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안아줘 (크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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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러쉬의 새 앨범이 나왔다.

위태로운 너와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 주는 것은 그저 서로가 가진 상처를 핥아주는 것임을 크러쉬는 안다. 너와 나는 충분히 수고했고, 그러므로 이제는 개운하게 웃어 보일 차례다. 음악이라기보다 차라리 빈틈없이 꽉 안아주는 두 팔에 가까운 것, 크러쉬의 새 앨범이 나왔다.

날염한 듯한 블루종과 스팽글 팬츠는 티슈클럽 밴드, 안에 입은 트렌치코트는 문선 제품. 터틀넥과 벨트, 목걸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화보 촬영 내내 직접 배경음악을 선곡했다. 덕분에 엘리스 레지나(Elis Regina)라는 뮤지션을 알게 됐다. 정말 좋아하는 뮤지션이다. 보사노바, 라틴 재즈 장르의 보컬리스트 중에서 거의 최고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용필 같은 브라질 뮤지션이다.

디제이들이 필살기처럼 아껴두다가 꺼내는 플레이리스트 를 ‘딥 컷’이라고 부르지 않나. 크러쉬에게도 비슷한 플레이리스트가 있을 것 같다. 물론이다. 진짜 ‘덕후’들은 플레이리스트에 제목도 붙인다. 잠깐 휴대폰 좀 보겠다. 마침 이번 앨범에 영향을 많이 준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제목은 ‘Im so picky’라고 적어 놨네. 솔, R&B, 재즈 장르의 곡들로 리스트를 꾸렸는데, 요즘의 트렌디한 음악보다는 이전 시대의 음악이 훨씬 많다. 이 중에서도 로이 하그로브의 ‘Liquid Streets’와 패트리스 루센의 ‘High In Me’를 아끼는 편이다.

플레이리스트에 선더캣도 눈에 띈다. 조지 듀크라고 1970 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약한 프로듀서가 있는데, 선더캣도 조지의 추종자 중 하나였다. 바통을 이어받아서 요즘 세대 솔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선더캣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다.

벽돌색 테일러드 재킷과 팬츠는 벨루티 제품. 줄무늬 터틀넥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난가을 <더블유> 10월호를 준비하며 래퍼 지코를 인터뷰하던 당시에도 선더캣의 음악이 흘렀다. 선더캣처럼 너무 잘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면 같은 뮤지션으로서 괴로워진다던 지코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국내 뮤지션 중에서 지코를 음악적으로 괴롭게 하는 사람이 누가 있냐는 질문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크러쉬를 꼽더라. (크게 웃음) 언제였더라? 지코가 음악을 추천해달라기에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음악 링크를 보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잘 듣겠다고 말하더니 며칠 뒤에는 답장도 안 하더라. 그때 테러하듯 추천한 기억 때문에 한 소리일 거다.

이번엔 크러쉬 차례다. 음악적으로 크러쉬를 괴롭게 만드는 뮤지션은 누구인가? 제이콥 콜리어.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린데, 이 친구도 기가 막히게 잘한다. 퀸시 존스 레이블 소속이고 거의 모든 악기를 본인이 직접 연주한다. 유튜브에 직접 편곡하고 연주한 음악을 올리면서 유명세를 탔는데, 테드 강연처럼 레이백 리듬을 하나하나 분석한 아카데믹한 영상도 이따금 올린다. 보통 음악 하는 사람과 음학(音學) 하는 사람은 분리되어 있기 마련인데 제이콥 콜리어는 전부를 다룰 줄 아는 친구다. 진짜 멋있다. 2018년에 내한 공연을 했는데 아쉽게도 내 공연 때문에 못 갔다.

모피 코트는 챈스챈스, 선글라스는 레이밴 제품.

