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규: 손잡이 (Haegue Yang: Handles)' 양혜규 인터뷰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망각의 손잡이

2019-11-03T21:26:49+00:002019.11.04|FEATURE, 컬처|

쉽게 소외되고 자꾸만 잊히는 존재가 있다면, 미술가 양혜규에게는 손잡이가 그러하다. 국제갤러리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시작으로 10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개막한 전시 <양혜규: 손잡이 (Haegue Yang: Handles)>를 치른 양혜규를 만났다.

작품 ‘중간 유형 – 장식된 소금 후추 방패’ 앞에 선 양혜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장 뤽 고다르의 영화 <국외자들>에서 가장 아끼는 장면은 러닝타임 90분쯤 등장한다. 주인공 아르튀르가 총에 맞아 비틀거리다 쓰러져 죽는 순간 내레이터는 낮게 깔리는 음성으로 ‘발 없는 새’ 이야기를 들려준다. “암운이 엄습해오며 그가 본 것은 인디언 전설에 나오는 가상의 새였다. 발 없이 태어나 한 번도 내려앉지 않는다는 전설의 새는 잠을 자는 순간에도 바람 속에 몸을 맡기다가, 죽는 날 비로소 땅에 내려앉는다.” 이후 발 없는 새 이야기는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 속 아비(장국영)의 대사로 등장했다가, 2010년 시인 이제니가 발표한 시 ‘발 없는 새’에서 재차 소환되었다.

고다르를 돌려보던 와중 9월 광주에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전시 <공작인 : 현대 조각과 공예 사이>가 개막했다. 1990년대 이후 현대 조각에서 공예적 요소를 건져 올리는 이 대규모 그룹 전시에는 작가 양혜규도 초대됐다.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 이후 4년 만의 국내 행보다. 인터뷰를 위해 광주로 떠나며 발 없는 새를 다시 떠올렸고, 분명 양혜규도 이 농담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양혜규야말로 영원히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발 없는 새, 그를 논한 비평에 빈번히 등장하는 표현을 빌려 다시 말하자면 ‘디아스포라’적 삶을 사는 이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인천 변두리에 자리한 폐가에서 진행한 국내 첫 전시 <사동 30번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생을 재구성해 추상적 언어로 제시한 아트선재센터 전시 <셋을 위한 목소리>, 조지 오웰의 수필 <코끼리를 쏘다>와 로맹 가리의 소설 <하늘의 뿌리>에서 출발한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 1982년 발매한 가수 민해경의 노래 ‘서기 2000년’에서 여러 겹으로 접힌 시제를 포착한 최근의 국제갤러리 전시 <서기 2000년이 오면> 등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품 여정에 표면으로 불거지는 양각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앞서 꺼낸 디아스포라일 거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유랑을 의미하는 디아스포라는, 이후 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집단을 지칭하는 단어로 의미가 확장했다. 이를 더욱 넓게 펼치면 지배와 피지배, 체제와 반체제, 정교와 이교도 등에 이르는 대립 구조가 디아스포라 안으로 우르르 들어온다. 그리고 양혜규의 많은 작업은 이러한 디아스포라에 주파수가 맞춰진 듯 보인다.

오래전부터 양혜규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된 디아스포라는 이제는 해묵은 비평으로 통할지 모르며, 더불어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유일한 표지가 아닐지언정 1021일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개막하고 현대카드가 후원하는 전시 <양혜규: 손잡이>에서는 여전히 디아스포라의 자장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작품을 마주할 수 있다. 가령 여성 미술가이자 무용가, 건축가였던 소피 토이버-아르프(Sophie TaeuberArp), 철학자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구르지예프(G. I. Gurdjieff) 등과 같이 어떠한 경향이나 사조, 장르로 그루핑되지 않으며 지극히 ‘중간자’적으로 살아온 인물을 참조한 설치작이 그러하다. 그리고 전시 타이틀에서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지시하듯, 양혜규의 작업에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쉽사리 전면에 드러나지 않던 ‘손잡이’가 이번 전시를 통해 본격적으로 조명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손잡이는 “중간에 있어 무엇과 무엇을 매개하는 미디엄”이지만 동시에 “소외되었으며 자꾸만 망각되는” 존재다. 작가는 과거 블라인드, 방울 등을 통해 그러했듯 지극히 일상적 사물인 손잡이에서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엿본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우선 <공작인 : 현대 조각과 공예 사이>가 열린 광주 양혜규를 만났다.

