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와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레스토랑 추천 11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서울 미식 누아르

2019-09-02T19:48:52+00:002019.09.04|FEATURE, 라이프|

은밀한 뒷골목, 컴컴한 지하, 간판이 없는 가게들. 서울 미식 누아르를 찾아 나선 일주일의 기록.

있을 在

도산공원 근처에 소리 없이 오픈한 ‘있을 재’는 요즘 가장 주목받는 레스토랑이다. 네 살 터울의 형제가 20년 넘는 오랜 세월 한 우물만 파다 마침내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새로운 챕터를 쓰고 있다. 한마디로 내공의 맛과 힘이 느껴지는 곳. 와인 섹션이 레스토랑의 중심을 관통하며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는 오직 요리가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어둑한 테이블 위로 한 줄기 핀 조명이 떨어지며 요리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영화 <아이엠러브>에서 틸다 스윈턴이 새우 요리를 한 입 먹고 반해버렸던 레스토랑 신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랄까. 한식에서 영감 받은 푸근하고 맛의 핵심이 느껴지는 이탤리언 요리를 선보인다. 특히 진하게 뽑은 육수의 맛과 바싹 쫄깃하게 익힌 메추리 요리는 감칠맛의 향연을 느껴볼 수 있다. 완성도 높고 존재감 넘치는 두 남자를 닮은 이 공간이 오래도록 한자리를 지켜주었으면 바람으로 문을 나서게 된다.

6-3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어느 뜨거운 오후. 길고 투명한 커튼으로 둘러싸인 공간 앞을 서성였다. ‘63’이라고 손톱만 하게 적힌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리드미컬한 풍경이 펼쳐진다. 4미터는 거뜬히 넘을 높은 천장 끝까지 가지런하게 정렬된 와인병, 테이블 위로 하나둘 켜지는 촛불, 직사각형 프레임 사이로 스치듯 보이는 요리사들의 분주한 움직임. 청담동 63은 어쩌면 서울에서 가장 높은 천장을 품은 다이닝 공간이 아닐까? 이곳의 메뉴는 일간신문처럼 매일매일 새롭게 종이에 인쇄된다. 서울 ‘제로 콤플렉스’와 파리 ‘르 샤토브리앙’에서 경험을 쌓은 박진용 셰프가 선보이는 캐주얼하고 크리에이티브한 요리는 더 많은 와인을 탐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제 63에서는 낮술이 주는 풍요를 누릴 수 있다. 3가지 코스요리로 제공하는 런치 메뉴에 펑키한 내추럴 와인을 곁들이는 것보다 완벽한 하루는 없다.

Noyu

한때 이곳은 네온사인이 붉게 비추던 정육점이었다. ‘노유’라 불리던 어느 작은 동네 골목길에서 몇십 년 동안 그렇게 자리를 지켰다. 지금은 오직 간판만 남아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그곳은 사람과 사람이 모이고 꽃병으로 사용하고 싶은 귀여운 와인병이 일렬로 줄지어 있는 술집이 되었다. 길고 복잡한 와인 리스트 대신 주인이 마치 스무고개 하듯 이런저런 취향을 물어봐가며 와인을 추천한다. 그게 탁 들어맞은 날엔 쉬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 병에서 글라스로 넘나들며 신나게 마시다 보면 너무 짧은 여름밤이 아쉬울 따름이다. 콩테 치즈, 샤퀴테리 모음 한 판, 백 알도 거뜬히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절임 방울토마토, 밤 11시부터 주문이 가능한 마성의 라면까지. 단순하고 편안하게 사람을 기분 좋아지게 하는 공간 노유. 지극히 영화 같다고 느끼는 순간은 자동차가 라이트를 켜고 노유 앞을 지나가는 순간이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불빛이 흰 벽을 비출 때 그저 그 순간의 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진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 언제나 시선이 머물 수밖에 없는 한국 근대 건축물의 걸작 원서동 공간(空間) 사옥. 지금은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자리 잡았다. 은밀하게 감춰진 미로 같은 그 건물 사이에서 투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유리 건물. 2010년 시작해 한국 전통 디저트의 새로운 면면을 보여준 합이 10주년을 앞두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한옥을 바라보며 먹는다. 창덕궁 비원을 바라보며 마신다. 테이블 앞에 가지런히 놓인 시루떡과 주악, 유자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마주하면 시선은 자연스레 양옆으로 향한다. 스타일리스트 서영희가 선물처럼 한땀 한땀 박음질하고 담양의 고운 한지로 빚은 거대한 샹들리에, 그 아래 놓인 디자이너 폴 키에르홀름의 pk1 의자 다섯 개, 패션 디자이너 제이백이 합(合) 한자의 고유사선 모양에서 영감 받아 만든 그레이 유니폼, 이종길 금속공예가의 고즈넉한 주전자, 창가에 켜켜이 쌓아둔 시루.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좋다. 합(合) 안에 모든 아름다움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으니까.

