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트 페리앙은 어떻게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가 되었나?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모던한 여인

2019-12-24T01:40:00+00:002019.12.24|FEATURE, 컬처|

샤를로트 페리앙 (Charlotte Perriand)은 어떻게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가 되었나?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리는 <샤를로트 페리앙: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며> 전을 통해 그녀를 기억한다.

1987년의 페리앙.

그 시절의 연약한 여자들은 도전이라는 걸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은 그러지 않았다. 1927년, 파리에서 장식미술연맹 중앙학교를 졸업한 지 2년 만에 페리앙은 명망 있는 ‘살롱 드 오토메(Salon dAutomne)’의 초청을 받았다. 그녀는 바로 르코르뷔지에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명성 높은 모더니스트 건축가에게 스케치나 작업물을 보여주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큰 희망을 품고서. 그때 페리앙은 스물네 살이었다. 페리앙은 회고록에서 당시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근엄한 느낌의 사무실은 다소 위압적이었고, 그의 인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뭘 원하는 거지?” 안경으로 반쯤 가려진 눈을 한 그가 물었다. “당신과 함께 일하고 싶어요.” 그는 내 그림들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여기는 쿠션에 수놓는 데가 아니야.”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출입문을 가리켰다.’ 그러나 다음 날 살롱 드 오토메로 돌아온 페리앙은 친구로부터 ‘르코르뷔지에와 그의 사촌이자 협력자인 피에르 잔느레가 네 작품을 보기 위해 왔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르코르뷔지에 일행이큰 인상을 받았다는 페리앙의 작업은 그녀가 살던 생쉴피스(SaintSulpice) 광장의 작은 다락방 아파트를 실용주의적이고 모던한 스타일의 식당으로 리노베이션한 스케치다. 그 일을 계기로 페리앙은 르코르뷔지에의 스튜디오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페리앙이 디자인한 사이드보드, 1977년.

지금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Fondation Louis Vuitton)에서는 샤를로트 페리앙의 성취를 돌아보는 회고전 <샤를로트 페리앙: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며(Charlotte Perriand: Inventing a New World)>가 열리고 있다. 페리앙 사망 20주기에 맞춰 2020224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그녀의 건축, 가구, 인테리어, 사진 등을 망라하는 규모다. 피카소와 노구치 이사무 등 페리앙의 친구들이었던 대가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201910월 전시 오프닝 때는 생쉴피스의 다락방 식당이 특별히 재현되기도 했다. LVMH 그룹 회장이자 CEO 베르나르 아르노의 후원 고문인 장 폴 클라브리는 페리앙을 20세기의 위대한 문화 사회 운동에 참여한 핵심 인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는 자연과 현대성, 환경, 변화하는 여성의 역할, 그리고 사회 변혁에 대한 비전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비전은 과거를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미래를 향해 있었어요.”

샤를로트 페리앙의 회고전을 이해하려면 재능 있고 야심 찼던 한 여성의 궤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르코르뷔지에와 페리앙은 10년을 함께했다. 그 시기 동안 그녀는 주로 20세기의 유명한 가구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인테리어 장비’인 그것들의 일부를 맡아 디자인했다. 그중에는 아직도 전 세계의 기업 로비에 공급되는 크롬 파이프와 두툼한 가죽 쿠션으로 만든 상자 모양의 클럽 의자,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긴 의자 등이 있다. ‘셰이즈 롱(Chaise Longue)’이라고도 하는 긴 의자에 젊은 여성이 누워 있는 유명한 사진은 1929년 피에르 잔느레가 촬영한 것이다. 사진 속에서 당시 유행한 단발머리에 대담하게 짧은 치마를 입고, 산업용 볼 베어링으로 만든 목걸이를 착용한 채 누워 있는 여성이 바로 샤를로트 페리앙이다.

