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개의 결정적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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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을 감듯 2019년을 돌이키자 말들이 입 안에서 굴러다닌다. 그대로 붙잡아 남기지 않으면 결국 뒤엉키고 마는 시간 속에서, 되새김질하고픈 순간만을 남겼다. 올해의 상찬 혹은 난장이 이렇게 정리된다.

‘클라크 부부와 퍼시’. ⓒ David Hockney, Collection Tate, U.K. ⓒTate, London 2019.

‘더 큰 첨벙’. ⓒ David Hockney, Collection Tate, U.K ⓒTate, London 2019.

‘호텔 우물의 경관 III’. ⓒ David Hockney / Tyler Graphics Ltd., Richard Schmidt.

‘호크니 현상’이 일어날 때

올해 미술계는 호크니 덕분에 부쩍 뜨거웠다. 지난 3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국내 첫 회고전 <데이비드 호크니>를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는 35 만 명. 국내 미술 전시를 통틀어 최다 관람 기록이었다. 숫자로 일갈하길 좋아하는 국내 미디어에서는 35만이라는 숫자와 더불어 ‘신드롬’, ‘블록버스터’라는 거창한 수식을 아끼지 않았고, 장맛비와 폭염이 번갈아 들이닥치던 8월에도 폐막을 앞둔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매표소부터 덕수궁 돌담길까지 긴 행렬이 생겼다. 포스터, 컵 등을 판매하는 굿즈 숍도 소위 ‘대박을 쳤다’. 20억에 가까운 막대한 개런티 때문에 무산될 상황까지 치닫던 이번 전시는 기획사의 모험에 가까운 투자 덕분에 극적으로 ‘소생’했다고 전해진다. 20만 명으로 추산한 손익분기점을 훌쩍 웃도는 관람 기록을 낳은 것으로 보아, 기획사에서 ‘올해의 전시’에 걸맞은 ‘올해의 결단력’을 발휘한 셈이다. 색의 배합, 절제된 화풍, 사랑스러운 패션 감각 등등 ‘왜 하필 호크니인가?’에 대한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방대한 레퍼런스와 텍스트를 참조해야 가까스로 소화되는 최근의 현대미술 전시와 <데이비드 호크니>전의 궤가 달랐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눈치다.

스타가 유튜브로 향할 때

꽃게탕 끓이는 강동원, 동묘 벼룩시장에서 15만원을 탕진하는 천우희, 핼러윈 분장하는 한예슬까지, 철저히 ‘미공개’ 영역이던 연예인의 일상을 여과 없이 보게 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2019년은 유독 유튜브에서 톱스타의 모습을 자주 포착한 한 해였다. 유튜브를 통해 팬덤을 확보한 크리에이터가 정통 미디어로 진출하는 것과는 정반대 흐름이다. 일반인 크리에이터의 전유물이던 유튜브에 강동원, 천우희, 한예슬, 신세경 등 톱스타가 우르르 진출하자 ‘생태계 교란자’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완성도가 떨어질지 언정 기획부터 촬영까지 주도적으로 판을 짠다는 데서 친밀감이 생기고, 여기에 올바른 자세를 위한 스트레칭 비법(이소라)이나 홈메이드 요리 비책(신세경)처럼 탄탄한 콘텐츠까지 곁들여지면 조회수가 껑충 뛴다.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이상 대중과 소통할 접점이 없는 연예인에게 유튜브만큼 좋은 창구는 없어 보인다.

온라인 탑골공원이 흥할 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3040 세대가 과거 대중가요를 리플레이하며 추억을 곱씹는 행위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그날 말이다. 크게 보면 유튜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결정적 계기는 방송사가 마련했다. 유튜브가 주요 미디어 플랫폼으로 떠오르면서 방송사들이 잠자고 있던 과거 자료를 대방출한 것이다. <인기가요 20>을 90년대 후반 방송분부터 24시간 논스톱으로 스트리밍하고 있는 ‘SBS KPOP CLASSIC’ 채널은 과거를 즐기는 이들이 각종 ‘드립’을 댓글로 올리며 배회하는 온라인상의 탑골공원이 됐다. 건져 올린 유물 같은 화질과 달리 고화질 영상을 제공하는 KBS의 ‘Again 가요톱10’도 추천할 만하다. 지금보다 파격적이던 ‘세기말 가요’의 다종다양한 콘셉트, 배두나와 전지현과 김민희가 앳된 얼굴로 음악 방송 MC 를 보는 모습, ‘가요계가 대중문화의 헤게모니를 잡았다’는 보도가 언론에 나오던 90년대 중반의 노래와 무대는 기억 저편에 묻어두기 아까운 소재다.

그런데 추억 들추기에 동참하는 세대가 이토록 다양할 줄은 미처 몰랐다. 1020 세대에게는 ‘부모님이 좋아하던 가수’도 음악 스타일이나 무대 면에서 우리가 아는 KPOP의 자장 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시절에 저런 가수가 존재하다니’ 싶어 놀라거나 우스우면 우스운 대로 즐기는 어린 세대도 공원을 드나드는 것이다. KPOP의 창시자 이수만의 첫 작품인 현진영은 이상적인 솔로 아이돌이고, 듀스는 요즘에도 보기 힘든 춤꾼이다. 샤크라와 이정현의 패션은 2010년대의 노라조를 평범하게 만드는 아방가르드함이다. 90년대 초 데뷔한 가수 양준일이 ‘20년 전의 GD’ 칭호를 받으며 별안간 떠오르고, ‘요즘 아이돌 수준에 비하면 옛날이 더 개성 있고 좋았다’ 식의 향수가 자주 발견되는 곳. 이 현대판 탑골공원은 추억, 아카이빙, ‘드립’ 즐기기 등 어느 측면으로 봐도 즐겁다.

봉준호와 <기생충>이 회자될 때

이제 와 하는 말인데, <기생충> 개봉 전인 4월 제작 보고회에서 봉준호의 표정은 잠시 이상했다. 칸 영화제에서의 수상 가능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봉준호는 ‘(워낙 쟁쟁한 감독의 작품이 많아)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기대가 전혀 없다면 긴장되는 일도 없을 텐데, 그때 그의 얼굴은 유독 굳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해석하자면 그건 ‘나도 모르게 기대되니까 진정하려는’ 긴장감은 아니었을까? 누군가 ‘칸에 좀 더 오래 머물라’고 사인을 주진 않았을까? 어쨌거나, 영화가 잘 됐으니 이런 말도 해본다.

