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문화를 살려 브랜드를 세운 디자이너 3인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다문화 디자이너

2019-06-10T21:32:53+00:002019.06.11|FASHION, 트렌드|

어린 시절의 나고  자란 환경은 한 사람의 정체성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다. 패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개인의 정체성이 패션이라는 매개체를 만나 얼마나 새롭게 확장될 수 있는지. 우리는 그 결과물을 통해 인문학적 식견과 미학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베트멍과 발렌시아가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 고샤 루브친스키는 모두 서구의 영향과 구소련의 애국주의가 혼재된 90년대 초반 러시아 스타일을 비롯해 많은 것을 보고 자란 세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뎀나는 조지아 출신이고, 고샤는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 둘 모두 구소련이라는 동일한 키워드를 갖고 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확연히 다르다. 루브친스키의 뿌리는 러시아적 세계지만, 자신의 관심사인 러시아 스케이터 친구들이 입는 옷들로 발전했고, 지금까지도 진정성을 가지고 그 길을 걷고 있다. 이에 반해 뎀나는 그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최근 그는 2019 S/S 베트멍 컬렉션에서 조국 조지아에서 남북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아픈 기억과 두려움에 직면하기로 했다. 그는 ‘가족과 전쟁’이라는 키워드를 앞세워 컬렉션을 만들었고, 어렸을 때 입은 후디, 사촌들과 손으로 만든 옷을 재해석해 런웨이에 올렸다. 또한 그는 조지아의 일반인 40여 명을 런웨이에 세움으로써 낯선 유럽으로 발을 내디딘 이방인인 자신을 상기했다. 그 모습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연약한 순수를 기억한 것. “그것은 억압적인 정치 상황을 겪어야 했던 젊은이들을 위한 목소리를 상징합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말할 수 없었고, 진정한 자유는 없었던 시절의 아픔과 번민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의 말처럼 옷에는 우크라이나, 터키,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깃발이 들어 있는데, 이는 그가 젊었을 때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다. 마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거친 청년들의 의상 같고, 빈티지 숍에서 건져 올린 아이템 같은 뎀나의 옷에는 자신과 조국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렇듯 패션은 자신을 탐구하는 소재이자 사회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도구로 기능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러시아에 이어 최근 패션계에는 이란, 이스라엘 등 아시아 서남부에 있는 나라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중 남성복 디자이너 파리아 파르자네는 이란 문화를 중심으로 디자인을 전개하는데, 패션을 통해 이란에 대한 오랜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으려 한다. 그는 마치 이란의 홍보대사처럼 SNS 계정에 고전적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운 이란 문화를 담은 사진과 신문 기사, 낯선 이란 아티스트들을 소개하며 우리가 몰랐던 이란의 모습을 소개한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사람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 흥미로운 건 그가 옷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의 옷은 이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적인 페이즐리 문양과 모래와 군복을 상징하는 듯한 베이지색이 주를 이루며, 그 옷을 가지고 이란의 평범한 가정집과 가게, 마을에서 룩북을 찍는다. 그를 통해 이란이라는 나라의 색을 접하고, 그곳의 사람들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다. 동시에 그는 전통적인 것을 현대적인 것과 영리하게 접목해 그것이 무엇보다 미래적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이란 출신 디자이너가 아닌, 영국에서 나고 자란 디자이너라는 것. 그는 어린 시절 이란 문화의 아름다움에서 깊이 감명을 받아 이란 문화를 접목한 브랜드를 만들게 되었다. 한 개인의 탐구와 매혹이 패션이라는 매개체를 만나 얼마나 중요해질 수 있는지, 나아가 한 나라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패션을 통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지난해 파리에서 만난 헤드 마이너는 실제로 이스라엘 출신이다. “이스라엘에는 여전히 군인이 많이 있어 유니폼이 익숙한 풍경이다. 그들의 액세서리는 총이며, 그들은 언제나 카키색이나 베이지색 유니폼을 입고 있다. 종교적인 유니폼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나의 컬렉션 안에 스며드는 것 같다.” 헤드 마이너의 옷에는 그가 나고 자란 나라의 특수한 정체성이 모던한 옷들과 만나 이룬 신선한 시너지가 가득하다. 최근 그는 2019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이는 다양한 문화와 관습에 대해 세상의 관심이 얼마나 넓어졌는지를 증명한다. 최근 런던에는 이렇듯 다양한 뿌리를 가진 디자이너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추세다. 2016LVMH 프라이즈 우승자 하프 자메이칸 디자이너 웨일즈 보너는 일찍이 에티오피아의 노예였던 말리크 암바르가 인도의 통치자가 된 이야기를 재해석하는 등 흑인의 문화를 탐색하며 받은 영감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는 컬렉션을 만들어 왔고 다양한 나라에서 사랑받았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 귀담아들어주지 않은 역사 속 이야기를 패션으로 풀어내는 그들의 선택과 행보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이다. 그녀를 필두로 서인도제도계 영국인 비앙카 손더스를 비롯해 이스라엘 출신 디자이너 로니 일란은 지금 런던 패션 신에서 특히 주목하는 신예들이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행보는 한 해 지나 없어질 시대의 흐름이나 트렌드가 아니다. 이는 패션 안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세계화가 이제야 시작되었다는 뜻도 아니다. 패션이 한 인간의 고유성을 중시하고, 개개인의 정체성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의미다. 패션은 원래 자기 표현의 수단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가끔 패션을 통해 나를 숨기고, 포장하기도 하지만, 요즘 디자이너들은 패션을 통해 나를 드러내며,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탐구한다.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것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그 솔직함이 바로 관심의 이유다. 우리는 가식의 시선을 벗어던지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문화적 지식의 범위를 넓히면 된다.