5년 만에 정규 2집 <From Midnight To Sunrise>가 발매됐다. 브라스, 색소폰, 트럼펫 등의 금관악기까지 동원하며 사운드의 스펙트럼을 눈에 띄게 넓혔다. 2015년 켄드릭 라마가 <To Pimp A Butterfly>를 공개했을 때가 오버랩되더라. 당시 ‘이 사람은 드디어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경지 갔구나’라는 감상이 스치기도 했다. 에이, 나한테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는 표현은 좀 과장 같다(웃음). 이번 앨범에서는 확실히 전자적 요소를 줄이고 어쿠스틱 악기를 많이 사용했다. 드럼, 베이스, 기타, 피아노를 말하는 ‘포 리듬’을 전부 사용한 트랙도 있고, ‘With You’나 ‘Alone’처럼 현악기를 동원한 트랙도 있다. 특히 브라스, 색소폰, 트럼펫, 트롬본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평소 1900년대 중후반 R&B 음악을 좋아하고 영감도 많이 받았지만, 정확히 그 시대를 관통한 사람은 아닌지라 당시의 사운드를 2019년이란 시대에 어울리게 불러오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른바 ‘현대의 맛’을 입히기 위해 정한 룰이 있었나? 진짜 명확하게 있었다. ‘끼 부리지 말자’. 무엇보다 악기에 대한 이해가 명확해야 정통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음악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요소로 사용하는 건 싫었다. 모든 악기의 주법은 기본적으로 익힌 상태에서 작업했다. 그래서 3년을 훌쩍 넘길 정도로 작업이 오래 걸렸나 보다.

컬러 블록 아노락 점퍼와 코튼 팬츠는 프라다 제품.

사운드적 변화 때문인지 몰라도, 오랜만에 봤는데 부쩍 어른이 되어 있는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시종 핫팩 같은 따뜻한 위로를 건네지 않나. 인생은 평소 정박으로 흐르다가도 때로 점프하듯 도약하는 순간이 있다. 크러쉬에게는 지난 5년이 그랬을 것 같다. 여태까지 앞만 보고 달리느라 정작 가까이 있는 사람을 챙기지 못 했다. 늘 주변에 가족, 친구, 스태프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스스로 채찍질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음악만 놓고 보면 확실히 이번 앨범을 ‘간주 점프’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주와 간주 사이에 다양한 음표가 있듯이 지난 5년간 음악적으로 많은 장르를 시도했고, 그사이 세상에 싱글이든 EP로든 결과물을 내놓았다. 물론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지만 이번 앨범에서 시도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봤다.

살을 깎는 듯한 기분이었겠다. 그저께까지는 그랬다. 이틀 먹고 자니까 다시 충전된 것 같다. 이제는 웬만한 스케줄은 힘들지도 않다. 이번 앨범 작업이 너무 힘들었던 터라(웃음). 어제도 공연 끝내고 녹음실에 놀러 갔다.

녹음실에 가는 것도 휴식이 될 수 있나? 그렇지. 완전히 ‘꿀휴식’이지.

그래픽 패턴 셔츠와 코트는 루이 비통 제품.

굳이 작업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충만하게 만드는 시간은 언제인가? 강아지 두유랑 산책하는 시간? 한강에 아끼는 산책로가 있다. 잠원 한강공원에서 반포대교 쪽으로 걷다 보면 축구장이 나오는데 그 옆으로 난 조그마한 산책로에 자주 간다. 또 최근 새벽에 혼자 드라이브를 나갔는데 좋더라. 앨범 발매일까지 미뤄가며 마스터링하던 상황이었는데 마지막으로 1번부터 12번 트랙까지 쭉 들어봐야 했다. 이미 몇만 번은 들은 상태라 도저히 집이나 녹음실에선 들을 수 없었다. 드라이브하면서 듣기로 마음먹고 무작정 차를 몰았다. 집에서 내비게이션도 찍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했는데 거의 일산까지 달렸나 보다. 그날은 왠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지금 굉장히 홀가분해 보인다. 투쟁하듯 만든 앨범이 드디어 발매됐고, 어느덧 20대 끝자락에서 있는 상태다. 지난 날을 돌이키면 어땠나? 생각보다 맷집이 단단했던 것 같다. ‘해야 하니까’라는 심정으로 이 악물고 음악만 해왔는데 그러는 동안 스스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생각을 정립한 듯도 하다. 그러면서 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나 음악 좀 해’를 보여주려는 마음이 앞서서 곡마다 힘을 싣는 게 재밌었고 그러면서 쾌감을 많이 느꼈다. 최근에는 완급을 조절하게 된 것 같다. 들뜨기보다 가라앉은 상태에서 묵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다. 이런 방식이 훨씬 잔향을 짙게 남기는 것 같고.

스스로 좀 대견하지 않나? 나 좀 멋진 것 같다(웃음). 한때 이 세상의 외로움이 전부 내 것이라고 생각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면서 두유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많이 줬다. 단 둘이 있는데 계속 한숨만 쉬니까. 강아지는 냄새만 맡고도 귀신처럼 아는 존재인데 내가 힘들어하면 금방 눈치채겠지. 요즘에는 자주 안아준다. 마냥 사랑해주고. 그리고 거울을 보고 말도 걸게 됐다(웃음). 예전에는 거울을 잘 못 봤거든. 큰 소리로 ‘파이팅’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화려한 프린트 티셔츠와 여유로운 팬츠는 챈스챈스 제품.

