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괴물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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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와 이상이 시의 몸으로 만났다.” 제38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권박을 향한 한 줄이다. 권박은 여성에게 제한된 역할만 부여하는 공동체를 기꺼이 거부한다. 그리하여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괴물’이 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찾으려 분투했던 ‘이름 없는 여자들’을 호명한다. 그녀의 수상 시집 <이해할 차례이다>는 뒤틀린 얼굴로 건네는 일종의 피의 사전이다.

수상을 축하한다. 당선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은 아마 평생 잊히지 않겠지? 작년 95일에 투고해 1010일 전화로 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다. 통화가 연결되고 “권박 씨죠?”라고 말하는 순간 알았다. ‘됐다’라고. 앉은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당시엔 도무지 믿기지 않아 출판사에 직접 찾아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지인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웃음).

본명인 권민자라는 이름 대신 새로운 시집에는 권박이라는 이름이 자리한다. 아들 ‘자(子)’가 들어간 이름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처음 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바꾸는 일은 굉장히 쉬운 자기 역사임에도 어쩐지 나에게는 끝내 마치지 못한 숙제처럼 느껴졌다. 3년 전 ‘마구마구 피뢰침’의 초고를 쓰며 본격적으로 다양한 이름을 줄 세워두고 선택지를 좁혀나간 것 같다. 이름을 바꾸자고 마음먹고 이름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무명으로 산 여성 혹은 본명 대신 남성의 이름을 빌려 활동한 여성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기하게도 우리나라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멀리 해외, 심지어 영국 소설가 메리 셸리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했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했고, 이를 위한 방편의 하나로 이름을 지운 셈이다. 이런 역사에 기대 쓴 시가 ‘마구마구 피뢰침’이었다. 어찌 보면 이름에 대한 오랜 스트레스가 굉장히 좋게 발현된 셈이다.

작년 수상자는 시집 <캣콜링>을 낸 시인 이소호다. 2년 연속 여성을 말하는 여성 시인의 수상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여성이 억압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출판되며 쏟아진 말의 홍수를 지금도 기억한다. ‘62년생 김지영’ 혹은 ‘82kg 김지영’이 주인공이라면 소설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말들 말이다. 나아가 특히 회사에서 여성이 성추행 혹은 성폭행을 당하더라도 가해자인 남성이 아닌 피해자 여성이 해고되는 경우를 빈번히 목격했다. 대기업의 경우 사회적 사안에 민감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정 능력을 갖췄지만, 국내 전체 기업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4%에 불과하지 않나.

한동안 문학이든 회화든 여성을 말하는 작품에서 아쉬웠던 지점은 ‘과잉’이었다. 여성의 피해 사실이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폭발적으로 표현되는 것에 여성인 나조차 거부감이 느껴지곤 하더라. 그런데 <이해할 차례이다>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이 페미니즘의 시작이 아니지 않나. 누군가는 이를 정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년 김수영문학상 수상자인 이소호 시인의 경우 최승자, 김이듬, 김민정 시인의 작품처럼 여성의 고통을 호소하는 시의 계보를 잇는다고 생각한다. <이해할 차례이다>를 통해서는 여성의 피해를 호소하기보다 이를 정리하고 차분하게 이해시키는 것에 좀 더 방점을 두고 싶었다. 한때 여성과 남성 사이의 끝나지 않는 싸움에서 남성이 먼저 악수를 건네주길 바란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피해자 여성이 가해자 남성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현실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우스갯소리로 가해자가 사과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고 되받아치더라(웃음). <이해할 차례이다>에서는 고발하기보다 차분하게 정리하듯 말하며 대화를 건네고 싶었다. 첫 시 ‘필요한 건 현실이다 말하는 너에게 허구로 만들어 버리는 나의 입으로부터’에서도 말하지 않나. “나와 대화를 나눠줄래?”라고. 동시에 “대화란 성공적인 오해니까 실패한 대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괜찮아”라고.

시를 움직이는 두 바퀴가 보였다. 하나는 지금까지 말한 여성이라면,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시집 전반에 죽음에 대한 사유가 짙게 드리운다. 나와 비슷하게 이름에 사내 남(男)자가 있던 동갑내기 친척 여자아이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갑작스레 죽음을 맞았다. 이듬해에는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실려 갈 정도로 위독했다. 이때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주변 사람 혹은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후회 없이 인생을 살고 싶다고. 종종 내 시를 읽은 사람은 ‘몸으로 부딪치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동시에 문장은 정화되어 있지만 읽다 보면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고 전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주는 강렬함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든다. 물론 죽음은 아직까지도 풀이되지 않은 숙제와 다름없다. 다음 시집은 보다 죽음과 삶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담기지 않을까 싶다.

2020년, 유독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가 있나? 여전히 ‘이해’를 힘주어 말하고 싶다.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장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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