일어난 직후인 20167월에 폭스 뉴스를 그만뒀습니다. 하지만 그 소식은 다음 해 10월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죠. ‘#MeToo’ 운동을 촉발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 관한 기사가 <뉴욕 타임스>에 실리고 나서야 널리 알려졌다는 겁니다. 그 점을 기억하는 게 중요해요. 로저 에일스 의 행태는 ‘#MeToo’가 폭발하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니콜 키드먼이 입은 오프숄더 드레스는 생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헤어밴드는 L. 에릭슨 제품.

<밤셸>은 로저 에일스가 직장에서 자행한 성추문의 연대기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동시에 대통령 후보 토론에서 메긴 켈리가 트럼프에게 여성을 규정하는 끔찍한 방식에 대해 질문 공세를 퍼부은 이후, 폭스 뉴스의 시청자를 넘어서는 유명세를 얻은 출세 과정도 담는다. 당시 토론 후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메긴 켈리에 대해 ‘눈에서도,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피가 나온다’ 고 말하면서 악랄하게 보복했다. 트럼프의 성차별주의적인 빈정거림은 이제는 트럼프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간주되지만,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저도 공화당 토론을 보면서 메긴 켈리를 처음 알게 됐어요.” <밤셸>에서 뛰어난 연기를 선보여 2020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샤를리즈 테론이 말했다. 영화 속에서 샤를리즈 테론이라는 존재는 등장인물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져버린다. 샤를리즈 테론의 평상시 목소리도 앵커 메긴 켈리와 비슷하게 성대에 힘을 주어 낮게 내는 목소리다. “메긴이 트럼프에게 질문했을 때 너무 좋았어요. 그녀의 날카로움과 재치에 감탄했죠. 겁이 없는 여자였어요. 하지만 <밤셸>의 시나리오를 받고서는 이 역할을 두고 좀 갈등했어요. 그녀가 말한 것 중에 몇 가지가 개인적으로 불편했거든요. 결국에는 그녀의 용기와 야심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요. 메긴도 자신이 터프한 성격임을 안다고 하더군요. ‘터프하다’라는 말은 저도 들었던 평가죠. 메긴은 사람들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용감하다는 말을 듣곤 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판단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고요.”

그레천 칼슨은 고소를 진행하면서 오랜 기간 지속된 성추행의 패턴을 자세히 설명했다. 영화에서는 칼슨이 “에일스는 ‘출세하려면 머리를 좀 써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다”고 주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레천 칼슨과 더불어 폭스 뉴스 앵커였던 메긴 켈리도 에일스가 많은 여성에게 매우 부적절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켈리는 에일스에 대해 좀 복합적인 감정 을 가지고 있었다. 로저 에일스가 한편으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데가 있는 천재라고 여긴 거다. 샤를리즈 테론은 로저 에일스가 일을 아주 잘했다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는 제가 연기한 메긴 켈리를 비롯해 폭스에서 일하던 많은 여성의 멘토였어요. 그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직장에서 자기 경력을 이어나갈 수 있게끔 해줄 멘토에게 배신당하는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 이었죠. 앞날을 알 수 없잖아요. 저는 우리 영화가 이 지점을 표현한 뉘앙스를 좋아해요. 폭력 앞에서 무결한 희생자를 다루려는 게 아니라,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의 지저분하고 감정적인 역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죠. <밤셸>에서 우리의 괴물이 항상 괴물처럼 보이는 건 아니에요. 그것이 바로 현실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방식이죠.”

