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 비아르의 첫 샤넬 오트 쿠튀르 쇼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도서관

2019-08-20T22:17:11+00:002019.08.22|FASHION, 뉴스|

2019 F/W 샤넬 오트 쿠튀르 컬렉션 리포트.

지난 72일 파리 그랑팔레에서 펼쳐진 것은 책을 최고의 친구라고 말한 가브리엘 샤넬의 유산을 좇아 완성된 거대한 원형 도서관. 2019 F/W 오트 쿠튀르 시즌, 샤넬 하우스의 오늘을 이끌어가는 버지니 비아르의 첫 쿠튀르 쇼는 이처럼 책과 문학을 향한 열정 어린 지적 탐사였다.

파리 그랑팔레의 천장까지 닿을 듯한 샤넬의 원형 도서관을 보자 문득 엄청난 독서가로 소문난 고 칼 라거펠트 의 서재가 떠올랐다. 몇만 권에 달하는 책에 둘러싸여 지낸 독서광의 모습은 가브리엘 샤넬로 거슬러 올라간다. 늘 곁에 책을 두고 독서를 즐기던 그녀. 캉봉가 아파트에는 책 옆에 안경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그녀는 의상실에서 피팅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퀼팅 쿠션이 놓인 스웨이드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곤 했다. 그녀는 언젠가 작가 폴 모랑에게 이런 말을 했다. “책은 최고의 친구나 다름없어요.” 오바진 고아원에서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 그녀가 푹 빠져 있었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녀를 꿈의 세계로 안내했고, 그녀는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가브리엘 샤넬의 삶에서 책은 가장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가브리엘 샤넬을 다룬 영화와 책에서 숱하게 보아온 그 모습이 2019년 여름, 파리 오트 쿠튀르 현장에서 되살아났다. 고서에서 나는 가죽 냄새 같은 넘버5 향수를 고안한 가브리엘 샤넬의 혼령이 마치 책장을 넘기며 칼 라거펠트와 조우할 것 같은, 샤넬의 ‘책을 향한 열정’이 가 득한 이 공간에서 샤넬의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의 첫 쿠튀르 쇼가 펼쳐졌다.

30년 가까이 칼 라거펠트 곁에서 무수히 많은 컬렉션을 함께 완성해온 버지니 비아르 역시 책벌레다. 버지니 비아르가 자신의 첫 샤넬 오트 쿠튀르 컬렉션 무대 배경을 도서관으로 만든 것 역시 가브리엘 샤넬과 칼 라거펠트, 그리고 자신의 긴밀한 연결 고리에 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는 책을 향한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 목재 책 꽂이에 책이 줄지어 꽂혀 있는 모습으로 여러 개의 통로 가 나있는 인상적인 원형 도서관을 완성했다. 말과 스타일, 문학과 패션을 두고 오가는, 이들의 특별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기회를 관중에게 선사한 것이다.

파리 그랑팔레에서 펼쳐진 201920 F/W 시즌 오트 쿠튀르 쇼에서 책을 사랑했던 그들의 공통점을 담아낸 버지니 비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무심한 듯한 멋을 풍기고 우아하고 자유로운 여성을 꿈꿨어요. 샤넬이 지닌 매력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지요.” 차분하게 흘러내리는 1930년대 스타일의 룩을 입은 모델들은 양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우아하고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컬렉션은 전체적으로 로맨틱한 보 장식과 곡선을 그리는 실루엣, 깔끔한 그래픽 패널이 두드러졌다. 컬러 팔레트도 매우 흥미로웠는데 블랙과 화이트, 네이비 블루 사이에 플럼, 버건디, 푸크시아 핑크, 블루, 그린, 오렌지 컬러가 중간중간 드러나며 생동감을 더했다. 샤넬 하우스의 투톤 기하학적 구조를 재해석한 새틴 보가 달린 펌프스와 슬리퍼, 블랙 페이턴트 가죽 소재 로퍼를 신고 안경을 낀 모습에서는 시와 소설에 푹 빠진 젊은 시절의 마드 무아젤 샤넬의 모습이 비쳤다.

