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의 스킨케어, 톰 포드 리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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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포드 뷰티의 첫 번째 스킨케어 라인 ‘톰 포드 리서치’.

톰 포드가 스킨케어를 론칭한다고? 모든 것이 극비라는 이름 아래, 그를 만나러 LA로 가면서 나는 아주 럭셔리하고 아름답지만 단지 촉촉하기만 한 크림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는 만나자마자 수백 페이지는 거뜬히 넘을 것 같은 ‘톰 포드 리서치’ 커버의 연구 논문부터 보여주었다.

톰 포드가 출연한 ‘톰 포드 리서치’ 비주얼.

예상대로, 완벽하게 재단된 블랙 슈트와 화이트 셔츠를 입고 보일 듯 말 듯 재킷 안에 매끈한 블랙 실크 스카프를 늘어뜨린 미스터 포드(왜 톰 포드는 미스터 포드로 불러야 어울리는 걸까?)가 LA 밀크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톰 포드 뷰티의 첫 번째 스킨케어 라인 ‘톰 포드 리서치’의 프라이빗한 행사를 위한 작은 룸이었는데, PR 담당자에 따르면 그가 카펫 색상까지 골랐다고 했다. 그의 팀은 톰 포드 행사가 전 세계에 어디에서 열리든 냅킨 컬러와 재질까지 컨펌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데, 개인적으로 나는 (내 남편만 아니라면) 그런 사람들을 정말로 좋아한다. 그 정도의 완벽주의자라면 내 피부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테니까. 영화에서나 볼 법한 우주선 내부처럼 블랙, 화이트, 그레이로만 이루어진 미니멀한 방은 거의 진공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는 간단히 인사한 뒤 빠르고 정확한 단어들로 ‘톰 포드 리서치’에 대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LA 밀크 스튜디오에 마련된 프라이빗 행사장 내부.

“나는 패션 하우스나 몇몇 스킨케어 회사들이 만드는 전형적인 크림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어요. 그저 향을 좋게 하고 패키지를 예쁘게 만드는 데 집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30대 초반부터 피부과에 다니고, IPL과 같은 각종 레이저를 받으며 관리를 해오면서도, 가끔 의사들이 비타민 C나 레티놀 크림 같은 걸 바르라고 주면 그때마다 궁금했죠. 이런 크림들에 실제로 과학적인 ‘뭔가’가 있는 걸까? 언젠가 정말로 그 ‘뭔가’가 있는 크림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톰 포드 뷰티팀에 연구 부서를 만들겠다고 했죠. 에스티 로더 그룹에 ‘그룹의 R&D팀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LA로 데려와 그들이 오직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연구 센터를 만들고, 거기서 톰 포드 스킨케어 연구만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죠.” 그렇게 설립된 톰 포드의 피부 실험실이자 인큐베이터 ‘톰 포드 리서치’는 그 이름에 걸맞게 캘리포니아 바이오 연구소의 피부 전문가로 구성되었다. “3년 넘은 시간을 들여 5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이 두 제품을 만들었어요.” 그에겐 이미 아이디어가 있었다. “15년 전 내 피부과 담당의가 얘기한 적이 있죠. 눈이 부었을 때 물에 담가둔 녹차 티백을 눈에 얹으라고요. 눈가의 부기를 카페인이 흡수하는 원리예요. 어느 날 실제로 티백을 얹고 누웠는데 살짝 이상하더군요. 카페인은 물을 빨아들이느라 바쁠 텐데 눈가가 더 촉촉해졌거든요. 그래서 제품 개발을 시작할 때 카페인을 연구해보자고 제안했죠. 카페인은 마시면 사람을 흥분시키지만, 글리코산과 젖산과 결합하면 피부 턴오버에도 도움을 주고 안색을 개선해요. 그리고 부기를 빼주는 동시에 수분을 충전한다는 사실도 알아냈죠.” 연구팀은 폴리페놀과 카페인이 풍부한 화이트 포슬린 카카오, 그늘에서 자란 녹차의 일종으로 농축된 수분 성분을 지녀 피부 진정에 탁월한 교쿠로까지, 양질의 카페인을 품은 식물을 찾아냈다. “우리는 3가지 카페인 성분을 연구했고, 75번의 실험을 거쳐서 75번째 샘플을 제품으로 만들었어요. 미국 피부과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콘퍼런스 ‘American Academy Dermatological Conference’에 논문을 발표하고, 총 다섯 군데에 이 연구 결과를 실었죠.”

랩에서 연구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미스터 포드.