<기생충>이 칸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후의 흐름도 재밌다. 가을에 접어들자 유력 외신들이 2020년 아카데미 후보 리스트를 점치고 있는데, 여러 곳에서 <기생충>을 언급한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후보로, <인디와이어>는 감독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예상했고, <포춘>지는 작품상이 유력한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야 하지만, 아카데미의 성향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식의 목소리가 메이저 언론에 나오는 식이다. 박소담과 최우식이 ‘독도는 우리 땅’ 멜로디에 맞춰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 과선배는 김진모 그는 니 사촌’이라고 암기하는 대목은 ‘Jessica, Only child, Illinois, Chicago’ 라는 영어 자막으로 이 영화를 본 북미 관객들 사이에서 ‘밈’이 되어 SNS에 번지고 있다. ‘방금 유전자 검사를 받았는데 나는 100%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래’, ‘아카데미 주제가상은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가 받아야 한다’ 같은 멘트 등, 맥락 없는 재미를 추구하는 밈의 속성상 ‘기승전제시카외동딸…’ 식의 개그가 속출하는 중이다. 이것이 우주의 기운일까? 봉준호가 그 이름값을 더욱 증명한 올해, 영구 미제로 남을 것만 같았던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도 잡히면서 <살인의 추억>이 또 한 번 소환됐다. 여러모로 봉준호의 해다.

|올해의 부활 | 곽철용

곽철용, 그는 누구인가. 17세부터 건달 생활을 시작해 경쟁자들 다 제쳐버리고 살아남은 입지전적 인물인 그는 영화 <타짜>에서 배우 김응수가 맡은 역할 이름이다. 아귀나 짝귀 캐릭터에 비하면 존재감이 없던 곽철용이 2019년 인터넷에 난데없이 소환됐다. 명확한 이유를 알긴 힘들다. 최초에는 유병재가 개그맨들을 불러 모아 ‘제1회 타짜 덕력 시험평가’라는 제 목으로 만든 콘텐츠가 있었다. 그리고 개그맨 이진호가 여러 자리에서 꿋꿋하게 곽철용 성대 모사를 한 점, <타짜: 원 아이드 잭> 개봉을 앞두고 1편에 대한 언급이 늘어난 점, 1편 개봉 시엔 존재하지 않았던 유튜브 문화를 통해 ‘곽철용 대사 모음’ 같은 스낵 콘텐츠와 밈이 퍼져 나간 점 등이 맞물렸다. 곽철용 르네상스는 콘텐츠 생산도, 소비도, 발굴도, 대중 스스로 하면서 유행을 낳는 풍경 중 하나다.

축구가 불을 지필 때

뛰어난 운동 선수에게는 커리어의 정점이 될 만한, 포텐셜이 집중적으로 터지는 시기가 있다. 지난해부터의 손흥민이 바로 그런 흐름을 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손흥민은 독일 분데스리가를 거쳐 2015년부터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의 공격수로 뛰고 있다. 최근 경기 중 상대 선수에게 백 태클을 걸면서 충격적인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월드컵 같은 국가 대항전 때가 아니면 ‘국뽕’이 차오를 일 없는 한국에서 손흥민 덕에 축구가 입에 오르내린다. 한편 5월부터 6월에 걸쳐 열린 20세 이하 청소년 축구 대회, FIFA U20 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이 준우승할 정도로 활약했다. 스포츠에 꾸준히 애정을 가진 <더블유>는 11월호에 런던에서 손흥민과, 8월호에는 U20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 8명과 화보를 촬영하며 이들을 기념했다. 손흥민의 화보는 지금껏 그가 보여준 모습 중 가장 패셔너블하다. 6월부터 한 달간은 FIFA 여자 월드 컵도 열렸다. 첼시 FC레이디스 소속인 지소연을 포함한 대한민국 팀은 저조한 성적으로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축구의 열기가 릴레이처럼 이어진 올해다.

대한민국이 마라와 흑당에 중독될 때

‘마라에 미친 대한민국’과 ‘흑당민국’은 올해 한국인의 입맛을 가장 짧고 굵게 요약하는 문구가 되었다. ‘마라로 끼니를 때우고, 흑당 디저트로 혀를 달랜다’는 말이 유행처럼 퍼진 것으로 보아 영원불멸의 ‘단짝’ 법칙도 극한 매운맛을 극한 단맛으로 치유하는 새로운 방법론 앞에선 무용지물이 된 듯하다. 한때 벌집 아이스크림과 대만 카스텔라가 그린 유행의 상승, 하강 곡선에서 알 수 있듯 국 내에서는 음식이 패션처럼 유행을 타며 소비되는 경향이 있지만, 마라와 흑당의 경우 숱한 파생 상품이 폭죽 터지듯 잇따라 출시된 것으로 보아 단발성 유행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다만 자극의 끝을 달리는 두 제품이 유행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을지에 대해 생각하면 뒷맛이 씁쓸해지기도 한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인장을 새길 때

건조하게 데이터를 말하자면, 공효진이 출연하는 드라마는 망하지 않는다. 망한다는 건 스타 투입이나 기대 여부에 비해 결과가 저조할 때도 쓸 수 있는 말인데, 공효진이 택하는 드라마는 시청률이든 작품성 면에서든 늘 보통 이상은 해냈다. 영화계의 이병헌 감독이 연출한 JTBC <멜로가 체질>, 웹툰 원작인 tvN <쌉니다 천리마 마트>나 OCN <타인은 지옥이다> 등이 독특한 인상을 남긴 가운데, KBS <동백꽃 필 무렵>을 ‘올해의 드라마’로 부르는 데 주저함은 없다. 주변부의 삶을 포착하는 임상춘 작가의 대본, 캐릭터들의 매력, 그 매력을 만들어낸 배우들의 힘이 모두 좋았다. 어딘가 주눅이 든 연기의 달인인 공효진은 ‘눈총받는 미혼모’ 캐릭터를 만나면서 로맨틱 코미디물에서와는 다른 순간을 만들어냈다. 평생 칭찬받은 적이 없는데 그런 걸 받으니 마음이 울렁거린다고 칭찬하지 말라면서 울 때, 박복한 팔자를 입에 올리면서도 힘차게 두루치기를 만들며 살 때. 그런 동백이 캐릭터에게서 신파 감성을 덜어낼 수 있었던 건 담백하게 연기하는 공효진의 재주 때문일 것이다. 치매에 걸린 것처럼 나타났다가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게 아니라 바늘 보이면 바늘 훔치고, 소 보이면 소 훔치고 그게 도둑 본성이야”라고 홀연히 아포리즘을 남기는 동백이 엄마(이정은)의 대사와 더불어 홍자영 변호사(염혜 란)의 대사가 귓가에 울린다. 향미랑 안 잤으니 바람피운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남편을 향해, “안 잔 게 유세니? 똥 싸다 말았으면 안 싼 거야?”

