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대생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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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대생이란 누구일까? 방송 현장에서 치열하게 밀레니얼 세대와의 소통법을 고민하는 스브스 뉴스 기획자, 그리고 갑갑한 회사를 탈출해 유유자적 노마드의 삶을 사는 진짜 90년대생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세요

집안 분위기 탓인지 원래 성격이 좀 무뚝뚝하고, 공감에 서툴렀다. 그랬던 내가 20대 초중반이 다수인 팀 속에서 20대를 타깃으로 한 스브스 뉴스를 2014 년 공동 기획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들어 끙끙 앓았다. 하지만 5년간 ‘존버’한 끝에 그렇게 공감 능력이 떨어지던 내가 그들이 마음속에 갖고 있는 ‘핵심 가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다.

기성세대와 90년대생 간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자존감’과 그 자존감을 인정하는 ‘존중’에서 비롯된다. 달라도 아주 다르다.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는 학창 시절부터 존중이라는 걸 받기가 쉽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 하거나, 하다못해 싸움이라도 잘해야 했다. 잘하는 게 없으면 존재감 없이 묻혔다. 나도 그 존중 한번 받아보려고 속에서 욱하는 것이 올라와도 참았고, 하라는 공부나 했던 것 같다. 하지만 90년대생에게 존중이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 누구도 타인의 존엄성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성세대는 전체를 위해 개인이 참는 것이 곧 정의였다면, 밀레니얼 세대는 개인 한 명도 피해받지 않도록 전체가 지켜주는 게 바로 정의다. 기성세대의 경우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억울하게 맞으면 ‘그냥 참으라’ 했다. 반면 90년대생은 부당한 체벌뿐 아니라 심지어 교사의 농담 섞인 언행도 상처를 줬다면 ‘절대 참지 않고’ 집단적으로 저항한다. 학교, 회사 등 다양한 조직에서 ‘갑질’ ‘폭언’ 등과 관련한 폭로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여성 혐오, 갑질 논란 등 최근 몇 년간 온라인에서 이슈가 되는 대부분의 갈등은 대한민국 20대의 핵심 가치(Core Value)를 건드려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90년대생은 흔히 혼밥과 혼술을 즐기고 소확행을 추구하며,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챙기고, 꼰대가 싫어 늘 퇴사를 꿈꾸며, 그러면서도 취업난 때문에 9급 공무원 되려고 노량진을 전전하는 세대로 묘사된다. 현상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20대가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들여다본 분석은 찾기 어려웠다. 이런 키워드들엔 하나같이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세요’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내가 작년까지 근무한 스브스 뉴스팀의 슬로건은 ‘뉴스에는 위아래가 없다’ 다. 20대는 업무 관련한 책임과 권한에 있어서는 위아래가 있을지 몰라도 사람으로서는 위아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들이 사회로 진출하면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위아래 간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위라는 이유로 함부로 던지는 말과 행동이 그들의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 해선 안 될 말과 행동도 너무 많아 답답하다. 기성세대는 ‘일(공부) 못하는 자는 존중받을 자격도 없다’는 자신의 학창 시절 가치를 자기도 모르게 갖고 있지만, 90년대생은 ‘업무 성과와는 무관하게 누구나 존중받는 조직’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 어떤 상황에서 그 누구도 존중받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기성세대와 90년대생 사이 갈등도 별로 없을 것이고, 있다 해도 매우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다. 나는 이제 겨우 90년대생의 마음에 대해 약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아직 많이 부족하다.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일까? 입장을 바꿔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느냐고. 당신에 대해 함부로 이해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 른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평생 열심히 해도 완성하기 어려운 높은 가치인 것 같다. 그들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글 | 하대석(SBS 보도본부 SDF팀 차장)

정체를 묻지 마세요

상반기 내내 화제의 책이었던 <90년생이 온다>를 얼마 전에야 펼쳤다. 꼰대 같은 상사에게 주눅 들지 않고 맞서는 것, ‘워라밸’을 어떤 근로 조건보다 중시하는 것, 임원을 달 때까지 회사에 다닐 생각이 전혀 없는 것. 나열된 90년생의 특징을 보며 피식피식 웃으며 공감했다. 그런데 90년생을 ‘9급 공무원을 원하는 세대’로 규정하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됐다.

주변에도 공무원에는 전혀 관심 없는 친구가 대부분이다. 기성세대가 유추하기엔 ‘월급이 적어서 그런가?’ 싶겠지만, 기피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30년 동안이나 같은 회사에 다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공무원인 친구가 단톡방에 “상사가 싫은데 난 퇴사도 못 하네…”라는 말을 할 때마다 나와 친구들은 그녀의 ‘퇴사 불가능성’에 대해 진심으로 위로를 건넨다.

나는 지난해 봄 퇴사한 후 지금까지 프리랜서로 일해오고 있다. 앞으로 회사에 다니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회사가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였다. 미디어 매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어느 날 갑자기 ‘SNS 콘텐츠 기획 및 채널 관리’라는 역할이 주어졌다. 야근과 박봉, 온갖 심부름을 해야 하는 막내 역할을 감수하면서도 회사에 다닌 이유는 일을 배우며 능력치를 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리어 내가 상사에게 SNS 사용법과 20대가 선호하는 콘텐츠에 대해 설명하는 상황이 빈번해지면서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지난 일 년간 나는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하며 한량 생활을 마음껏 즐긴 백수인 적도 있었고, 여행 애플리케이션의 콘텐츠를 작업하기도 했으며, 누적 방문자 수 50만 명을 넘긴 블로거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퇴사 후 일 년간의 여정을 담은, <제가 어떻게 살았냐면요>라는 제목의 독립출판물을 펴내기도 했다. 이쯤 되니 나도 내 정체를 모르겠다.

출장차 들른 리스본에서 만난 또래 여성 역시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20대 후반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동네 식당의 홀 직원으로 취직했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남미 출신의 알바생과 친해져 스페인어를 공부할 목적에서였다. 그렇게 익힌 스페인어 덕분에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다양한 현지인 친구를 사귈 수 있었으며, 식당에서 일하며 번 돈은 리스본에 정착하는 비용에 보탰다고 했다. 현재 그녀는 리스본에서 포르투갈어를 배우면서 동시에 그곳의 케이팝 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한 달 동안 매일 한 편의 글을 독자의 메일로 보내는 연재 프로젝트를 하며 스타가 된 이슬아 작가 또한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작가’보다는 ‘연재노동자’로 칭하며, 직접 출판사를 차려 책을 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독립출판업자’라고 소개한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도 누드모델, 웹툰 작가, 글쓰기 교사 등의 일을 하며 변화무쌍한 정체성을 편력했다.

이렇듯 기존의 단편적인 분류법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청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분류법을 가지고 요즘 세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건 더는 의미가 없다. 그들은 이미 기성세대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살고 있으니까. ‘퇴사와 이직을 밥 먹듯 하고’, ‘한 우물만 파지 않으며’, ‘이 일 저 일에 손대는’ 젊은이들을 보며 의아해하는 기성세대를 발견한다면 가까이 다가가 귀에 속삭여주고 싶다. “그들에게 정체를 묻지 마세요. 그 순간 당신은 ‘꼰대’가 된답니다!” 글 | 이정미(프리랜스 에디터)

피처 에디터
김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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