첫 페이지에 들어갈 사진의 촬영을 마치고, 양혜규를 돌려 세워 그의 땋은 머리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성글게 딴 머리 모양에서는 짚풀 공예로 제작한 그의 ‘중간 유형’ 연작이 어렴풋이 읽힌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전시 <공작인 : 현대 조각과 공예 사이>의 흥미로운 지점은 인간의 본질을 물건과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공작인(호모 파베르)으로 바라본 데서 비롯한다고 생각해요.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보는 예지인(호모 사피엔스)과는 대립하는 개념이죠. 여태까지는 호모 사피엔스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는데, 최근 들어 반성의 목소리가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호모 사피엔스는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야기되지만, 한편으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이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역사상 크로마뇽인, 네안데르탈인 등도 존재했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종족을 물리치고 홀로 살아남았어요. 신체 조건이 압도적이지는 않아도 인지 능력이 뛰어나 우세한 종으로 지구에 자리 잡았다는 식으로 호모 사피엔스를 높게 평가해왔지만, 요즘엔 그 무지막지한 사나움과 여타의 종족을 말살해버리는 잔인함을 들어 성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듯해요. 이에 비하면 호모 파베르는 거의 잊히다시피 한 ‘종족’이죠.

전시장을 둘러보면 의아한 대목이 있어요. 인조 짚을 일일이 엮어서 제작한 ‘중간 유형’ 연작은 수공예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 왜 불려왔는지 쉽사리 납득돼요. 그런데 괴목과 유목(流木), 과거 전시 전경이나 작품 일부를 모티프로 제작한 벽지 작업인 ‘순간 이동의 장場’(2011)을 마주했을 땐 어디서 수공예적 요소를 발견해야 하나 좀 헤맸어요. 고전적 의미의 수공예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벽지 작업에서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현대의 디지털 이미지 또한 수공예적 측면을 지니고 있지 않나 싶어요. 수작업으로 가공한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가 그 속에 녹아 있거든요. 포토샵이나 3D 프린팅 작업을 해본 분이라면 알 거예요. 사물을 스캔하고 출력하면 정제된 결과물이 바로 나올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거든요. 아무리 좋은 스캐너가 있더라도 데이터가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일일이 폴리싱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굉장히 노동집약적이죠. 그리고 ‘순간 이동의 장場’을 제작하던 당시만 하더라도 외부 문맥을 가져오지 않고 과거 저의 작업이나 전시 전경, 작업을 위해 조사한 오브제만 활용했어요. 그동안 제가 축적해온 것을 창고라 치고, 그 창고에서 계속 끌어다 쓴 거죠. 어느 정도 재료가 수합되어야만 가능한 작업인데, 저는 이 또한 수공예적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올해 3월 독일 ‘그로피우스 바우’에서의 단체전도 그랬고, 1115일 오스트리아 ‘쿤스트하우스 그라츠’에서 오픈하는 단체전도 공교롭게 수공예가 테마예요. 양혜규란 작가야말로 어떤 경향에 그루핑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근래 들어 유독 ‘수공예’라는 명찰이 따라붙는 것 같아요. 짚풀 공예를 이용한 ‘중간 유형’ 연작은 ‘민속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민속을 파면 팔수록 ‘우리 것이다’라고 명명할 수 있는 특이점만큼이나 인류 보편성도 발견하게 돼요. 짚을 꼬아서 멍석 하나 만들지 않은 나라는 없거든요. 물론 멍석의 패턴이나 색깔은 각양각색이겠지만 멍석 자체는 너무나 보편적이잖아요. 민속의 특이점과 보편성의 경계는 그리 멀지 않아요. 이런 연장선에서 수공예를 주제로 한 전시에 제가 계속 불려 다니는 이유를 생각해봤어요. 적어도 현재 유럽에서는 수공예 혹은 전통에 정치적 함의가 연결될 수 있어요. 우익 인사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전통적인 가족공동체를 강조하면서, 우리의 전통을 얘기하고, 이는 곧 반이민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고리를 만들죠. 이런 지점에서 전통을 새롭게 개념적으로 정리하는 단체전에 들어가는 묘미가 있어요. 저는 순진한 호기심과 질문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지만, 그게 어떤 방식으로 비치면서 특정 문맥에 놓이게 되잖아요.