<82년생 김지영>이 강인한 운명을 증명할 때

영화도 사람처럼 운명을 타고나는 게 아닐까? 운명의 큰 줄기는 정해져 있고, 노력은 약간의 속도 조절과 방향 수정에만 관여한다는 운명론.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도 운명론을 떠올렸다. 수많은 악플과 평점 테러를 이겨내고 꿋꿋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으니 말이다. 페미니즘 소설로 명명된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했을 때부터 영화는 곱지 않은 시선을 마주했다. 20189 월 김지영 역에 배우 정유미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배우와 영화를 품평하고 비하하는 글이 인터넷에 줄줄이 올라왔다. 곧이어 영화화 반대를 촉구하는 청와대 청원도 이어졌다. 영화 개봉을 한 달 앞두고는 평점 테러도 일어났다. 1점대와 9점대로 남녀 성별 만족도 지수가 극과 극을 이루는 상황. 영화를 부정하려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에 앞서 이 영화는 정말 성 대결을 부 추기는 편향된 논점을 지녔을까. 아무리 삐딱하게 보아도 <82년생 김지영> 은 문제적 주제를 도발적으로 그린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영화는 1982년생 김지영이 출산과 육아로 경력 단절을 겪고, 사회적 차별과 편견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이야기를 그린다. 많은 여성이 김지영의 서사를 어렵지 않게 자신들의 이야기로 치환했고, 영화는 개봉 8일째 가뿐히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가장 보통의 김지영은 페미니즘 논쟁의 상징적 캐릭터가 되었다. 더불어 여성 서사의 영화와 여성 감독의 활약이 두드러진 올해 한국 영화계 에서 <82년생 김지영>은 그 대미를 장식한 작품이 됐다. 이 영화가 강인한 운명을 타고난 게 분명해 보인다. 글 | 이주현(<씨네21>기자)

오디션 프로그램이 경찰 조사를 받을 때

Mnet의 <프로듀스 X 101>이 종영한 직후인 한여름, 투표 조작을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참가자별로 득표수 현황을 보여주는 긴 숫자의 나열 속에서 반복되는 숫자 조합이 있다는 게 근거였다. 경찰이 조사에 들어갔다. 안준영 피디는 2016년부터 시작한 이 서바이벌 오디션 시리즈(아이오아이와 워너원을 낳은 <프로듀스 101> 시즌 12, <프로듀스 48>, <프로듀스 X 101>)의 연출자다. 일부 팬들 사이에서 모함이니 헛소문이니 하는 코웃음이 번져가던 어느 날, 경찰 조사를 받은 안준영 피디가 작년과 올해 방송에서 결과를 조작한 혐의를 인정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바로 그 며칠 후인11 11일로 잡혀 있던 아이즈원의 컴백 쇼케이스는 취소됐다. 지난 시즌이 낳은 아이즈원과 올해 탄생한 엑스원의 팬덤은 절망과 혼란으로 들끓는 상태다. 아이돌 당사자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 손으로 아이돌 그룹 결성에 일조했다고 느낀 ‘국민 프로듀서님들’은 뭘 한 걸까? 팬들은 어디에 어떻게 남아야 하나? 지켜볼 상황이 많은 가운데, 기획사 관계자며 아직 경찰 조사를 받을 인물도 많이 남았다. 저 혼자 호의호식하고 마는 사기꾼이란 없다. 거짓과 조작이 있으면, 누군가는 눈물짓는 일이 생긴다. 이 사건이 드리운 그림자의 범위가 넓다.

| 올해의 발견 | 송가인

7년간 무명 생활을 보냈다. 무대에서 착용할 소품을 직접 제작하며 월세도 마련할 겸 비녀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TV조선 <미스트롯>이 의외의 흥행을 거두며 발견된 트로트 가수 송가인은 어느 누구와 있어도 압도적인 가창력을 보여준다. 트로트의 핵심은 ‘꺾기’인 바, 송가인은 간드러진 타입이 아니라 대차고 터프한 꺾기를 구사한다. 시원한 발성과 쇳소리가 돋보이는 창법은 국악 전공자의 트로트가 어떤 결과를 내는가의 훌륭한 예시다. 장윤정의 ‘어머나’와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 같은 자기 히트곡이 없는데도 전국에서 그 난리다.

도슨트가 전성시대를 맞을 때

불확실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빠르고 간편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원한다. 꽤 믿을 만한 사람이 기승전결을 겸비한 이야기꾼이라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팟캐스트와 베스트 셀러의 이름인 ‘지대넓얕’에서 시작해 tvN <알쓸신잡>으로 이어진 열풍, JTBC <차이나는 클라스>나 tvN <요즘책방: 책 읽어드립니다> 같은 프로그램이 얻는 지지를 보라. 이제 미술 전시 현장에서도 이런 모습을 자주 마주하게 됐다. 말하자면,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전시를 만드는 사람(큐레이터)보다 전시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슨트)이 더 주목받고 있다. 큐레이터가 전시 전반을 지휘하는 사 람이라면, 도슨트는 그 결과물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이다. ‘도슨트계의 유노윤호’라는 언론의 호칭을 얻으며 남다른 시급과 경쟁력을 자랑하는 도슨트도 생겨났다. 마냥 어려운 것 같은 미술도 탁월한 이야기꾼인 인기 도슨트와 함께라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하다. 하지만 미술 작품과 전시가 기승전결을 갖춘 감동적 이야기로 간단히 정리되는 건 어딘가 수상하지 않은가? 위대한 예술이 안겨주는 감동이란 마냥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 당장 이해가 가진 않지만 종종 다시 생각하게 되는 어떤 것에서 비롯한다. 그럼에도 예술의 속성과 상관없이 이 복잡한 세계에서 아리송한 예술을 명쾌한 서사로 정리해주는 전업 도슨트는 당분간 전성기를 이어갈 분위기다. 글|박재용(큐레이터, 통번역가)