 

이스라엘 출신 디자이너 로니 일란(Roni Ilan)

브랜드 소개를 부탁한다.  런던을 기반으로 한 기성복 브랜드로, 여성복과 남성복 사이의 경계를 영리하게 흐리고 있다는 게 포인트다. 주로 감정적 연결성을 유발해 옷을 만든다.

남성복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유니섹스 브랜드가 되었다. 이유가 있나? 남성복을 공부했지만, 내가 진정으로 배운 것은 옷을 만드는 법과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법이었다. 나는 늘 남자 옷과 여자 옷 둘 다 입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들었다. 이러한 경험이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는가? 이스라엘에서 자란 경험이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로 유아기와 청소년 기의 단편적이고 흐릿한 기억을 자주 떠올린다. 이스라엘에 있는 가족 생각 도 많이 하며, 이스라엘 출신은 물론, 비이스라엘 아티스트도 나에게는 큰 영감이다. 어쨌든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머니 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옷과 내 어린 시절의 사진까지, 나를 둘러싼 모 든 것이 영감이 된다. 런던에 산 지 11년이 되었는데, 그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번 2019 S/S 컬렉션의 영감은 어디서 찾았는가?  1989년 가족이 사해로 여행을 떠난 때의 사진을 찾으면서 시작되었다. 그 시절의 느낌을 떠올리면서 사진에 그 느낌이 담겨 있는 지 살폈다. 하지만 내 기억은 불완전했고, 부족하거나 과장된 부분이 많았다. 이번 의상을 통해 그러한 아이디어 자체를 표현해봤다.

당신이 웹사이트에 올린 필름을 봤다. 기본적인 제작 과정과 필름을 통해 예술적 성향이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하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시즌 사이에, 새로운 컬렉션에 대한 연구 개념으로 필름을 제작한다. 2019 S/S 를 위해 만든 필름은 제임스 레포드(James Wreford)와 협업한 것으로, 이스라엘에서 촬영했다. 가족 여행을 떠난 세 형제자매 역으로 배우를 캐스팅했고, 가족이란 환경 내에서 느낄 수 있는 위안과 불안의 테마를 탐구했다. 텔아비브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도 촬영했는데, 매우 재미있었다.

영감을 얻기 위해 특별히 찾는 아티스트나 뮤지션이 있는지? 이번 2019 A/W 컬렉션을 위해서 90년대 이스라엘 뮤지션 아비브 게펜(Aviv Geffen) 의 이미지를 참고했다. 할머니 집 거실에서 2019 S/S 컬렉션을 입은 청소년을 촬영하고 있는데, 아비브 게펜이 스무 살쯤 한 인터뷰에서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전통적인 거실 배경 앞에서 입은 도발적인 고딕 스타일 패션, 그리고 그의 의상이 옆에 앉은 나이 든 여성분과 이루는 대비는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당신의 브랜드를 여성들이 애용하면서 옷의 ‘성별’이 사라졌다. 앞으로는 정체성에 대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가?  내가 전달하고픈 메시지는 여성복과 남성복 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체성’이란 단어는 매우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다. 만약에 ‘정체성’이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개념이라면, 그것 또한 때에 따라 균열되고 불완전하게 변할 수 있다.

 

이란 문화를 토대로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 파리아 파르자네(Paria Farzaneh)

당신의 브랜드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이란의 문화적 유산을 의류와 결합시켜 소개하는 브랜드다.

이란에서 나고 자라지 않고, 어떻게 이란 문화를 접목한 브랜드를 하게 되었나? 나는 영국에서 태어났고 영국 북동쪽 지방에서 자랐다. 그러나 이란 문화의 전통과 아름다움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 활기찬 인상을 주는 재단 방식과 독특한 질감을 가진 스포츠웨어를 제작하고 있다.