그럼에도 단체전에 참가할 때는 전시 주제에 어느 정도 동의를 했다는 뜻이죠? 물론이죠. 소위 의미를 ‘하이잭’한다고 표현하잖아요. 그런 경우는 피하고 싶죠. 예를 들어 제가 마치 내셔널리스트라도 되는 것처럼 ‘국가대표 양혜규’라고 칭해지는 경우를 마주할 때가 있어요. 지금 시대나 세대, 상황 등을 고려하면 작가가 일종의 대표성을 발휘할 수는 있어요. 다만 제 직업이 국가의 정체성을 얘기하지는 않거든요. 이런 면에서 문맥과 의미의 정확도가 많이 아쉽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지난 9월에 오픈한 국제갤러리 개인전 <서기 2000년이 오면>을 보면서 소위 말하는 ‘국뽕’ 때문은 아니지만 반가운 마음도 들었거든요. 민해경의 노래로 전시를 여는가 하면 작곡가 윤이상의 연대기를 다루고, 2018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중계 영상에서 추출한 새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잖아요. 그러한 요소들이 ‘지금 여기에서 보이는 방법’이 중요한 것 같아요. 민해경의 ‘서기 2000년’이라는 유행가는 단순한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아니라 시제에 관한 힌트거든요. 노래 가사 안에는 여러 시제가 접혀 있을 뿐만 아니라 ‘로켓 타고 멀리 저 별 사이로 날으리’,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 등처럼 막연히 낙관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나이브함 안에서 당시의 리얼리티를 되새겨볼 수 있어요. 시간을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사변적 혹은 개인적으로 질문하면 ‘양혜규 씨의 2000년은 어땠나요?’ 혹은 ‘나의 2000년은 어땠나?’에 머물겠죠. 즉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가, 시간은 접혀 들어가거나 시간대 간의 여행은 가능한가 등의 사고나 질문은 가능하지 않겠죠.

이제 뉴욕 현대미술관의 재개관에 맞춰 오픈하는 전시 <양혜규: 손잡이>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우선 그간의 작업에 엄연히 존재해왔지만 좀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던 손잡이가 전면에 드러난 사정이 궁금해요. 여태 움직이는 조각을 많이 만들어왔음에도 손잡이에 주목한 적은 없던 것 같아요. 손잡이 이전, 짚풀 조각을 통칭하는 ‘중간 유형’을 영어로 풀면 ‘Intermediate’가 돼요. ‘Inter’는 사이를 뜻하고 ‘Mediate’는 매개한다는 의미예요. 인간 세계와 신령 세계를 매개하는 무당도 마찬가지로 미디엄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보면 손잡이도 미디엄 같다고 느꼈어요. 손잡이란 사물과 이를 작동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것의 중간에서 둘을 매개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중간은 중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AB가 주를 이루는 구조 사이에 끼인 사이 공간으로, 이는 엄연히 존재해요. 중간에서 연결시켜주고 있음에도 많이 소외되고 자꾸만 잊히는 존재인 거죠. 그와 같은 존재가 식민 역사에도 있었어요.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모르는 침략자는 언제나 일종의 현지 문화 번역자에게 의존했어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를 연결하는 번역자도 어찌 보면 ‘손잡이’인 셈이죠. 그 존재의 중요성에 비해서는 너무나 소수였지만 항상 어느 시대든 존재했어요. 그래서 많은 후기 식민 이론가들은 번역자에 주목해야 하고 이들을 파고들어야 전체 구조(!)가 보인다고 얘기해요. 손잡이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얼마나 튼튼한지, 어떤 모양을 띠는지, 어느 위치에 달렸는지 등에 따라 관계하는 방식이 규정지어지잖아요.