Saint Germain des Prés

레스토랑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때로는 맛 그 이상의 무엇을 완성할 때가 있다. 남산, 하얏트 호텔, 담쟁이덩굴, 공중전화 박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한참을 창문 밖만 바라보게 되는 한적한 공간. 생제르맹데프레는 진정한 클래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붉은 외피의 작은 식당 혹은 바다. 두 계단씩 뛰어서 올라 피자를 굽는 마스터. 피자 익어가는 냄새가 고소하게 피어오른다. 누군가는 파리를, 혹은 목포의 바닷가를 떠올린다. 바닥에 깔린 카펫의 촉감,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 빈티지 가구와 소품, 알맞은 와인과 음식, 적절한 타이밍에 터져 나오는 드라마틱한 노래. 깊은 속 이야기와 무의미한 농담이 레드와인처럼 순식간에 번져 나갈수록 빈 병이 가득 쌓여간다. 생각이 많은 밤, 숙면을 위한 한잔이 필요한 밤 자연스레 떠오르는 아지트가 남산 아래 불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다.

스탠딩바 전기

인쇄소가 밀집한 을지로 후미진 뒷골목. 미로처럼 비좁은 길로 걷다 보면 전봇대의 복잡한 선과 ‘전기’라는 간판이 묘하게 겹쳐 보이는 지점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의자는 없고 오직 테이블만 단단하게 배치된 독특한 콘셉트의 바가 등장한다. 박력 넘치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방이 거울과 문으로 장식되어 독특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소설 <인간실격>의 한 대목에서 영감 받아 만든 ‘전기’라는 이름.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서서 먹고 마시는 문화에 매력을 느낀 주인장의 취향이 응축된 공간이다. 몸을 가눌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마시고, 휘청거리며 취기를 느끼는 것이 스탠딩 음주의 매력. 알싸하게 매운 마파두부에 진한 하이볼 한 잔 때려 마신 후 위스키를 끼얹은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하면 그날의 바 호핑이 본격 시작되는 기분. 13평 공간 안에 스물 남짓의 사람들이 오밀조밀 모여 먹고 마시다 흥이 오르면 어느새 하나둘 춤을 추기 시작한다는 진풍경을 목격해봐도 좋겠다.

The Porterhouse

외관부터 심상치가 않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린 살코기 그림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 유리창 사이로 보인다. 그곳에서는 미국에서 항공으로 직송된, 미국농무부에서 승인하는 프라임 등급의 고기가 한창 숙성 중이다. 더 포터하우스는 한 단계 진화한 서울 식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일종의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달까. 취향과 기호를 반영해 고기를 주문할 수 있다. 매장에 굳건히 닫혀 있는 나무문을 열면 다이닝 공간이 등장한다. 최소 6명부터 시작하는 오마카세로 고기를 맛볼 수 있다. 도끼처럼 날카롭고 거친 뼈에 붙은 고기는 6주에서 10주 사이에 걸쳐 드라이에이징 과정을 거친 후 테이블 위에 오른다. 토마 호크, 본인립아이 등 다른 곳에서 쉽게 먹어볼 수 없는 부위에서는 감칠맛 넘치는 풍미와 독특한 육질을 느낄 수 있다. 된장찌개, 비빔국수, 언양불고기로 이어지는 긴긴 식사가 이어진다. 미·대식가들의 진정한 파라다이스가 펼쳐진다.