당신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란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고 이란의 이미지를 공유한다. 그것들을 공유하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나는 현대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생의 여러 부분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SNS를 잘 못 활용하고 있다. SNS는 긍정적인 상호작용과 영향을 주고받는 매체여야 한다. 나는 SNS에 다음 시즌의 메인이 될 참고 자료를 공유하기도 한다. 큰 그림을 위한 작은 실마리 같은 것 말이다. 이런 나만의 방식은 특정한 제품을 팔기 위해 하는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라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브랜드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은 간혹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기 위해 힘을 쏟는데, 그보다는 진정성을 가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브랜드를 프랭크 오션이나 방탄소년단이 입은 걸 봤다. 그들이 당신의 옷을 좋아 하는 이유는 무얼까? 누군가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처음에 받은 인상이나 정서적인 이끌림이 더 강력한 것 같다. 무언가를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확실하게 주고받는 것.

‘우리 주위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빠져서 영감을 잃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라는 SNS에 올린 문장이 인상적이다. 소셜미디어가 성행하면서 사실과 ‘편집된 현실’을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사람들이 취약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과,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보는 매체를 가지고 있으면 보는 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당연히 생기게 된다. 계속 배우고자 하고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나는 그것 을 통해 배우며, 소통할 뿐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가장 흥미롭게 바라보는 사회적 현상은 무엇인가? 인터넷!

 

서인도제도계 영국인 비앙카 손더스(Bianca Saunders)

브랜드 소개를 부탁한다. 나를 키우고 형성한 시간과 내가 받은 문화적 유산을 탐구해 만든 의류 브랜드다. 내 컬렉션엔 과잉된 남성성에 대한 도전과 오늘날 런던에서 서인도제도계 영국인으로 살아가는 데 대한 고찰이 담겼다. 이러한 개념을 기반으로 간결한 테일러링과 풍성하면서 느슨한 주름 장식과 셔링을 결합 시켰다. 내 목표는 새로운 종류의 미를 제시 하는 것이고, 여성스럽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정반대로 남성적인 실루엣 속에 절묘하게 짜 넣는 거다.

브랜드를 시작한 이래 보여주고자 한 가치관 은 무엇인가? 남성복을 디자인하는 여자로서, 작품을 통해 남성성에 대해 논의하려면 내 주위 남성의 의견을 꼭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업할 때 직접 체험을 매우 중시 한다. 영국왕립예술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때 남자 친구들을 인터뷰하면서 연구용 필름을 만들었다. 이 필름을 통해 남성성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고, 현재 내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인터뷰를 통해 남성 안의 여성적인 생각이 잘 표현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잘 표출할 수 있게 해주는 옷이 필 요함을 느꼈다.

남성복을 통해 여성성을 탐구한다는 게 매우 흥미롭다. 남성복의 어떤 부분이 당신의 관심을 끌었는가? 남성복이 남성복으로 규정 되려면 전통적인 구조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 맘에 든다. 내 생각에 남성복에 다양한 디자인을 도입하기엔 아직 미학적인 부분이 부족한데, 여성적 면모를 균형 있게 적용해 이를 바꿀 수 있다고 느낀다. 이에 대한 접근법은 매우 다양하다. 아직 남성복이 작업복과 테일러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전부 찾아낸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랐는가? 어린 시절의 경험이 컬렉션에 많은 영향을 줬나? 그렇다. 나는 런던 남동부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살고 있다. 내 가족도 전부 남부에 살고 있다. 런던 동부가 더 빠른 페이스에 산업화된 지역 이라면 남부는 그보다 더 교외라는 느낌이 강 한 지역이다. 이런 환경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주변 친구와 가족이 영감이 된다.

이번 2019 S/S 시즌은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가? 로나 심슨(Lorna Simpson) 작품전 <대답할 수 없는(Unanswerable)>에서 텍스트와 연출된 이미지를 인상 깊게 병치한 작품을 보았는데, 묘사의 본성, 정체성, 성별, 인종, 역사 등에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해줬다. 로나는 발견된 이미지 내에 언어를 도출하여 작품의 원천으로 삼는데, 1950~1970년대에 발행된 빈티지 잡지 <에보니>와 <제트> 매거진을 활용했다. 이 잡지들은 주로 라이프스타일, 문화, 정치를 흑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흑인의 삶을 잘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전을 통해 2019 S/S 컬렉션 ‘제스처’에 대한 연구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최근 패션업계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체감한 적이 있는가? 앞으로 표현하고 싶은 미학은 어떤 것이 있는가?  현재 패션업계의 변화 속도는 느린 편이다. 가장 많이 바뀐 건 런웨이 위에서의 다양성이다. 더 많은 변화를 위해선 유색 인종 디자이너들 이 큰 브랜드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더 지지 해줘야 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미학은 더 인간적이고, 모방적이고, 우아한 남성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