<밤셸>의 메인 프로듀서는 샤를리즈 테론이지만,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남자다. 제이 로치는 영화 <트럼보>의 감독이었고, 찰스 랜돌프는 <러브 & 드럭스>, <인터프리터>, <데이비드 게일> 등을 쓴 작가다. 제이 로치는 말했다. “<밤셸> 작업을 하면서 제가 남성이라는 점을 통해 스스로를 깊게 반추할 수 있었죠. 꼭 여성 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해야 했을까요? 성희롱이라는 주제에 대한 남성들의 집단적 죄의식은 뭘까요?” 샤를리즈 테론은 감독이 그런 질문을 던지며 이러한 주제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점 자체에 가치가 있다며 그에게 연출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제이 로치는 이 작품을 맡기로 한 결정이 ‘여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할 목적이었다’고도 했다. 두 남성은 모두 폭스 뉴스를 시청하는 보수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특히 독실한 복음주의 교회 집안에서 자란 찰스 랜돌프는 유럽에서 전도를 하기 위해 대학을 관두기까지 한 인물이다. “저는 제가 예수의 제임스 본드인 줄 알았어 요.” 찰스 랜돌프의 말이다. 지금은 두 남자 모두 리버럴 쪽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폭스 뉴스가 대변하는 우파 세계관과 그 월권행위에 대해 가정 내 체험으로부터 얻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 “책임감 없이 여성에게 접근하는 일종의 환상. 많은 남자들에게는 그게 바로 권력이에요. 로저 에일스는 폭스에서 그 권력을 가지고 있었죠. 여성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있었으니까요.”

니콜 키드먼은 미모, 자신감, 치밀하게 계산된 분노를 조합해 그레천 칼슨을 연기했다. 그녀는 이 영화의 이야기가 ‘여성이 해로운 환경과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는가에 대한 연구 사례’ 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여성에 대해 복잡미묘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세상이 승자와 패자,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명히 나누길 원한다고 해도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으니까요. 에일스 같은 포식자에게 인간성의 여지를 남겨 두는 일은 조금 위험한 처사지만, 에일스 같은 사람이 어떻게 여자들을 조종했는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괴롭힘 당하는 문제에 대처할 수 있어요.” 키드먼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가며 미소 지었다. “그레천의 의상을 입는 것이 즐거웠어요. 마치 갑옷을 입는 것 같았죠. 그리고 이 인물이라면 핫 핑크를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받았어요!”

마고 로비가 입은 볼륨감 있는 연두색 코트는 발렌시아가 제품.

순진한 여성에서 공범으로, 그리고 다시 희생자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는 인물을 연기한 마고 로비 역시 에일스가 부하 직원을 어떻게 크고 작은 방식으로 조종했는가에 매료되 었다. “저는 폭스의 복장 규정에 반기를 들었어요. 저라면 누드 톤 스타킹은 신지 않을 거라고 했죠. 내 또래나 더 어린 여자들은 누드 톤 스타킹 같은 건 신지 않아요. 제가 직원이었다면, 로저 에일스는 저를 해고했으려나요?” 아마 그랬을 것이다. <밤셸>에 묘사된 폭스의 세계는 한마디로 로저 에일스의 우주였다. 그는 켈리의 성공을 도운 뒤 트럼프가 켈리에게 불만을 제기하자 켈리의 질주를 냉정하게 막아서려고 했던 꼭두각시 조종자였다. 그의 세계가 붕괴되기 전까지, 에일스는 신을 흉내 내곤 했다. 샤를리즈 테론은 ‘로저 에일스는 정말 싫어하고 싶은 인물’이라면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흥미롭고 열정적인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의 캐릭터를 분석하는 일도 쉽지 않아요. 그의 권력에 대한 욕구는 여자들이 극복해야 할 악성 종양 같은 거예요. 에일스는 맹목적인 충성을 원했고, 거기에 ‘NO’라고 말한 최초의 인물이 칼슨과 켈리였어요. 켈리를 연기하면서 저는 우리가 왜 이토록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우리 삶을 좌우하도록 내버려두었는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이 영화는, 바라건대 약을 먹는 것과 같아요. 모든 질문에 대해 답을 알려주지도 않고, 완벽한 치료를 시도하지도 않지만, 이 변화의 과정이 좀 더 빨리 진행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죠.”

피처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COLIN DODGSON
LYNN HIRSCHBERG
스타일리스트
Moonves DODGSON
헤어
Adir Abergel For Virtue Labs @Swa(샤를리즈 테론), Lona Vigi @Swa(니콜 키드먼), Bryce Scarlett For Morrocanoil @The Wall Group(마고 로비)
메이크업
Kate Lee @The Wall Group(샤를리즈 테론), Angela Levin For Neutrogena(니콜 키드먼), Pati Dubroff For Chanel @Forward Artists(마고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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