전시장에는 조각에 달려 실제로 이를 움직이게 하는 손잡이가 있는가 하면, 고정된 벽면에 달라붙은 손잡이도 있어요. 실용적인 손잡이와 비실용적인 손잡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고 싶었어요. ‘퍼폼’한다는 것을 막연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요즘에는 ‘관객 참여적’이라는 말이 선전 도구처럼 들릴 지경이거든요. 작품을 작동해보곤 뭔가를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작품을 이해하는 것과 작동에 참여하는 것은 별개거든요. 그런 면에서 꼭 작동하지 않는 비실용적인 손잡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만히 보고 사색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손잡이 말이에요.

2010년대 초반 몇몇 인터뷰에서 스위스 예술가 소피 토이버-아르프를 언급하셨죠. 아방가르드, 다다, 신조형주의를 두루 걸쳤던 토이버-아르프에 대한 관심이 이후 작업에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게 될지 내심 기대했는데, 이번 뉴욕 현대미술관(MoMA) 전시에서 그의 소형 조각물인 ‘쿱 다다(Coupe Dada)’를 참조한 작품을 선보였더라고요. 토이버-아르프의 원작에는 손잡이가 달리지 않았는데, 이번에 공개된 양혜규의 ‘소리 나는 쿱 구리 – 봉인된 통일체(Sonic Coupe Copper Enclosed Unity)’에는 손잡이가 달렸네요? 원작은 손잡이가 없을뿐더러 크기도 아주 작아요. 하드우드를 깎아서 채색한 작품인데,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용기 형태죠. 보통 용기가 클수록 다루기 어렵기 때문에 손잡이가 아쉽죠. 쿱 다다를 크게 확장하려 하니 자연스레 손잡이를 달아야만 하는 상황이었어요. 저는 항상 용기라는 물건의 특성이 일종의 ‘여성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언가를 담아내는 형태는 항상 ‘마이너스’적이고 그 안에 담길 내용을 상상하노라면 포용력과 잠재력을 떠올리게 돼요. 심지어 쿱 다다에는 뚜껑이 달려 있기 때문에 내부를 볼 수 없어서 신비로움이 더욱 극대화 되죠. 그래서 쿱 다다가 토이버-아르프의 초상처럼 느껴졌어요. 그녀는 살아생전 조각, 회화도 했지만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는 코뮨인 ‘몬테 베리타(Monte Veritá)’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무용도 익혔어요. 또한 바우하우스에 몸담았고, 학교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가르쳤죠. 토이버-아르프는 쉽사리 함께 담아내기 어려운 다양성을 녹여내는 ‘마법의 용기’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54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죠. 저는 그조차도 쿱 다다와 닮았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당시 10개의 사조가 있었다면 10개를 전부 했던 사람이에요. 마치 팩맨이 게임 속 미로를 돌아다니면서 에너지를 먹는 것처럼요. 그가 오래 살았다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요. 우리가 ‘쿱 다다’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 영영 모르는 것처럼요. 토이버-아르프가 생존하던 당시 남성 작가들은 대부분 한쪽만을 택했어요.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사회 계몽적이며 이성적 경향을 띠거나. 역사적으로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다 보면 교조주의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죠. 그러나 동시에 한 경향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로 설 수 있기도 해요. 그런데 토이버-아르프는 치우치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저는 그녀를 진정한 여성 작가로 생각해요. 대표성 획득과는 먼 이런 여성적 포지션이야말로 후대가 보기에는 훨씬 흥미로워요. 비서구권 출신이고 여성 작가인 동시에, 잡다한 것을 많이 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죠.