르코르뷔지에 스튜디오를 그만둔 후인 1937년부터 페리앙은 독립적인 디자이너 겸 건축가로서 역동적인 경력을 쌓아갔다. 친구이기도 한 산업 디자이너 장 프루베와의 협업도 그 경력 중 하나다. 르코르뷔지에 스튜디오에 방문한 유명 디자이너들은 페리앙과 친구가 됐다. 그중 가장 친한 친구는 페리앙이 생쉴피스를 떠나 몽파르나스로 이사했을 때 이웃이기도 했던 페르낭 레제다. “페르낭 레제는 이른 아침이면 엄마의 집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엄마는 아침 식사로 카페 라테와 타탱을 대접했죠.” 페리앙의 딸인 페르네트 페리앙-바르삭이 회상한다. 그 시절, 동네 아이들은 볼 베어링 목걸이를 한 페리앙을 보며 짓궂게도 ‘비인간(LInhumaine)’이라고 불렀다.

르코르뷔지에, 조-부르조아, 장 푸케, 페르시 스콜필드와 함께, 1928년.

페리앙은 영국인 퍼시 슐레필드와의 짧은 결혼 생활을 마친 후, 피에르 잔느레와 불같은 사랑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진보적 색채를 띠는 작업을 대거 선보였다. 표준화된 산업용 부품으로 조립되는 저렴한 가구는 물론,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주택과 별장을 제공하기 위한 조립식 보금자리를 설계한 일이 그 예다. 20세기 초 디자인 경력을 쌓는 데 성공한 극소수 여성 중 대부분은 부유한 가족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은 덕에 활동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의 디자이너 아일린 그레이를 예로 들어보자. 프로방스 해안가에 있는 그녀가 디자인한 집들은 이제 감각적인 모더니즘의 선구적 모델로 칭송되고 있지만, 그 집들은 누군가 돈을 지불할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건축 가능했다. 아일린 그레이는 건축가로서 단 한 명의 고객만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녀 자신이다.

페리앙이 성별 문제뿐 아니라 보잘것없는 배경도 극복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의 업적은 더 위대한 것이다. 아일린 그레이 같은 여성과는 대조적으로, 페리앙의 아버지는 재단사,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빠듯하게 생계를 꾸리는 가정에서 부모님이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 바로 페리앙이었다. 물론 그녀가 모자, 깃털 등을 가공하는 공예가와 의상 제작자 등 여러 장인으로 둘러싸인 아파트에서 자랐다는 건 행운이다. 여름휴가 동안 사보이 알프스에 있는 친할아버지 집에서 프랑스의 시골 환경에 노출될 수 있었다는 점도 그렇다. 가장 중요한 건 페리앙이 다소 내성적이었던 아일린 그레이보다 더 강직하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점이다. 페리앙은 대담한 삶을 살 수 있는 배짱을 가지고 있었다. 일세 스튜디오를 창립한 영국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일세 크로퍼드는 말한다. “샤를로트 페리앙에 대해서라면 감탄할 것이 너무나 많아요. 그녀의 작품, 무엇보다도 그녀의 순수한 성격은 경탄스러울 정도입니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회고전에서는 페리앙이 1993년 유네스코 파리 본부를 위해 디자인한 일본식 찻집을 재현해 놨다.

1940년, 페리앙은 파리를 떠나 도쿄로 향했다. 일본 정부의 산업 디자인 고문으로 일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이 직책을 일본 전역을 여행하면서 공예 전통을 연구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샤를로트 페리앙: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며> 전에서는 페리앙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디자인한 여러 작업도 소개된다. 그녀는 일본의 전통 공예와 건축이 가진 경제성, 우아함, 미묘함에 깊은 감동을 받은 바 있다. 전시의 동선상 가장 마지막에 자리한 찻집은 1993년 그녀가 설계한 파리 유네스코 본부 정원의 찻집을 재현한 것이다. “페리앙의 가구 디자인이 오늘날에도 훌륭하고 적절해 보이는 건 그녀의 깊은 지식 덕분이죠. 그녀는 전통적인 재료, 공예 기술, 그리고 지역 문화를 현대적 사고방식으로 결합했습니다. ” 일세 크로퍼드의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달갑지 않은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일본에서 추방된 페리앙은 전쟁으로 항구가 봉쇄되어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자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이 포함된 당시 프랑스령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반도로 향했다. 거기서도 프랑스 정부 측에 ‘인도차이나 공예에 대한 연구를 지원해달라’고 설득하며 낯선 타국에서도 탐험을 멈추지 않았다.