사람이 영화가 될 때

10번째 영화와 함께 은퇴하리라 선언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마지막 작품을 감상하기도 전에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다. 사무엘 잭슨을 비롯 해 ‘쿠엔틴 타란티노 사단’이라 불리는 배우들이 총출동한 영화 <쿠엔틴 타란티노8>이 그것이다. 올해는 유달리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잇따라 극장가를 장식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국내 첫 회고전의 인기에 힘입어 지난 8월 영화 <호크니>가 개봉해 숱한 관람객을 불러모았고, 같은 달 건축가 이 타미 준을 목도한 이들의 목소리를 모은 영화 <이타미준의 바다>가 극장에 걸렸다. 다가오는 12월에는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영화 <샐린저>가 개봉 한다. 확실히 빈틈없는 취재와 광범위한 영상 자료로 꽉꽉 채운 다큐멘터리 영화는 으레 봐온 극영화와는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특히 등장인물의 측근이 아니고서야 내뱉기 힘든 ‘앞담화’에 가까운 증언을 들을 때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쿠엔틴 타란티노8>에서 배우 스티브 부세미가 타란티노와의 작업을 회상하며 내뱉은 말처럼 말이다. “쿠엔틴은 150살까지는 살아야 자신이 원하는 걸 다 이룰 작자예요!”

베스트셀러가 위로에서 벗어날 때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유의 책은 여전히 잘 팔린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무엇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기 위한 키워드가 꼭 위로와 치유일 필요가 있는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콤비 작가의 탄생을 알린 화제작이었다. <더블유> 피처 에디터 출신 황선우와 팟캐스트 진행자 김하나의 다부지고 정연한 입담,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이라는 발상이 일으킨 신선한 파장은 새로운 베스트셀러의 자격 요건을 알리는 듯하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가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는 건 흥미롭다. 소설가의 유려한 필체로 보는 일반적인 기행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쓸신잡> 이전의 김영하가 낸 똑같은 책이라면 과연 반응이 어땠을까 싶지만, 여행이라는 행위의 통찰에 가까운 이 고차원의 여행 에세이를 찾는 이가 많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올해의 문제적 명사, ‘90년생’. 1982년생 강연가가 쓴 <90년생이 온다>는 지난해 11월 출간 됐다. 원래도 판매율이 좋았지만, 8월 중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전 직원에게 선물한 것이 알려지며 큰 이슈가 됐다. ‘X세대’라는 말에는 문화적 동류 의식이, ‘88만원 세대’에는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시장이라는 맥락이 있다. 배경도 성격도 사정도 다른 개개인을 ‘90년대생’이라고 퉁쳐도 되는 걸까? ‘요즘 것들’을 파헤치는 수준으로 기술한 이 책의 정보대로라면, 적어도 90년대생과 밀접하게 얽힐 일이 있는 세대는 이 책을 가볍게 읽어볼 만하다. ‘불확실성이 더 높아진 세대’라는 면에서 90년대생을 ‘신 X세대’라고 명명하는 건 어떨까?

아이폰과 갤럭시가 맞대결을 펼칠 때

올해 삼성전자 스마트폰 전략의 중심에는 ‘5세대 이동통신’이 있었다. 세계 최초로 5G를 상용화하려고 했던 국내 이동통신사들의 뜨거운 경쟁 심리가 맞물리면서 5G 갤럭시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5G 서비스가 원활하지 않으면서 아직은 새로운 통신망이 시기상조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사실 갤럭시를 통해 눈여겨볼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스마트폰의 화면 크기다. 이제까지 갤럭시 노트 시리즈의 차별점은 큰 화면에 있었는데, 올해 갤럭시 S10과 갤럭시 노트10은 똑같이 6.3인치, 6.7인치 두 가지 화면 크기로 발표됐다. 화면 크기에는 차이가 없고, 대신 두 제품의 차이를 펜의 사용자 경험으로 나눈 것이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의 적절한 화면 크기는 최소 6.3인치, 최대 6.7인 치라고 해석한 셈이다. 반면 애플은 2019년 아이폰의 중심을 ‘카메라’에 두었 다. 아이폰11은 올봄부터 소문으로 돌던 트리플 카메라를 달고 나왔다. 기존 1, 2개 카메라에 광각 카메라를 더해 최대 3개 카메라를 내장한 것이다. 스마트폰이 ‘똑딱이 디카’ 자리를 대신하면서 사진에 대한 기대가 커졌고, ‘아이포노그래피’라는 말을 만들어낸 애플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특히 아 이폰 11의 빠른 프로세서와 인공지능 기술은 사진의 결과물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쨌든 새 아이폰은 이미지에 컴퓨팅을 더한 ‘컴퓨테이셔널 포토’라는 말이 실감 나는 사진들을 만들어내면서 ‘인덕션’이라고 불린 디자인에 대한 불평을 단숨에 뒤집어놓았다. 글 | 최호섭(IT 칼럼니스트)

| 올해의 직업 | 프로파일러

이수정은 경찰이 아닌 대학교에 적을 둔 범죄 심리학자다. 프로파일러와 범죄심리학자는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되, 직군이 다를 뿐이라고. 그녀는 실제 범죄 수사에 투입될 때 외에도 다양한 미디어 창구를 통해 의견을 내고, 정보와 지식을 공유한다. 범죄, 안전, 처벌에 관한 문제는 사회적 합의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 전문가의 행보다. 여성 단체와 함께 스토킹 방지법을 안착시키기 위한 노력도 한다. 잔인한 살인 사건과 오래 묵은 연쇄 살인 사건이 연달아 주목받은 올해, 이수정의 존재를 지울 수 없다. 10월, 영국 BBC는 어떻게 알고 이수정을 ‘영향력 있는 100인의 여성’에 선정했을까?