부분적으로 모든 룩들은 서재에서 발견할 법한 많은 요소들과 연결성을 지녔다. 한층 더 모던하고 편안한 실루엣으로 변신한, 샤넬 하우스의 영원한 클래식인 샤넬 재킷은 펼쳐놓은 책에 비유할 수 있다. 재킷에 따라 버튼의 컬러가 빛바랜 종이의 색상을 멋스럽게 띠는가 하면, 안감 컬러는 책 앞뒤 쪽에 끼워진 백지처럼 하얗게 보였다. 또 어떤 재킷은 칼라 부분에 레이어드 장식을 넣어 책이 약간 열린 채로 있는 책등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다. 트위드 모티프와 플리츠 장식은 책꽂이에 꽂힌 수많은 책을 연상시켰다. 트위드와 벨벳, 울 크레이프 소재로 물결 모양의 드레스와 스커트를 만들어내고, 그 위에 레이스와 시폰 소재를 가미해 볼륨과 경쾌함을 불어넣어 아름다운 도서관에서 여유롭게 독서를 즐기는 기품 넘치는 현대적 여인의 초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한편 데이룩뿐만 아니라 이브닝을 위한 일련의 드레스도 풍성하게 소개되었다. “패션은 애벌레인 동시에 나비다. 낮에는 애벌레가, 저녁에는 나비가 되어라. 애벌레만큼 편한 것도 없고 나비만큼 사랑스러운 것도 없다. 기어가기 위한 옷이 필요한 것처럼, 날기 위한 옷도 필요한 것이다.” 마드무아젤 샤넬의 말처럼 벨트가 달린 롱 드레스 의상은 느슨한 실루엣을 드러내는 가운데 등이 깊이 파이거나 보로 묶은 새틴 소재 드레스가 눈길을 끌었다. 벨벳 소재로 어깨 부분에 보 장식을 더하거나 자수 장식이 들어간 패브릭을 층층이 겹쳐 섬세하게 장식하기도 했다. 마치 책에서 삐어져나온 책장을 염두에 둔 듯 포켓을 여러 개로 나뉘어 다는 형태도 신선했다. 선레이 플리츠 디테일이 들어간 조젯 시스 드레스는 어깨를 훤히 드러냈다. 한 줄로 늘어선 깃털 장식이 단을 따라 달려 있는가 하면, 보 장식을 과감하게 가슴 중앙 부분에 위치하고, 플라워 장식이 뷔스티에 의상에 달리거나 깊이 파인 등 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도 했다. 옅은 주황색 네글리제, 즉 얇은 천으로 된 여성용 실내 가운인이 우아한 의상의 단을 따라 깃털 장식이 찰랑거렸다.

이번 컬렉션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실내복과 외출복 사이의 모호한 경계. 피날레에 등장한 감미로운 파스텔 톤의 파자마 드레스는 샤넬 하우스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파자마를 상기시킨다. 영화 속에서 가브리엘 샤넬이 파자마 차림으로 뛰쳐나와 집을 떠나는 연인 보이 카펠의 차에 탑승하는 장면을 기억하는지. 남성들에 게만 허용되었고 여성에겐 잠옷으로만 존재하던 파자 마에 패션의 생명력을 더해 팬츠 스타일을 대중화 시키며 여성의 자유를 찾아준 가브리엘. 버지니의 쿠튀르 피날레를 장식한 파자마는 기존에 칼 라거펠트가 으레 쿠튀르의 피날레를 장식한 극적인 웨딩 드레스에 비해 한층 더 모던하고 편안해 보였다. 버지니가 가브리엘 샤넬의 패션 창조물 중 하나인 여성을 위한 파자마 드레스를 응용해 쿠튀르의 피날레를 장식한 것은 이처럼 책을 읽는 사적이고도 고요한 공간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진정으로 여성이 원하는 편안하고 우아한 순간에 대한 여성 디자이너의 교감이 아니었을까. 아랫단에 깃털 장식이 달린 페일 핑크 새틴 소재 로브를 통해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자유분방한 여인을 그리면서 말이다.

주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컬렉션 전반에 걸친 샤넬 오트 쿠튀르 공방들의 노하우일 터. 트위드와 울 크레이프 소재에서 쉽게 엿볼 수 없는 유연함이 드러나고, 시폰과 오간자를 레이어드했으며, 조젯 플리츠 디테일을 섬세하게 표현한 곳에 벨벳 소재를 믹스해 특별한 조화를 구현하기도 했다. 멀티 컬러 자수와 깃털 장식을 하나씩 일일이 수작업해 꽃을 새롭게 표현했는데, 나선 모양을 이루는 꽃잎에는 무수히 많은 색조를 이용했다. 마치 서재 한 켠에 자리한 탐스러운 화병의 꽃들을 마주하는 듯 고급스럽고 평온한 관능미의 정수가 깃든 컬렉션은 이 환상적인 도서관에 향기로운 생기를 더했다.

버지니 비아르만의 필치를 통해 모던하게 진화한 오트 쿠튀르는 또 다른 샤넬만의 매력을 자아내며, 새로운 패션 스토리를 완성했다. 마침 두 번의 파리 출장을 통해 버지니 비아르의 크루즈와 쿠튀르 쇼를 연이어 목도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흥미로웠다. 지난 5월, 버지니가 선보인 첫 크루즈 쇼의 의상을 입고 그랑팔레에 근사하게 등장한 이들을 보는 것조차도. 샤넬 앰배서더인 마고 로비가 코튼 트위드 재킷과 저지 레깅스를 입은 캐주얼한 모습으로 등장한 한편 마린 백트는 멀티 컬러의 프린트 모슬린 소재 드레스로 자유분방한 우아함을 보여주었다. 카롤린 드 메그레가 착용한 다크 그린 올리브 색상의 트렌치코트는 더없이 모던하고 시크했으며, 마리옹 코티야르는 네이비 색상 캐시미어 스커트와 레드 램스킨 팬츠를 착용한 채 글래머러스하기도. 같은 크루즈 컬렉션이지만 저마다 개성 넘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결국 버지니가 지향하는 부분은 자기다움의 다채로움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영감을 받은 이번 오트 쿠튀르 쇼마저도 결국은 여성의 일상을 어루만지며 서가를 서성이는 지극히 샤넬스러운 여성의 모습을 흠모하지만, 정작 그 해석만큼은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각 여성의 다채로움을 존중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버지니와 함께한 샤넬 하우스가 아우르는 진정한 여성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