이 사람이 1990년대 구찌의 슬릿 드레스를 디자인하고, 향수 이름을 ‘로스트 체리’로 짓고, <녹터널 애니멀스> 같은 영화를 만든 사람이라고? 패션&뷰티 업계를 통틀어 동시대 최고의 관능의 제왕에게 카페인과 수분의 관계, 75번의 연구(그는 정확한 숫자를 기억하고 있었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맙소사 글리코산이라니! 그는 진지하고 자부심에 가득 찬 얼굴로 ‘크림 컨센트레이트’를 들었다. 마침내 진짜 과학적으로 ‘뭔가’가 있는 크림을 만든 것이다. “저는 이 크림을 써요.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요. 당신보다 나이가 많아 저는 낮에도 크림을 발라야 한답니다. 부드럽고 폭신한 느낌이 정말 좋아요. 세럼과 크림 둘 다 메이크업 전에 프라이머처럼 사용해도 좋죠. 원료의 순수한 향만 나고 따로 추가된 향은 없어요. 근데 이 스패출러는 왜 필요한 거죠? 그냥 이렇게 듬뿍 바르면 되는데!” 스킨케어 라인업을 구성하지 않고 ‘세럼 컨센트레이트’, ‘크림 컨센트레이트’ 두 제품만 만든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개인적으로 제품 종류가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난 그저 한 번에 확실하게 하는 것을 좋아할 뿐이에요. 아이크림은 필요할 것 같아요. 요즘 바르고 있는데 효과가 좋거든요. 스킨케어는 제품 하나 개발하는 데도 많은 연구가 필요해요. 나는 하나에서 줄기처럼 이어지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메이크업은 좀 다르죠. 캔버스에 페인팅하듯 하면 되는 거니까.” 그는 미니멀한 화이트 패키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아름답고 예쁘지만 그렇다고 골드가 잔뜩 들어간 패키지에 담을 수는 없었어요. 럭셔리하지만 과학적으로 보이길 원했거든요.” 그렇다고 그가 진짜 성분에만 ‘올인’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니멀한 화이트 패키지는 마치 유리와 플라스틱과 도자기가 한데 섞인 듯 차가우면서도 부드럽다. 블랙 메탈 소재로 장식된 세럼의 뚜껑은 마그네틱으로 닫는 순간 착 감기면서 닫히는데 마치 립스틱 같은 느낌이다. 세럼과 크림의 질감은 결코 가볍지 않고 아주 농밀하고 묵직하게 발리며 흡수는 빠르고 피부에는 실키한 부드러움만 남긴다. 그는 과학을 위해 감각을 포기하는 타입이 아니다.

피부에 빠르게 스며들어 피부 속 왼쪽부터 | Tom Ford Research 세럼 컨센트레이트 수분을 지키고, 피부 톤과 결, 광채까지 개선해 생기를 전달하는 세럼. 20ml, 41만원. Tom Ford Research 크림 컨센트레이트 3가지 카페인과 알게 추출물, 히알루론산, 펩타이드를 함유해 피부 깊숙이 오랜 시간 수분을 공급한다. 끈적임 없이 피부에
녹아들어 환하고 활력 넘치는 피부로 가꾸는 크림. 50ml, 51만원.

문득 그가 이런 제품을 개발할 때 염두에 두는 여성이나 뮤즈가 따로 있는지 궁금해졌다. “난 운 좋게도 인생에서 굉장한 여성들이 주변에 많았어요. 카린 로이펠트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면서 뮤즈 같은 존재죠. 하지만 스킨케어에서의 뮤즈는 나 자신인 것 같아요. 나는 남자지만 피부가 어떻게 보이는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늘 관리하거든요. 스스로 테스트도 많이 하고요. 그리고 요즘에는 남성이고 여성이고 다들 아름다운 피부에 신경을 쓰잖아요? 아마 ‘톰 포드 리서치’를 사용하는 사람들 역시 도시에 살고 몸매를 관리하고 피부에 신경 쓰는 사람 일 거예요. 대부분 피부과에 다니면서 정기적으로 관리도 받을 테고요. 이 제품은 딱 그런 고객을 위한 제품이에요.” 제품을 개발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냐고 물었더니 눈빛이 잠시 반짝 빛났다. “나는 정말 뷰티 비즈니스가 좋아요! 음, 정말 힘들거나 어려웠던 점은 없었던 것 같네요. 너무 즐거웠기 때문이죠. 내가 하는 일이 건물을 건설하는 것과 같은 힘든 일이 아니라 다행이에요. 나는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죠.” 당신은 분명히 워커홀릭인 것 같다고 했더니 그가 대답했다. “맞아요. 난 정말 일을 좋아해요. 그리고 이건 일이지만 재미있고요.”

뷰티 에디터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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