음악계에도 뉴트로 바람이 불 때

‘뉴’와 ‘레트로’라는 상반된 뜻이 만난 ‘뉴트로’는 기만적인 모양과는 달리 2019년 음악계를 대표하는 단어다. 21세기의 한가운데 느긋하게 자리 잡은 이 팔자 좋은 뉴트로풍 음악들은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복고 유행과는 사뭇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좀 더 젊고, 가벼웠으며,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닌 지금과 호흡하는 트렌디함을 중시했다. 이런 흐름의 대표적인 음악가를 꼽자면 역시 기린일 것이다. ‘뉴트로’라는 말이 존재하지도 않던 2010년대 초반부터 오로지 뉴 잭 스윙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는 이제 시대의 부름에 힘입어 10팀이 넘는 가수, 프로듀서, DJ, Bgirl 팀을 보유하고 있는 레이블 에잇볼타운(8ball Town)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은 떠오르는 슈퍼 키드 박문치다. 2017년 뉴 잭 스윙 스타일의 싱글 앨범 <울희액이>를 시작으로 1980년대와 90년대를 관통하는 레트로 정서를 자신만의 개성으로 풀어낸 그의 상큼한 발걸음은 1세대 걸그룹을 연상시키는 4인조 걸그룹 치스비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확고한 음악 세계로 레트로와 정면 승부를 나누는 음악가들의 선전에 세월을 앞서간 숨겨진 명곡과 신진 음악가의 감각적인 만남을 꾀하는 ‘온스테이지 디깅클럽서울’ 프로젝트, ‘온라인 탑골공원’ 이라는 별명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유튜브 채널까지, 이 모든 것이 거스를 수 없는 뉴트로의 거대한 물결 한가운데였다. 글 |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박막례 할머니가 유튜브 CEO와 구글 CEO를 만날 때

지난해 그녀가 구글의 개발자 콘퍼런스인 I/O에 초대 받았을 때만 해도 유튜버로서 일가를 이뤘다 생각했다. 올해 4월, 박막례는 한국을 찾은 유튜브 CEO인 수잔 보이치키를 만나 <박막례 쇼>라는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리고 올해 낸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에서 그 순간을 ‘유튜브 하면서 연예인 많이 봤지만 권상우 이후로 이렇게 떨린 적은 없었던’ 때라고 표현했다. 5월, 또 다시 I/O 참가를 위해 구글 본사로 간 박막례는 구글 CEO 순다르 피차이를 만났다. 예정에 없던 일인데, 갑자기 구글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숨을 고르며 말했다고 한다. “순다가 당신들(박막례와 손녀 김유라 PD)을 만나고 싶대요!” 박막례는 약 90만 명의 구독자가 좋아하고 응원하는 대상이자, 유튜브와 구글의 CEO 가 만나고 싶어하는 스타로 등극했다. ‘박막례 할머니 Korea Grandma’ 채널의 박막례는 여행, 패러디, 요리, 커버 메이크업, 인터뷰 등등 하고 싶은 걸 다 한다. 대수로울 것 없는 행위와 도전도 1947년생의 것이라는 데서 남다른 의미와 맥락이 생겨난다. 박막례에게 끝은 어딜까?

톰 요크가 주술을 부릴 때

톰 요크에게 2019년은 마침내 모든 것을 ‘게워낸’ 한 해에 가까웠을 것 이다.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오의 끈질긴 구애 끝에 성사된 첫 영화 음악 작업 <서스페리아>는 톰 요크의 말처럼 “소리만으로 사람의 정신을 교란시키고 몸도 병들게 하는” 기묘한 앨범임은 물론 음악감독으로서의 톰 요크를 재발견하게 만드는 특별한 디스코그래피였다. 칼 구스타프 융의 원형 이론의 핵심 개념인 ‘아니마’를 타이틀로 내건 솔로 3집 <ANIMA>가 곧이어 발매됐고, 영화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과 제작한 동명의 단편영화를 넷플릭스에 공개하며 꽤나 요란스러운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다. 말로 나열하기 숨찬 올해의 행보 가운데 국내 팬들에게 가장 큰 반가움을 안긴 소식은 단연 지난 727일 올림픽홀에서 펼친 내한 공연 ‘Tomorrows Modern Boxes 2019 Live in Seoul’이었다. 편향과 편애를 보태 말하자면, 이날의 공연은 올해 서울에서 열린 크고 작은 공연 가운데 가장 ‘농도가 짙었다’. 스산한 사운드에 맞춰 사지를 분방하게 흔들며 추는 ‘오징어 춤’도 이날 어김없이 무대에서 펼쳐 졌는데, 음악에 맞춰 기묘하게 몸을 움직이는 톰 요크를 보고 있자면 태곳적 음악은 제의를 지낼 때 주술사가 사용하던 하나의 장치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한낱 무대를 어딘가 불길하고 기묘한 일이 펼쳐질 것만 같은 제의의 현장으로 둔갑시키는 재주는 아무래도 톰 요크 의 전매특허 같다.

독립영화 <벌새>가 13만 관객을 돌파할 때

2000년대 이후 ‘대박’이 난 한국 독립영화를 떠올 려보자. KOBIS(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의 집계에 따르면 2014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약 480만, 2008년 <워낭소리>가 293만,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165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역대 순위 리스트와 비교하면 약소해 보이지만, 8월 말 개봉한 <벌새>는 손익분기점을 훌쩍 뛰어넘은 것은 물론 해외 영화제에서 수집에 가까운 모양새로 수상하며 ‘벌새 현상’을 낳았다. ‘N회차 관람’이라는 반복 관람, 그리고 ’벌새단’이라는 팬덤의 힘도 컸다. 1990년대 중반, 중학생 소녀 은희의 삶을 담은 <벌새>가 소수 관람객의 보석 같은 영화로 근근이 회자되기보다 ‘한국 독립영화의 쾌거’ 같은 수사를 얻으며 화제가 된 점에는 다소 의외의 기분도 든다. 잘 만든, 의미 있는 독립영화가 관객과 평단의 지지를 골고루 받으며 신드롬까지 일으키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벌새>의 러닝타임이 무려 138분인 데다 기승전결에 따라 뚜렷한 사건이 있는 서사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결국 <벌새>가 이룬 성취를 놓고서 ‘보편의 정서’가 가진 힘을 곱씹게 된다. 오롯이 사춘기 여학생의 시선을 따라가며 거기에 한 시대상을 직조한 이야기, 극적인 사건을 좇지는 않지만 그 시절에 느꼈을 기분과 공기를 담아낸 연출. 미숙하고 작은 존재로서 세상을 알아가야 했던 ‘나’와 ‘은희’가 오버랩되게 만드는 작품의 힘 말이다.