기 레이-밀레와 협업해 지은 스키 리조트 아크(Arc), 1968-1969년.

이 급진적인 여성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연구 지원에 도움을 준 정부 관료 자크 마르탱, 그리고 갓 낳은 딸 페르네트와 함께 1946년 파리로 돌아왔다. 페리앙의 회고록에 따르면 자크 마르탱과의 결혼은 ‘완전히 상반된 인간들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페리앙은 그 결혼 생활을 풍요롭고 행복한 추억으로 묘사한다. 마르탱이 에어프랑스에 취직하며 도쿄와 리우데자네이루로 파견되자, 파리와 그 도시들을 오가면서 남편이 묵는 집의 인테리어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 출신 동계 스포츠광인 피터 린제이 대령이 페리앙에게 사보이 메리벨에 있는 작은 마을의 농지를 고급 스키 리조트로 탈바꿈시키는 웅장한 계획을 의뢰했다. 그렇게 전통적인 목조 사보이식 건축 양식을 활용한 스키 리조트와 인테리어가 탄생했다. 농지에 세운 고급 리조트, 페르낭 레제와 협력해 전후 재건을 진행한 병원, 마르세유에 있는 르코르뷔지에의 걸작 중 하나인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 주택 단지 내 주방, 에어프랑스 런던과 도쿄의 매표소 리노베이션 디자인 등등. 이러한 프로젝트들을 통해 페리앙은 환경 조건을 건축에 민감하게 적용하면서 해당 지역의 자재를 적극 활용하는 이력을 쌓았다. 그건 현대의 건축이 중점적으로 지향하게 될 바를 예견한 일과 다름없다. 이후 세대의 건축이 양식 면에서 참조할 만한 훌륭한 레퍼런스를 남기며 건축계에 특별한 영향력을 끼친 것이다.

미니멀한 공간에 대한 페리앙의 접근법을 보여주는 기숙사 건축물 메종 드 라 튀니지, 1952년. 역시 파리 회고전에 재현돼 있다.

그렇다면 페리앙의 디자인 특성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딜까? 1972년 그녀가 설계한 자신의 두 공간, 사보이 메리벨의 샬레(Chalet)와 파리의 아파트다. 스키 리조트를 의뢰했던 피터 린제이가 디자인 비용 대신 농지 인근의 땅을 선물하면서, 페리앙은 그 땅에 가족의 별장인 샬레를 지었다. 샬레는 소박한 사보이식 건축물과 페리앙의 일본적 터치가 결합된 멋진 예다. 파리 아파트는 페리앙의 스튜디오 근처에 있는 한 빌딩의 다락에 위치한다. 몽마르트르에 있는 사크레퀴르부터 에펠탑까지, 파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엄한 뷰의 아파트다. “저는 이곳이 너무 좁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경치를 보면서 ‘좋아, 잘 만들어보자. 마치 배의 선실에서 사는 것 같을 거야’라고 했어요.” 페르네트가 추억했다. 이 아파트는 1999년 페리앙이 저세상으로 떠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페리앙의 삶에 영감을 준 초상화처럼 남아 있다. 음악을 좋아한 페리앙의 집에서는 노랫소리가 자주 흘렀다. 엄마에 관한 페르네트의 추억들 속에 큰 아쉬움이 있다면, 바로 그 노랫소리에 관한 것. “엄마는 목소리가 멋졌어요. 파리와 메리벨에서 우리는 저녁마다 함께 노래를 불렀죠. 그 노래를 녹음해놓지 않은 걸 정말 후회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