2011년 영국의 ‘모던 아트 옥스퍼드’에서 치른 개인전 <무용 선생>에 이어 종교 지도자이자 철학자인 구르지예프가 이번 전시에 재차 소환되기도 했죠. 구르지예프에 대한 연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굉장히 피상적이었어요. 기간을 길게 잡는 대신 여러 생각을 잡다하게 하는 방식으로 거의 6~7년 동안 찝쩍댄 것 같아요. 소위 중동과 극동의 중간을 중앙아시아라 부르잖아요. 구르지예프는 카자흐스탄이나 타지키스탄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를 줄기차게 여행했고 그쪽에서 많은 것을 길어왔어요. 그가 구루(Guru), 정신적 지주로서 교조적으로 흐르지 않은 이유도 중간 지점에서 많은 것을 길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어떤 종교도 안정되고 보급되기 시작하면 보수화되고 교조적으로 나아가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면서 신비함을 잃어버리고요. 하지만 구르지예프는 여전히 신비한 부분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그건 그가 경전을 만들기보다 춤을 방법론으로 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는 자신을 ‘춤선생’이라고 일컫기도 했거든요. 처음 구르지예프의 춤을 봤을 때는 마냥 놀라웠어요. 발레처럼 장르화된 춤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신적인 것인가? 혹은 신체적인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어요.

그를 참조한 조각 ‘소리 나는 문 – 아홉 법칙(Sonic Gate Law of Nine)’을 보면 별처럼 생겼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문명사를 보면 우리는 모든 지식과 서사를 기하학을 통해서 추상화, 도표화했어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인간 유형을 7가지로 표현했다면, 구르지예프는 9가지 유형으로 봤고요. 원 안에 새겨진 9각형 기하학인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인간 세계를 보고, 구르지예프 댄서들은 9각형 안에서 대형을 맞춰 춤을 추기도 했죠. ‘소리 나는 문 – 아홉 법칙’은 현대적 테크놀로지가 슬쩍 녹아들기도 한 작품이에요. 3D 모델링 프로그램인 스케치업에는 ‘푸시 앤 풀’이라고 볼륨을 만들어주는 툴이 있는데, ‘소리 나는 문 – 아홉 법칙’은 9각형을 그린 다음 이 툴을 적용해서 쭉 당긴 후 일으켜 세운 듯한 형상이에요. 일종의 기술적 슬랩스틱이랄까.

어떨까요, 이번에 전시가 열리는 ‘마론 아트리움’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도 관람객이 모여드는 허브 같은 공간이잖아요. 층고가 굉장히 높고 수직 수평 사방으로 공간이 열려 있어요. 좋게 말하면 허브이기도 하고, 나쁘게 말하면 산만한 장소이기도 해요. 그런 면에서 굴뚝 같다고 느끼고요. 연기가 빠져나가는 텅 빈 공간이라 아무런 기능이 없는 것 같지만, 정작 없으면 집에 연기가 차잖아요. 그래서 유리 천장을 막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열어젖혔어요. 해시계처럼 빛이 공간 안으로 떨어지길 바랐거든요. 그러면서 홀로그램 스티커로 제작한, 구르지예프의 9각형을 참조한 다각형 모양이 다양하게 빛을 반사해서 영롱하게, 변화무쌍하게 연출될 거예요.

최근 들어 더듬고자 하는 영역이 있을까요? 남들이 관심 가지는 것에 기본적으로 다 관심을 기울인다고 보면 됩니다(웃음). AI 기술, 딥러닝, 제너레이티브 사운드에 관심이 많아요. 특히 휴머노이드나 소셜 로봇에 탑재하는 목소리는 어떤 텍스처와 캐릭터로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요. 텍스트를 음성으로 바꿔주는 TTS 기술도 같은 맥락에서 관심이 가고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도 흥미롭습니다.

<양혜규: 손잡이>전이 오픈할 즈음 미국 마이애미에 위치한 ‘더 배스’에서의 개인전과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에서의 커미션 프로젝트도 기다리고 있어요. 양혜규에게는 언제쯤 휴식이 찾아올까요? 원래 건강했기 때문에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는데 조금씩 더 자주 버겁다고 느껴요. 며칠 전 국제갤러리 전시 오프닝을 마치고 뒤풀이 없이 바로 후다닥 집에 갔더니 저녁 9시 반이더라고요(웃음). 저한테 쉬라고 하는 지인들이 많아요. 그런데 한편으로 아직도 쉰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좀처럼 쉬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휴식에 대한 대답은 ‘글쎄요’가 적당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