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을 떠난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왜 알레산드로 멘디니인가?

2019-03-25T12:36:20+00:002019.03.25|FEATURE, 컬처|

우리 곁을 떠난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

그를 모르는 사람도 그가 디자인한 와인 오프너나 의자는 안다. 밝은 기운과 위트가 넘치는 작은 물건부터 한 지역의 감성까지 뒤바꾸는 건축을 선보인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 (Alessandro Mendini)의  부고를 뒤로하며 한 거장의 총천연색 디자인 세계를 탐닉해본다.

 

인간적인 ‘패치워크 유토피아’를 꿈꾸다

밀라노 출신의 디자이너, 아니 ‘밀라노를’ 디자인하고 떠난 마에스트로들이 있다. 브루노 무나리, 조 폰티, 아킬레 & 피에르 자코모 카스틸리오니, 루이지 카차 도미니오니. 그리고 지난 218일, 현존하던 이탈리아 최고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가 87세의 나이로 그 계보를 이은 인물이다.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백발 소년 같은 이 할아버지 디자이너는 1970년대 이탈리아의 급진적 디자인 운동에 적극 앞장선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통적인 규범과 실용주의 일색의 디자인 흐름을 거부하고, 철저히 인간과 가치에 집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선두에 늘 그가 있었다. 아티스트적 영감이 충만했던 멘디니는 한 손에는 문학, 다른 한 손에는 회화를 쥐고 아트와 디자인의 경계를 오가는 건축, 제품, 그래픽,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결과물은 과장되게 표현한 곡선이나 비대칭 형태에 화려한 컬러를 과감하게 사용한 코르크 따개부터 버스정류장과 뮤지엄까지 다양했다.

그는 장식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장식을 극도로 질색하는 기능주의’를 질색했고, 이미 존재하는 바실리 의자, 칸딘스키 소파 등에 장식을 더해 ‘리디자인’함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는 걸 즐겼다. “저는 발명도 하고 복제도 합니다. 왜냐면 이 어마어마한 우주 아래 상품 중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존재하니까요. 중요한 것은 나의 ‘복제’만큼은 ‘오리지널’하다는 겁니다.” 자신의 에세이집 <Scritti> 중 ‘가짜의 오지낼리티(Originality of The False)’ 챕터에서 그는 말했다. 나는 그의 리디자인에 늘 등장하는 밝은 컬러와 위트, 휴머니즘의 기원을 멘디니 특유의 ‘패치워크적 애티튜드’에서 발견한다. 여러 가지 색상과 무늬, 소재, 크기, 모양의 천 조각을 서로 꿰매는 패치워크는 그의 작품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는 개개인의 작은 스토리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발상이 된다는 그의 평소 신념이 묻어나는 부분이다.

1931년 밀라노의 부유한 집안에서 미숙아로 태어난 그는 요람이나 인큐베이터 대신 피에로 포르탈루피가 디자인한 폭신한 대형 암체어에 뉘어졌다. 지그재그 패턴을 한 멀티 컬러 벨벳 원단에 꽃잎 무늬가 그려진 커버의 의자였다. 그리고 그가 난생처음 바라본 벽면에는? 알베르토 사비노가 재해석한 ‘수태고지(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회임을 알리는 그림)’가 걸려 있었다. 그는 이를 회상하며 “그러니까 내 생애 첫 리빙 공간은 티롤리안 스타일의 미래적인 암체어와 형이상학적인 회화로 꾸며진 곳이었죠” 하고 웃곤 했다.

멘디니가 자신이 디자인한 가구나 인테리어를 불허한 곳도 있다. 바로 밀라노 비아산니오(Via Sannio)에 있는 그의 오랜 아틀리에이자 집이다. 이전에 살던 세입자들의 사연이 담긴 숱한 흔적을 훼손하기 싫었기 때문이란다. 작은 발코니가 딸린 20세기 사회주의적 공동주택 건물의 집 구석구석에는 멘디니가 입주하기 전 살았던 일용직 노동자, 금속 노동자, 미장이 등 하층 계급의 빈곤과 고난의 흔적이 스며 있었다. 특히 멘디니의 침실 바닥에는 황토색과 물 빠진 초록색 조합으로 만들어진 ‘끔찍한’ 디자인의 1960년대 타일이 있는데, 그는 이조차 들어내지 않고 놔뒀다. 당시 디자이너들이 무비판적으로 복제해낸 과거의 오류를 두고두고 상기하기 위해서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부끄러운 흔적도 그에게는 사람 냄새 나는 패치워크의 재료가 됐다.