騎士

비 내리던 축축한 어느 금요일. ‘삼청동 68’이라는 암호를 들고서 택시를 잡았다. 삼청동주민센터 맞은편 비좁은 골목 사이로 들어서자 조도가 낮은 등불이 보인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면 연극 무대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유리창 너머로 100년은 족히 살았을 것 같은 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시옷 자 형태의 천장에서는 기이한 식물이 하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디귿 자 형태의 아늑한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 BGM으로 흐르는 전람회 시절 김동률이 부르던 1990년대 노래, 무엇이든 주문하면 주방 안쪽에서 집중도 높게 정갈한 안주를 하나씩 내주는 주인장. 우롱차와 화요를 섞은 마력의 술을 홀짝이다 보면 어느새 취기가 돈다. 앞, 옆 혹은 대각선 자리의 사람과 부담스럽지 않은 대화가 뒤섞이고 ‘기묘한 이야기’라는 뜻의 기사(奇事) 같은 하루가 펼쳐진다. 해초 문어, 야키소바, 편육, 명란구이와 감태, 황태와 트러플 소스.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끝도 없이 음식이 들어가고, 그 리듬에 맞춰 연신 술잔은 비워지고. 어느덧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4시로 넘어가던 삼청동 기사에서 보낸 환상 같은 6시간.

장생건강원

진정한 술꾼들이 대낮부터 독주를 입에 털어 넣을 것 같은 한낮에도 어둑하고 은밀한 바. 영동시장에서 20년 넘게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장생건강원의 간판을 떼지 않고 그대로 정체성을 살려냈다. 위수끼, 콕테일 뉴트로 감성의 간판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바 안으로 들어서면 짙은 계피 향이 코끝을 스친다. 빼곡한 각종 술 종류 사이로 구기자, 오미자, 버섯, 당귀 등 온갖 식재료로 직접 만든 담금주에 눈길이 간다. 기본 물로 헛개수를 내어주고 주전부리로 두부, 단호박 과자, 말린 과일을, 메인 요리로는 보쌈부터 오리 요리까지 그야말로 건강을 생각한 주류와 안주가 탄탄하게 마련되어 있다. 시장 상권을 살리겠다는 기특한 마음으로 매달 상인들과 흥미로운 협업을 펼친다. 죽집과는 조선호박을 재료로 칵테일을, 축산집과는 삼겹살을 이용한 ‘베이컨 샤워’를 만들었다. 야관문에 진을 사용한 담금주를 베이스로 마리골드 허브를 올린 터닝포인트는 맛의 반전을 선사한다. 밤의 빗장이 진정 열리는 맛이랄까. 도라지와 인삼으로 만든 칵테일, 청양고추 마가리타 등도 떠올리면 침이 고인다. 장생건강원이 몸집을 빠르게 키워 은밀하게 숨어 있는 벽 너머의 비밀 공간을 확장하는 그날을 기다려본다.

Pierre Cigar

피에르 시가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커팅기에 시가를 자르고, 나무에 불을 붙이고, 입에 가져가는 일련의 과정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남산 아래 위치한 피에르시가는 시가에 입문할 수 있는 은밀한 아지트다. 시간을 짐작하기 어려운 어두운 공기, 테라스로 나가면 펼쳐지는 서울 풍경, 곳곳에 배치된 쿠바 전통 소품, 블라인드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불빛. 쿠바에서 수입하는 250여 가지 시가를 둘러 보며 자신에게 꼭 맞는 것을 골라서 푹신한 소파에 몸을 흐트러트린 채로 연기를 뿜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명상원 혹은 요가원에서 깊은 호흡을 내뱉듯 그 순간만큼은 현실에서 한 발 물러나 다른 세계를 떠올려볼 수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최고의 시가는 어느 날 갑자기 행운처럼 찾아오는 것이라고. 같은 시가라도 언제 어떤 상태로 피우냐에 따라 한 박스 안에 담긴 시가는 각기 다른 감각과 경험을 선사한다. 시가로 심신을 달랜 후엔 셀러에 있는 내추럴 와인이나 위스키 한 모금을 흘려 넣으며 좋은 기분을 이어가도 좋겠다.

PRO/RATA ART

어둑한 암실에서 홀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아트 플랫폼이 등장했다. 프로라타아트는 음지에 있는 작품을 양지로 꺼내어 작품의 영감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겠다는 취지로 탄생했다. 개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숨은 명작의 분할 소유권을 발행한다. 첫 오프닝 당시 조지 콘도의 1996년 작 ‘The Antipodal Explorer’가 공개되어 화제를 모았고, 이후 미술계의 악동 뱅크시와 영국 yBa 작가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을 선보였다. 프로라 타아트는 미술 감상과 함께 음악을 듣고 간단한 음료를 즐길 수 있는 라운지에 가까운 공간이다. 작품이 설치된 뷰잉룸 작은 의자에 앉아 작가가 즐겨 듣던 음악과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을 선사한다. 다가오는 9월에는 카우스의 2015년도 스크린 프린트 작품 ‘Stay Steady’를 공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