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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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 11월의 베를린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의미 있는 축제를 벌인 그곳의 공기와 기분을 전한다.

1963년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베를린 장벽 앞 연설 속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는 외침처럼, 누구나 언제든 베를리너가 될 수 있는 자유의 도시. 지난 세기 이념의 갈등을 딛고  화의 상징이 된 도시. 베를린의 11월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했다. 독일 통일의 시발점이 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3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브란덴부르크 문부터 알렉산더플라츠,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슐로스플라츠, 겟세마네 교회, 슈타지 본부, 쿠르퓌르슈텐담까지, 장벽 붕괴와 동독 시민의 평화 혁명 흔적이 깃든 일곱 장소를 주요 무대로 대대적인 축제의 장이 마련되었다. 독일 연방 정부와 베를린시는 통일의 성과를 주로 기념하던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로 올해를 준비했다. 난민 수용, 인종 차별, 외국인 혐오, 네오 나치와 극우의 부상 등 독일 사회에 불어 닥친 정치 사회적 이슈 탓일까? 114일부터 10일까지 ‘민주주의, 자유, 화합’이라는 주제로 야외 전시, 3D 프로젝션 영상, 공연, 영화 상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이번 행사의 핵심 장소이자 베를린의 주요 관광지인 몇 군데는 기념비적인 주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 온 이들과 여행객으로 북적거렸다.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의 역사적 의미, 민주화와 자유를 요구하며 알렉산더플라츠를 가득 메웠던 대규모의 시위 현장, 흉물로 전락한 베를린 장벽이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라는 새로운 야외 갤러리로 재탄생한 이야기 등등을 담은 사료가 야외에 전시됐다. 수화기를 들면 역사적 순간을 목격한 이들의 생생한 증언이 들려오는 설치도 있었다. 지난날의 역사적인 울림과 긴장, 동요와 떨림 등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 하는 전시. 그 속에서 많은 관광객이 자국의 역사도 아닌 일에 언 손을 녹여가며 몇 시간이고 사진과 문장을 곱씹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 축제가 단순히 한 국가의 기념행사가 아니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지점을 지닌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반면 구동독의 프렌츨라우어베르크 구역에 위치한 겟세마네 교회 앞의 전시는 베를린 시민들의 일상 속에 덤덤히 자리했다. 주요 출퇴근 노선인 쇤하우저 알레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덕분에 이곳 주민들은 아침저녁으로 전시를 자연스럽게 접했다. 겟세마네 교회는 과거 평화 혁명 시위대가 동독 정부의 감시를 피해 숨어들고 집회를 열던 장소다. 이 부근에 사는 시민들은 알고 보면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현장과 늘 함께 머물고 있는 셈이다. 장벽 붕괴나 평화 혁명은 현실과 동떨어진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생활 속에 자리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어번스크린(Urbanscreen)은 각 장소를 대표하는 건축물의 외형에 3D 매핑 기술을 적용, 건물에 영상 푸티지를 입힌 작품 ‘스피킹 파사드(Speaking Facades)’를 선보였다. 15분짜리 영상은 독일 통일에 이르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자유 선거를 요구하는 동독 시민들, 장벽 붕괴를 촉발한 동독 당국의 자유여행 조치 발표, 장벽을 부수고 넘어가는 동독 시민과 이들을 반기는 서독 시민의 상기된 모습, 환희와 울음이 뒤섞인 환호, 독일 통일 조약이 의회에서 체결되는 모습 등등. 건물을 스크린 삼은 거대한 영상이 가슴속의 뜨거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인 예술가 패트릭 션(Patrick Shearn)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대형 설치 작업 ‘비전스 인 모션(Visions in Motion)‘을 선보였다. 평화와 자유를 갈망하는 3만 명 시민의 목소리를 리본에 담아 공중에 설치하니 대형 물결이 하늘 위에 흘렀다. 간혹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에 리본이 흔들릴 때면, 마치 옆에서 누군가가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하나씩 조곤조곤 읽어주는 느낌도 들었다.

119일, 3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짜다. 장벽 붕괴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날 저녁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었다. 국적, 인종, 성별의 구분 없이 붕괴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혹은 그 기억을 전해 들은 모든 세대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모여들었다. 관중은 베를린을 대표하는 테크노 음악과 베를린이 사랑하는 팝스타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 ‘Lets Dance’ 등이 흐르는 가운데 함께 이야기하고, 춤추고, 노래 하며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화합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일주일 동안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여러 전시와 행사에서 접한 것보다 그날 저녁의 짧은 몇 시간이 더욱 빛나 보인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정훈(미술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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