커피를 줄 서서 마실 때

기껏해야 카페라고 생각했지만 파급력은 남달랐다. 5월 국내에 상륙한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의 이야기다. 여러 입이 모인 자리 에서 블루보틀을 화제로 꺼내면, 우스갯소리로 교회만큼 카페가 많은 대한민국에서 한낱 카페의 오픈 소식이 지나치게 호들갑처럼 다뤄진다고 보는 입장과 오픈 초 커피를 마시기 위해 전날 밤부터 줄을 섰다는 입장이 동시에 펼쳐진다. 그러나 1호점이 개점할 당시 12천 명이 대기열에 몸을 싣고, 이후 블루보틀 대기 현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bluebottle.game)까지 생긴 것으로 보아 단순히 호들갑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블루보틀에 열광했다. 일반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 비해 길면 3배에 가까운 시간을 인내하며 이곳의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다름 아닌 ‘맛’ 때문일 터다. 블루보틀이 강박처럼 고수하는 철칙은 ‘로스팅한 지 48시간 이내의 원두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커피를 홀짝였을 때 신선한 과실 향을 느꼈다면 이 철칙 덕분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매장을 정처 없이 맴돌고 있으면 “원두 설명해드릴까요?”라고 곰살맞게 물어오는 직원이 곳곳에서 대기 중이고, ‘슬로 커피’를 지향하는 이곳에서 커피를 소비하며 성숙한 커피 문화에 동참한다는 생각이 포개져 ‘신드롬’에 가까운 현상을 빚지 않았을까? 머지않아 스타벅스가 자리한 상권을 가리키는 ‘스세권’이 아닌 ‘블세권’을 따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 올해의 입담 | <괴릴라 데이트>의 이용진&이진호

유튜브와 네이버 TV로 볼 수 있는 tvN 웹 예능 <괴릴라 데이트>는 ‘괴이한 스타를 모시고 푸대접하는 토크쇼’ 콘셉트다. 사실 게스트가 아니라 진행자인 개그맨 이용진과 이진호의 질문과 진행 방식이 어디로 튈지 몰라 괴이하다. 비와이에게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머리카락은 매직으로 그린 거냐’라고 묻거나, 웬만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조세호를 두고 ‘혹시 성욕은 어떻게 해결하시냐’고 한다. 재간 있는 예능인끼리 약속된 판에서 토크를 펼친다는 게 보이기에 언짢은 느낌은 아직 없다. <코미디 빅리그>를 통해 내공을 쌓은 콤비의 궁합, 농담과 진담의 경계를 허무는 토크 스타일, 빠른 호흡 등이 매력이다. 이들 덕 에 tvN D ENT 채널 구독자 수가 비약적으로 늘면서 두 사람은 채널을 독립시켜달라고 부르짖는 중.

<워크맨>과 <와썹맨>이 예능의 강자가 될 때

올해 가장 화제를 모은 킬러 콘텐츠를 꼽는다면 열에 아홉은 JTBC 웹 예능 <워크맨>과 <와썹맨>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아나운서 장성규가 출연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체험하는 <워크맨>, 가수 박준형의 ‘핫 플레이스’ 탐방기를 담은 <와썹맨>을 탄생시킨 ‘스튜디오 룰루랄라’의 김학준 CP를 만났다.

<워크맨>과 <와썹맨>이 흥행하면서 프로그램의 성공을 전략적으로 분석하는 글이 쏟아져 나왔다. 많은 이들이 캐스팅을 ‘신의 한 수’로 꼽는 눈치다. 유튜브 플랫폼에서 소위 잘되는 콘텐츠는 대개 1인 미디어 형태다. <워크맨>과 <와썹맨>도 한 사람이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원맨쇼’나 다름없기 때문에 출연자를 섭외할 때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이상 한 사람이 가진 끼를 100% 알 수 없는지라, 박준형과 장성규를 섭외할 때는 믿고 투자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2 회, 3회를 겪어 나가면서 그들의 캐릭터를 더 펌프질할 수 있는 구성을 마련할 따름이었지. 물론 두 사람 모두 너무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고 있다. 박준형은 원체 즐길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고, 장성규는 굉장히 스마트한 친구다. 센스가 워낙 좋아 서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번다’는 너무나도 간단한 기획을 재치 있게 풀어준 것 같다.

정통 미디어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은어가 자막에 등장한다. 제작진 대부분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친근한 밀레니얼 세대인가? 오히려 꼰대가 많다(웃음). 지금은 13명이 팀을 이루고 있는데 과반이 30대다. 사람들이 밀레니얼 세대를 어떤 식으로 분석해서 공략했는지 묻는데,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인 것 같다. 우리는 단지 그들에게 적절하게 물음표를 던질 뿐이다. “이런 것도 혹시 좋아하니?”라고. 영화 <컨택트>에서 지구인이 외계인의 언어를 배우려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가. 우리도 그와 흡사하게 밀레니얼 세대와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도 뒤적이고, 회의에서 요즘 친구들은 무엇을 소비하는지 의견을 나누기도 하면서.

재치 있는 편집을 두고 소위 ‘약 빨았다’고들 하던데. 편집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이는 것 같다. 에피소드 한 편을 편집하는 데만 꼬박 4일이 걸릴 정도니까. 편집이 끝나면 소재를 찾아 현장에 답사를 간다. 초반 답사가 굉장히 중요하다. 막상 10~20 대가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장소에 찾아가도 다양한 재미를 보여주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버리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답사 과정에서 배제된 아르바이트가 있었나? 주유소 에피소드를 촬영하려고 했는데 요즘 셀프 주유소가 많이 생겼더라(웃음). 과거에는 젊은 친구들이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경우가 많았고, 세차하고 나오면 마른 수건으로 차를 일일이 닦아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구식일지라도 옛 감수성을 간직한 주유소와 테이크아웃 커피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는 신식 주유소가 교차되어 있는 곳을 계속 찾고 있다.

<워크맨>을 비롯해 tvN <일로 만난 사이>, <스페인 하숙> 등은 종일 출연진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올해 예능의 ‘치트키’는 아무래도 ‘노동’이었던 것 같다.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요즘 젊은 세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취업만큼 젊은 세대에게 소구하는 콘텐츠가 없는 것 같다. <워크맨>의 경우 아르바이트생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사이다’ 같은 발언을 장성규가 툭툭 내뱉으며 재미가 실린 것 같다. 우리라도 대리만족을 시켜줘야지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대충 일하진 않는다. 6시간을 꼬박 채워 일하고, 늘 진정성 있게 임하자는 것이 철칙이다.

어찌 보면 유튜브에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셈인데, 자체적으로 플랫폼을 개발할 생각은 없는가? 물론 유튜브 조회수에서 발생하는 수익성만 바라보고 이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튜디오 룰루랄라의 미래 과제인 셈인데,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듯이 우리의 IP(지적재산권)를 각종 OTT 시장에 판매해 팬덤을 확보한 후 플랫폼 개발에 집중할 계획이다.