잡지 편집장과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경력을 생각하면, 멘디니는 훌륭한 스토리텔러이자 디자인 비평가이기도 했다. 그는 <카사벨라>에서는 당시의 래디컬 디자인을, 직접 창간한 <모도>에서는 다학제적 접근 방식을, <도무스>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발 빠르게 소개하고 부지런히 비평했다. 그리고 20104월, <도무스>를 떠난 지 30년 만에 편집장으로 복귀한 그는 잡지를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전면 리뉴얼하는 한편 과감히 슬로건을 바꿨다. ‘뉴 유토피아를 위하여(For a New Utopia)’. 이전의 슬로건 ‘집을 위한 잡지(Magazine For Home)’가 도시 속 삶에 어울리는 집과 오브제를 소개했다면, 새롭게 내건 이상에는 건축과 디자인을 희망 찬 유토피아를 향한 발걸음으로 해석하고자 한 꿈이 읽힌다. 멘디니의 유토피아는 기계적이고 기능적이라기보다 유머와 정신적 교감이 원활한 곳이었다. 어렵고 도도하기보다 긍정적이고 단순하고 따뜻한 그런 세상 말이다. 더 많은 이들의 일상에 유토피아를 들여오고자, 멘디니는 한평생 영혼과 친근함을 디자인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글 l 김은아(칼럼니스트)

숨은 명작들이 품은 영생의 디자인

잘 가시오 나의 스승님! 스승님은 그렇다 쳐도 ‘나의’라는 표현이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사유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알레산드로 멘디니> 저자로 만나 책이 완성되기까지 3년간의 깊은 인간적 교류와 그 이후에도 이어진 여러 인연이 이런 표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나는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명작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멘디니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 꽤 많다. 이탈리아 베로나 근처에 있는 비블로스 호텔(Byblos Art Hotel)의 의자 역시 그런 디자인 중 하나다. 의자 모양은 골동품점에서 막 사 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 입힌 색과 무늬는 의자에 담긴 고전성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멘디니의 감성이 가득 느껴지는 현대적인 색과 면의 구성을 보여준다. 흔히 디자인의 가치를 말할 때 ‘기능성’을 많이 말하는데, 조형적인 아름다움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디자인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오래전에 디자인된 이 의자는 지금 봐도 촌스럽거나 유행에 뒤처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과거도, 현재도 아닌 자신만의 독특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의자. 멘디니는 단지 외형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시간까지 디자인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의자는 디자인적으로 영생을 얻었다. 그가 1978년에 디자인한 프루스트 의자의 콘셉트는 비블로스 호텔에 있는 의자의 업그레이드판이라 할 만하다.

유명한 와인 오프너, 안나G의 얼굴을 응용한 안나 Gong을 처음 만난 것은 멘디니의 아틀리에에서였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제품 상태였는데, 그때의 충격과 설렘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거장들은 그렇게 힘들여서 작업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교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안나 Gong은 하나의 군더더기도 없이 너무나 쉽고, 정확하게 정곡을 찌르는 디자인이었다. 세워진 안나 Gong의 얼굴은 기념성이 강한 캐릭터 상으로서도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얼굴을 펴면 파티용 디저트 플레이트가 된다. 간단한 구조이지만 강한 반전을 가지고서 마음을 홀리는 디자인이다.

1983년 멘디니가 전성기를 달릴 때 주도한 알레시의 ‘커피 앤 티 피아자(Coffee & Tea Piazza)’ 프로젝트는 포스트모던 디자인을 대표하는 작업으로, 알레시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드높임과 동시에 멘디니의 명성도 역사적으로 각인시키게 만들었다. 지금은 기억에서 멀어진 디자인이지만,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디자인이다. 당시 참여했던 건축가들의 면면도 대단한데, 고전 건축의 이미지를 새로운 디자인 양식으로 녹여낸 그들의 뛰어난 상상력과 조형적 능력은 지금 봐도 손색이 없다. 색채가 없는 은 재료를 멘디니가 어떻게 다뤘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거장은 색채만큼이나 형태도 인상 깊게 다뤘다.

100% 메이크업’ 역시 알레시에서 멘디니가 이끈 디자인 프로젝트다. 사진으로만 접했을 때는 뭔가 싶었는데, 멘디니가 거주하는 집 주방에 이 시리즈가 진열돼 있는 것을 보자마자 매료된 기억이 난다. 멘디니는 그가 선별한 세계적 아티스트 100명에게 큰 도자기 병을 주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렇게 100개의 도자기를 한 세트로 한 총 100개 세트가 한정 생산됐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주방용품을 만드는 기업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아티스트들이 거기에 그림을 그린, 디자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황당한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알레시는 예술품을 만드는 기업으로서의 인지도도 다졌다. 100% 디자인은 벽면 하나에 세계적인 아티스트 100명의 작품을 진열해놓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실은 많은 사람들이 탐낼 만한 프로젝트였다. 도저히 실패할 수 없는 기획이었던 것이다. 멘디니는 예술적인 감각뿐 아니라 상업적인 감각도 대단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쉼 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내면서 내일을 기대했던 거장의 행보는 이제 멈췄다. 그 매력적인 디자인을 더는 새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그는 한 인간으로서 해낼 수 있는 한계를 이미 예전에 넘어선 듯하다. 멘디니가 남긴 디자인은 남은 사람들에게 큰 유산이 될 것이다. 부디 안녕히 가시기를. 글 l 최경원(<알레산드로 멘디니> 저자)

