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가 안 예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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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의도의 삭발 트렌드.

여의도에 유례없는 민머리 열풍이 분다. 조국 장관 문제를 놓고 열흘 넘게 의견이 분분한 상황. 제1야당의 대표도 밀었다. 자유한국당의 황교안 대표도 조국 법무장관의 파면을 요구하며 삭발 투쟁에 나섰다. 이언주 의원으로 시작된 삭발 릴레이는 벌써 20명을 넘겼다(국회의원, 원외 인사들까지 포함). 고대 인도에서는 갓 태어난 아이가 병에 걸리지 말라는 뜻으로 머리를 밀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삭발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에서는 할례 후 ‘전사’가 된다는 의미로 머리를 민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삭발은 어떤 의미일까?

삭발의 의미

삭발, 영어로 Tonsure은 ‘큰 가위’를 의미한다. 라틴어 ‘Tonsura’에서 유래했다. 역사 학자들은 삭발의식을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에는 자른 머리카락을 신에게 바쳤는데 이는 ‘충성’을 의미했다. 그러면서 가톨릭, 불교에도 영향을 끼친다. 숭고한 마음가짐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다. 1895년 단발령이 시행되며 수많은 이들이 말한다. “조상이 물려준 머리를 함부로 자를 수 없다. 차라리 내 머리를 잘라라!” 그만큼 유교에서 머리를 자른다는 건 굉장히 치욕적인 일로 치부되곤 했다. 단발령 이후 머리는 점점 짧아졌다. 1980년대가 되며 이른바 운동권, 노동권에서 삭발 문화가 퍼지기 시작한다. 삭발은 저항의 상징이었고 투쟁 수단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드러낼 때도 머리를 민다.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그랬다.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머리를 시원하게 밀고 기자 회견장에 나타나곤 했다. <슬램덩크>의 강백호처럼 말이다. 2019년, 정치권에도 잘린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기 위해서라지만 지지층 결속, 인지도 상승을 위해서라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첫 삭발 정치인

순대 국밥이나 닭갈비도 원조가 중요하다. 현시점에서 최초 삭발 정치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스타트를 끊은 정치인은 1987년 신민당 소속이었던 박찬종 전 의원이다. 무려 32년이나 유행을 앞서갔다. 당시 대선이 다가오자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후보 단일화를 외치며 삭발 투쟁을 했다. 원래는 같은 당 의원들도 같이 집단 삭발을 할 계획이었으나 현장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박찬종 의원만 머리를 밀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단일화는 무산됐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두 번째 삭발

1997년 1월은 노동법으로 여의도가 시끌벅적했다. 이때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의원들이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이에 분개한 새정치국민회의 김성곤 의원이 머리를 밀었다. 반발은 거셌다. 노동자들은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시위했다. 한보 비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비리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정부와 여당은 힘을 잃었다. 결국 1997년 3월, 노동법 재개정안이 통과됐다.

삭발과 단식

아마 삭발과 단식 투쟁을 병행한 첫 사례가 아닐까 싶다.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을 때다. 열린우리당의 설훈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며 삭발과 함께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당 지도부의 총사퇴를 주장했다.

집단 삭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던가. 2000년 대 중반부터는 단체로 머리를 밀기 시작한다. 2007년 한나라당의 김충환, 신상진, 이군현 의원이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며 다 같이 결의를 다졌다. 결국 재개정안은 국회에서 통과가 됐다. 2010년 1월에는 자유선진당의 류근찬, 이상민, 김낙성, 김창수, 임영호 5명이 카메라 앞에 섰다.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 방침에 반발한 것. 그해 6월에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됐다. 2013년에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에 항의한 김선동 등 5명의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대거 삭발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여론은 돌아선 뒤였고 해산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컨트리뷰팅 에디터
박한빛누리
사진
Photo by andrii leonov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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