스튜디오 룰루랄라의 색깔을 정의한다면? 맞춤 정장 전문점. 정통 미디어는 반보 앞선 미래 지향적인 콘텐츠를 다루지만, 우리는 트렌드를 주도하지 않는다. 지금 트렌드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콘텐츠를 만들 뿐이다. 철저히 ‘을’의 입장 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재단해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인 것 같다.

카카오가 몸집을 불릴 때

음악과 영상 콘텐츠 사업을 하는 카카오M은 로엔엔터와 서울음반 등이 전신으로, 복잡한 인수 합병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역사가 있다. 스타쉽엔터를 비롯한 다른 회사들을 흡수하며 영역을 넓혀온 카카오M의 올해 행보는 정말이지 놀랍다. 연초부터 BH엔터, 매니지먼트 숲, 제이와이드컴퍼니 등을 인수했다고 발표하더니, 여름께 박서준이 속한 어썸이엔티와 현빈이 주축인 VAST 엔터 인수를 마쳤다. 사나이 픽처스와 월광 등의 영화 제작사,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이 설립한 회사도 흡수했다. KPOP에 관한 콘텐츠를 만드는 뉴미디어 브랜드 1theK는 오래전부터 카카오M의 품에 있다. CJ E&M 같은 또 하나의 왕국이 탄생하는 걸까? 마침 올해 선임된 대표가 CJ E&M 출신이다. ‘종합 콘텐츠 플랫폼’을 꿈꾸는 대기업의 기세에 지각이 어떤 꼴로 바뀔지 지켜볼 만하다.

로드 엔진의 범블비 에디션.

전동 킥보드가 도시를 활보할 때

부쩍 전동 킥보드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이 보이 더니 급기야 ‘킥고잉’, ‘씽씽’ 등에 이르는 공유 킥보드가 공유 자전거인 따릉이와 더불어 거리를 점령하며 나섰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개인용 스마트 모빌리티의 시대가 기어코 도래한 것이다. 확실히 미팅 장소에 전동 킥보드를 타고 등장하는 사람을 보면 ‘쿨한 도시인의 라이프스타일은 이런 모습이지’라는 생각이 스친다. 과거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이 세그웨이를 타며 출퇴근한다는 사실만으로 화제를 모았다면, 이제는 그런 풍경이 일상의 한 조각처럼 느껴질 정도로 개인용 스마트 모빌리티가 널리 상용화됐다. 실제 전동 킥보드 시장은 몸집을 빠르게 키우는 중이다. 2015년 시장 규모가 약 4000억원에 그쳤지만 2030년에는 26조원으로 껑충 뛸 전망이다. 아직 전동 킥보드 주행에 관련한 법규가 미비하다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한동안 그 인기를 막을 방도가 달리 있을까?

| 올해의 독립 | 장성규

장성규가 JTBC 아나운서로 자신을 소개하던 시절을 기억한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정장과 신뢰감을 상징하는 듯한 뿔테 안경으로 아나운서에게 기대하는 어떤 조건은 갖췄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방언’만큼은 거침이 없었다. <아는 형님>에서 김영철이 그를 향해 “<뉴스룸>은 포기한 거지?”라는 농을 던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수기로 적은 사직서가 등장했다. 이후의 행보는 구태여 여기 적지 않아도 모두가 알 것이다. <방구석 1열>, <호구의 차트>로 몸풀기에 들어가 더니 <워크맨>으로 깊숙한 ‘훅’을 꽂았다. 물론 그사이 타임라인에 카스와의 계약 논란과 패대기 시구 사건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그의 화제성을 방증하는 해프닝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올해 브라운관 안팎에서 활약한 사람으로 다른 이름을 떠올릴 여지가 있을까?

퀴어 문학이 진일보할 때

문학을 조금 아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2018년과 2019년은 퀴어 문학이라는 키워드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1900년대 초반부터 한국 문학 속에 퀴어는 존재해왔지만, 2018년은 특히 퀴어 문학은 문학계의 자장 안에서 여러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외연을 확장시키는 한 해였다. 일단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출판계에서 소소한 파란을 일으킨 <그 해 여름 손님>을 필두로 맨부커 상을 수상한 <아름다움의 선> 등 여러 퀴어 문학이 번역되었으며, <커스터머>의 이종산, <여름, 스피드> 의 김봉곤 등이 커밍아웃하며 당사자성을 주축으로 하는 퀴어 문학의 도래를 알렸다. 이에 퀴어 문학 전문 출판사인 큐큐에서는 국내 최초로 현역으로 활동하는 소설가들을 주축으로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라는 퀴어 앤솔로지를 내놓기도 했다.

2019년도 이런 기조를 이어받아 여러 퀴어 소설이 출간되었다. 황정은의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과 김세희의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 박상영의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윤이형의 소설집 <작은 마음 동호회>와 박서련의 장편소설 <마르타의 일> 등이 출간되어 독자들과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큐큐출판사는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의 성공을 기반으로 후속작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직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단편 선에는 조남주, 김성중, 최정화 등 기존에 퀴어라는 소재의 자장 바깥에서 작품 활동을 전개해온 인기 작가가 다수 포진해 있었으며, 퀴어라는 소재가 더는 한국 문학 시장에서 특별하거나 대단한 장르 혹은 소재가 아님을 증명해주었다. 이러한 예시들로 미뤄보건대 2019년 한국 문학에서 퀴어라는 장르 혹은 소재는 지난 몇 년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메이저한 시장의 일부로 자리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퀴어의 불모지 였던 과거에 비해 진일보했을 뿐, 아직은 제대로 된 퀴어 문학의 계보를 작성하기 힘들 정도로 걸음마 단계인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퀴어 문학 권종의 증가를 두고 한편에서는 이를 일종의 ‘유행’이나 ‘현상’으로 치부하는 움직임이 이는 등, 아직도 한국 문학에서 ‘퀴어’가 나아가야 할 길은 멀다고 볼 수 있겠다. 글 | 박상영(소설가)