우리가 몰랐던 멘디니와 건축의 상관 관계

산업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진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생애를 추적하면 운명적으로 맞닥뜨리는 단어가 있다. 바로 건축이다. 이탈리아의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과목은 ‘법’과 ‘건축’이라는 농담이 있다. 여기에는 건축이 이탈리아 문화를 지탱하는 근원적인 요소로, 모든 조형 활동의 근간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실제 이탈리아에서는 신체와 맞닿는 패션이 인간의 기본 활동 중 ‘의(衣)’를 책임진다면, ‘주(住)’에 대한 다양한 지혜는 건축 교육을 통해 실현된다. 건축을 배운 학생은 건축뿐 아니라 공간, 물건, 가구, 그래픽, 패턴 등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디자인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한다. 조 폰티, 카스틸리오니 형제, 마르코 차누소, 안드레아 브란치, 마리오 벨리니, 안토니오 치테리오 등은 모두 건축을 전공하고 타고난 조형성과 아이디어를 다양한 매체로 표출하며 이탈리아 창의 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은 대표적인 산업 역군들이다. 멘디니도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밀라노 공대에서 건축을 공부한 후, 1960년부터 10년간 당대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예술가로 폭넓게 활동한 마르첼로 니촐리의 건축 사무소에서 일했다. 그리고 1970년부터 1980년대 내내 기능주의로 귀결되는 모더니즘 디자인에 항거하는 ‘반(反) 디자인’, 하늘 아래 독창적인 것은 없으니 기존 디자인을 재가공해 다양성을 확보하자는 ‘리디자인’ 개념을 주창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끄는 급진주의자로 활동했다. 이탈리아의 디자인 행동 그룹인 ‘알키미아’의 핵심 인물도 멘디니였다. 전 세계를 호령한 신화적인 건축·디자인 잡지 <도무스(Domus)>의 편집장이기도 했던 멘디니는 후대 건축에 큰 변환점을 이룬 건축가들이 아직 업계에서 제 명성을 날리기 전에 <도무스>의 커버 인물로 선정하며 선구안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렇게 소개한 인물이 바로 프랭크 게리와 자하 하디드다. 산업디자이너 마크 뉴슨은 이렇게 회고한다. “시드니에서 디자인을 배우던 학생에게 <도무스>는 성경과 마찬가지였다. 매달 항공편으로 날아오는 <도무스>를 읽으며 세계 디자인의 세계로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잡지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한 멘디니가 58세의 나이에 친동생인 프란체스코 멘디니와 함께 ‘아틀리에 멘디니’ 라는 회사를 세우며 필드에 늦깎이로 진입한 결정적 계기도 건축이었다. 이탈리아의 주방&생활용품 브랜드, 알레시의 회장이 멘디니에게 자신의 집 설계를 의뢰했기 때문이다. 이후 아틀리에 멘디니가 본격적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린 계기 역시 네덜란드의 흐로닝어르 뮤지엄(Groninger Museum) 건축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멘디니는 그 혼자 나서지 않고, 적절한 사람을 골라내는 편집장 경험을 살려 현재 디자인계에서 거장으로 불리는 미켈레 데 루키와 필립 스탁 등을 불러 모았다. 건축물의 각 부분을 떼어 각자의 특성을 살린 개성 있는 내외관 디자인을 하고, 멘디니는 이를 조립하듯 유기적으로 연결해 일종의 컬렉션을 완성했다. 멘디니 자신은 본관 중앙 건물을 담당했다. 그리고 보통 건물의 외곽에 자리하는 수장고를 건물 중앙에 배치해 기존의 관점을 뒤엎거나, 매력적인 금빛 사각형 건물에 각종 패턴과 색점을 입혀 심미성과 감성을 자극하는 등 콘셉트부터 포스트모던한 건물을 완성했다. 멘디니는 생전에 이 뮤지엄을 프로스트 의자 첫 번째 에디션, 와인 오프너 안나G와 함께 자신의 인생 작업으로 꼽은 바 있다. 이후 그는 알레시 사옥과 물류 창고 건축을 맡아 동화적인 감각을 극대화한 ‘꿈의 공장’을 현실화했고, 나폴리 지하철 역사를 리노베이션하며 통산 세 번째 황금 컴퍼스상을 받는 등 산업디자이너로 최고의 명성을 날리는 중에도 공간과 건축에 대한 열정을 결코 줄이지 않았다.

런던의 디자인 뮤지엄 관장을 역임한 세계적인 디자인·건축 평론가, 앨리스 로손은 멘디니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그는 사물과 공간의 창조자로서도 위대했지만, 예술가, 편집장,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다른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멘디니가 없었더라면 현재 우리의 삶이 크게 달라졌을 이유다.” 낙천적인 색으로 가득한 건축물을 통해 혹독한 현대 도시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은 멘디니. 그의 건축가로서의 면면이 여러 도시 곳곳에 인장처럼 남아 있다. 글 l 전종현(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