뮤지션에게는 저마다 유독 말을 걸어오는 악기가 있다던데, 크러쉬에게도 그런 악기가 있나? 녹음 부스 안에 들어 가면 마이크 앞에 원반처럼 생긴 팝 필터라는 장비가 있다. 걔네가 자꾸 말을 건다. 침 냄새가… 후각이 민감해서인지 녹음하기 전에 항상 양치와 가글을 하는 편이다.

팝 필터(웃음)! 이것 말고도 유독 신체처럼 느껴지는 악기가 있을 것 같다. 있지. 많지. 일렉트릭 피아노 중에서 1960~70년대에 많이 사용한 로즈 계열의 피아노를 좋아한 다. 실제 1971년 출시한 중고 로즈 피아노를 가지고 있다. ‘뻔한 멜로디’라는 곡에도 사용했는데, 한때는 이 피아노에서 나는 소리를 너무 좋아해서 1~2초 분량의 코드만 쳐도 멜로디가 술술 나오곤 했다. 요즘에는 1980년대 야마하에서 나온 DX7이라는 신시사이저를 아낀다. 이번 앨범의 더블 타이틀곡인 ‘With You’와 ‘Alone’에도 사용한 장비다. 종이 울릴 때 나는 소리를 떠올리면 된다. 찌르는가 하면 따뜻하고, 유독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소리다.

이번 앨범의 트랙 리스트를 보면 홍소진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밴드 원더러스트의 멤버이자 키보디스트인 그녀가 이번 앨범의 숨은 일등 공신처럼 느껴진다. 맞다. 연주를 잘하는 걸 떠나서 워낙 음악 취향이 비슷하다. 서로 ‘이런 노래 만들자’라며 작업하기보다 잼을 하면서 즉흥적으로 곡을 만드는 편인데 타이틀곡 ‘With You’도 그렇게 탄생했다. 심지어 소진 누나랑 좀 다퉜다가 화해한 날 나온 노래라 처음에는 친구와 우정에 관한 내용으로 가사를 쓰려 했다(웃음). 벌써 2~3년도 지난 얘기다. 당시 ‘잊을 만하면’과 ‘넌 (none)’이라는 곡을 미국에서 작업하던 시기였다. 누나는 내가 음악에 대한 열정이 사라져 미국에서 놀고먹고 있는 줄 안 거다. 그런데 나는 정말 작업만 했거든. 한국으로 돌아와 두 트랙을 들려주고 극적으로 화해했다.

우정이라니. 현재 ‘With You’의 가사는 두말할 것 없이 사랑에 관한 내용이지 않나. 문득 크러쉬의 연애는 어떤 모양인지 궁금해진다. 사회생활 할 때와 연애할 때의 자아는 보통 다르지 않나? 그런가? 나의 경우 완벽히 일치한다. 여전히 멍청한 것 같고 때로 엉뚱하고. 혼났을 때는 미안하다고 비는 수밖에 없다(웃음).

자수 장식 가죽 재킷과 장갑은 티슈클럽 밴드 제품. 카고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금의 크러쉬가 이루어지도록 이끌어준 사람이 있을까? 친누나가 그렇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늘 응원하고 격려해준다. 때로는 나보다 더 아파하면서까지. 여태까지 누나가 뒤에서 묵묵히 지탱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다가 이번 앨범을 작업하며 많이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늘 곁에서 격려해주고 있더라.

2020년이면 스물아홉을 맞이한다. 해가 바뀌며 새삼스럽게 느끼는 변화가 있나? 술을 마시면 예전 같지 않다는 것 (웃음)? 앨범 작업을 하는 동안 술을 완전히 끊었다가 그저께 달렸는데 금방 필름이 끊기더라. 이제는 술 마신 다음 날 하루를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크러쉬의 지나간 시절에 이름을 붙여준다면?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집 요정 ‘도비’가 생각난다. 늘 자유의 몸이 되고 싶다고 울부짖다가 해리가 도비에게 양말을 주면서 마침내 자유를 얻지 않나. 정규 1집 이후 신곡을 발매할 때마다 음원 사이트에 1집만 못하다는 댓글이 많았다. 이번 앨범을 통해 비로소 그런 반응을 잠식시킨 것 같아서 한편으로 홀가분하다. 지금 아주 개운하다.

패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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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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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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