여자 아이돌이 모였을 때

Mnet <퀸덤>의 시작은 경쟁이었다. 박봄, AOA, 마마무, 러블리즈, 오마이걸, (여자)아이들. 연말 시상식을 방불케 하는 이 화려한 라인업을 불러모아 제작진이 던진 미끼는 또다시 ‘줄 세우기’였다. 다양한 연차의 걸그룹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벌어지는 캣 파이트를 담고자 하는 제작진의 의지가 엿보이던 그때, 이 지긋 지긋한 덫을 부순 영웅은 다름 아닌 출연자들이었다. 이들은 우승 자리를 둘러싼 권모술수 대신 “단독 컴백 쇼는 인기 많은 남자 아이돌만의 특권이라 생각했다”(설현)는 말로 여성과 남성 그룹 간 주어지는 기회의 차이를 꼬집었다. 또 경연곡을 통해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 Im the tree’(지민)라는 가사로 ‘아름다운 한 철 꽃’으로 비유되기 쉬운 젊은 여성, 그 가운데에서도 대상화의 극한에 놓인 여성 아이돌의 실상에 날카로운 해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뿐인가. 마마무, (여자)아이들 같은 실력파들은 진가를 재평가받았고, 섹스 어필 이미지에 갇혀 있던 AOA나 신비롭고 여리게만 소비되던 오마이걸은 자신들의 중심에 실은 누구보다 단단하고 굳은 심지가 있음을 무대로 증명해냈다. 그렇다, 무대였다. <퀸덤>이 남긴 가장 큰 가치는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건 오랜 시간 공들여 가꿔온 그들의 빛나는 무대라는 사실이었다. 비리와 부패의 온상과도 같았던 2019KPOP 신에서 그야말로 한 줄기 빛과도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글 |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베카신' 우표 스티커와 핀 버튼.

연초 롯데시네마 × 스탠리 큐브릭 기획전 때의 굿즈. '샤이닝' 키링,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핀 버튼. '시계태엽 오렌지' 메모지.

'서스페리아' 사건 케이스 파일.

'조커' 오리지널 티켓.

영화 굿즈에 관심이 갈 때

독립영화, 예술영화가 개봉할 때 관심을 모으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제작되기 시작한 굿즈는 이제 없으면 서운한 존재가 됐다. 배지와 핀 버튼, 엽서, 영화의 감성을 담아 디자인한 오리지널 티켓 등 소소한 것들이 보편적이다. ‘굿즈 패키지 상영관’식으로 특정 회차의 티켓을 사면 제공받거나, 아이맥스 같은 극장의 특정관에서 관람할 경우 ‘겟’할 수 있는 식이다. 소규모 영화라도 이렇게 특별하게 지정된 회차의 티켓은 전국에 포진한 덕후들의 관심에 힘입어 매진되곤 한다. “예술영화의 경우 굿즈 스페셜 패키지 같은 이벤트는 극장 측에서 필수로 요구하기도 해요. 그런 마케팅을 하지 않으면 관람객이 너무 적은 게 사실이니까요. 영화 성격에 따라 굳이 굿즈를 제작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럼 관객들의 문의 전화가 와요.” 한 영화 수입사 관계자의 말이다. 물론 와이드 릴리즈 영화에도 굿즈는 있다. 아이맥스관 전용 스페셜 포스터와 렌티큘러 엽서 및 티켓 등을 선보인 <조커>는 최근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서 호평을 받았다. 아서 플렉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켓에 조커의 얼굴이 프린트된 투명 필름을 겹치면 ‘투 페이스’ 형상이 되는 티켓이란 팬에게는 소유하고 싶은 기념품이다. 패션 디자이너의 한정판 아이템이 출시되면 매장 앞에 줄 서서 기다리는 이들의 심정과 같은 뜨거운 마음이, 영화 팬에게도 있다.

시청각이 폐관할 때

201311월, 서촌 윗자락에 자리한 한옥에서 전시 공간 ‘시청각’이 문을 열었 다. 6년 뒤인 201910월 마지막 날, 시청각은 운영을 종료했다. 20세기 중 반쯤 지어졌을 작은 개량한옥은 나무 기둥, 기와로 된 처마, 콘크리트 벽이 섞인 재미난 곳이었다. 공간의 귀퉁이는 직각을 이루지 않았고, 높은 천장 대신 지붕의 서까래가 드러나 있던 그곳은 왠지 아리송한 구석이 있었다. 개량 한옥과 화이트 큐브가 아직 대화를 마치지 않은 듯한 전시 공간에 서 있자면, 지금 서울에서 현대미술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시청각과 비슷한 시기에 개관하며 서울에서 가장 큰 화이트 큐브로 자리매김했다. 그동안 신생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공간이 문을 열었다 닫았고, 페미니즘은 미술을 바라보는 방식마저 완전히 뒤바꿨다. 시청각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꽤 차분히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을 장식한 전시는 Sasa[44], 박미나, 최슬기, 최성민으로 구성된 미술가-디자이너 그룹 SMSM10주년 회고전이다. 시청각은 이제 잡지 <계간 시청각>으로 무대를 옮긴다. 시청각 운영자 현시원, 안인용은 2000년대 중반 신문사에서 함께 일했고, 독립 잡지를 함께 만들기도 했다. 시청각 폐관은 분명, 끝인 것 같은 시작일 테다. 글 | 박재용(큐레이터, 통번역가)

사회가 분열할 때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도 정치 뉴스를 봤다. 사회 돌아가는 공기에 무감한 사람도 어떤 기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를 들썩이게 만든 주제에 대한 가치 판단이 각자의 몫이라고 칠 때, 그 결과는 믿기 힘들 정도의 두 동강이다. 시민들의 집회가 이어진 두 베이스캠프, 서초동과 광화문 광장 간의 심리적 거리는 아득하다. 여름부터 한일 무역 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소비재, 항공과 여행업계, 요식업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깊숙이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한국인의 하나 되는 추진력은 한번 시동 걸리면 곧고 뜨겁게 뻗는 면이 분명 있다. 그래서인지 분열하고 갈등할 때도 그렇게 뜨겁고 가차 없다. 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갈등을 안은 ‘우리’라는 말을 맘 편히 쓰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할까?

| 올해의 이별 | 설리

‘아름답다’라는 사전적 의미의 현현이나 다름 없던 이름, 언론의 표적이 될지언정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던 이름, 한국 사회의 이중적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그만의 룰을 보여준 이름. 설리는 떠나 말이 없지만, 남겨진 이들에게는 과제가 남았다. 설리가 5월 인스 타그램에서 언급한 IBM 설립자 토마스 J. 왓슨의 전언을 마침내 모두가 아로새길 때다. “가시밭길이더라도 자주적 사고를 하는 이의 길을 가십시오. 비판과 논란에 맞서서 당신의 생각을 당당히 밝히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별난 사람’이라고 낙인 찍히는 것보다 순종이라는 오명에 무릎 꿇는 것을 더 두려워하십시오.”

피처 에디터
권은경, 전여울
포토그래퍼
박종원
아트워크
김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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