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지에서 펼쳐지는 바우하우스 100주년 기념 행사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바우하우스 연대기

2019-03-04T15:44:46+00:002019.03.08|FEATURE, 컬처|

14년간 운영된 바우하우스의 궤적.

올해 바우하우스 개교 100주년을 맞아 독일 국내외에서 600여 개의 기념행사가 쏟아지고 있다. ‘바우하우스 100 (bauhaus100.de)’이라는  이름 아래 한데 묶인 행사들은 바우하우스가 거쳐간 바이마르, 데사우, 베를린을 비롯해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전 세계 각지에서 펼쳐진다. 1919년부터 1933년까지 14년간 운영된 바우하우스의 궤적.

에버하트 슈라멘(Eberhardt Schrammen), ‘다섯 개의 손 인형’, 1923년경, 쾰른대학교 연극컬렉션(Dramatics Collection)으로부터 클라식 슈티프퉁 바이마르(Klassik Stiftung Weimar)에 영구 대여.

바우하우스의 행보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존재했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격동적 역사와 함께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패배하면서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했고, 이듬해 공화정을 상징하는 대통령제와 함께 새 헌법이 선포됐다. 이 헌법이 제정된 곳이 바로 바이마르다. 이 도시에서 같은 해 41일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 시립 바우하우스가 설립됐다. 그로피우스는 미술, 디자인, 공예, 건축, 산업을 융합해 전후 정치 사회적 변화는 물론 급변하는 산업화 사회에 걸맞은 현대적 일상의 미학을 창조하고자 했다. 바로 이 바우하우스의 요람 바이마르에서 오는 46일 학교의 태동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가장 오래된 컬렉션을 자랑하는 ‘바우하우스 뮤지엄 바이마르’가 개관해 7일까지 각종 특별 콘서트, 퍼포먼스, 투어 등이 진행된다. 이 뮤지엄은 나치 독일 시절 설계된 대형 건물 단지 ‘가우포룸(Gauforum)’과 동독 시절 구획된 사회주의적 도시 광장의 인근에 자리해 파란만장했던 독일 역사의 변천에 따른 건축 미학의 전환을 살펴볼 수 있다. 이어 518일에는 바우하우스의 첫 건축 프로젝트 ‘하우스 암 호른(Haus am Horn)’이 보수 공사 끝에 공개된다. 건물부터 가구까지 모두 바우하우스의 손길이 닿은 이 전시장 겸 모델하우스는 1923년 대중에 공개됐으며, 그 자체로 일종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1924년 바우하우스를 재정 지원한 진보 정당이 지방 선거에서 보수 정당에 패배하면서 이듬해 학교는 문을 닫았다.

이에 그로피우스는 바이마르에서 북동쪽에 있는 산업 도시 데사우로 학교를 이전했다. 시 정부의 후원을 받아 바우하우스의 비전을 집적해 그가 설계한 역사적인 캠퍼스 ‘바우하우스 빌딩’이 1926년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1932년까지 6년간 바우하우스는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1928년 취임한 제2대 교장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는 개인적 사치품이 아닌 대중성을, 건축과 디자인의 사회적 기능을 더욱 강조했고, 학교는 자체 제작 제품, 특히 인기 만점 벽지를 판매해 1929년 처음으로 흑자를 냈다. 바우하우스가 데사우 시내 100여 개의 지역 산업체와 협력했던 만큼 ‘바우하우스 데사우 파운데이션’은 이미 시 전역에 뿌리내려 지금까지 살아 숨 쉬는 바우하우스 건물들, 즉 학교 본관, 교수 사택, 노동자 숙소, 저소득층 공동주택, 실험적 ‘Steel House’ 등의 인프라를 적극 활용해 418일부터 내부 전시물 및 프로그램을 전부 새로운 콘셉트로 재구성한다. 또한 4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되는 ‘Unseen Spaces’ 프로젝트를 통해 관광객은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해 바우하우스 멤버들이 자주 찾은 카페, 카누를 탄 곳, 바우하우스 파티들이 벌어진 장소 등 시내 곳곳에 얽힌 바우하우스의 흔적을 찾아다닐 수 있다. 그리고 98일, 49천여 점에 육박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바우하우스 컬렉션을 선별적으로 첫 공개하는 ‘바우하우스 뮤지엄 데사우’가 개관한다. 이와 더불어 바우하우스의 교육 철학(3.20~24), 건축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5.31~6.2), 무대 예술에 대한 총체적 실험(9.11~15) 등에 관한 주제로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이처럼 과거에 학교가 추구한 가치를 좇아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반면, 1929년 미국발 경제대공황의 여파에 따른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급속히 우경화됐으며, 결국 1930년 데사우 시정부는 ‘공산주의적 경향’을 빌미로 교장 마이어를 해임했고, 일부 사회주의자 학생들은 불안한 낌새를 느껴 즉시 소련으로 이주했다.

시는 그로피우스의 복귀를 원했지만 그는 건축가 루트비히 판 데어 로에를 후임 교장으로 추천했다. 같은 해 그가 3대 교장으로 취임했지만, 1931년 유대인, 사회주의자 구성원을 포함한 전위적 국제적 성격의 바우하우스를 눈엣가시로 여긴 나치 정당이 데사우 지방정부에 입성하면서 바우하우스는 사립학교로 전환하고 이듬해 베를린의 버려진 전화기 공장으로 이전했다. 베를린에는 미스 판 데어 로에가 설계해 그의 사후 1979년 개관한 세계 최대 바우하우스 켈력션을 품은 ‘바우하우스-아카이브 / 디자인 미술관’이 있다. 지난해부터 2022년까지 보수 및 신관 건축 공사에 들어가 아쉽게도 건물은 볼 수 없지만 ‘베를리니셰 갈러리(Berlinische Galerie)’에 자체 소장품 및 해외 주요 컬렉션을 모아 14개의 소주제로 구성된 대형 전시 <오리지날 바우하우스(Original Bauhaus)>(9.6~2020.1.27)를 마련한다. 또한 그가 교장 재직 시절 설계한 ‘미스 판 데어 로에 하우스’, 일명 ‘하우스 렘케(Haus Lemke)’에서는 올해 내내 4개의 특별 프로젝트를 마련해 각 회차마다 3인의 현대 건축가를 초청하고 바우하우스가 추구한 가치를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더불어 ‘세계 문화의 집(HKW)’은 지난해부터 모로코,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브라질, 나이지리아, 인도 등지에서 바우하우스의 국제적 유산과 영향을 4개의 소주제로 나눠 각국의 관점에서 살폈던 전시 프로젝트를 모두 베를린으로 들여와 <바우하우스 이마기니스타>(3.15~6.10) 전시를 개최하고, 5월에는 대대적인 심포지엄을 마련한다. 이 밖에도, 베를린 남서쪽의 도시 포츠담에 있는 ‘한스 오토 테아터(Hans Otto Theater)’는 514~15일 오스카 슐레머의 <삼부작 발레(Triadic Ballet)>를 무대에 올린다. 또한 베를린 시 외곽 베르나우 지역을 방문하면 볼 수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ADGB 노동조합 학교(Trade Union School)’ 건물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 연방 노동조합 본부였으며, 마이어 교장 시절 진행된 바우하우스 역사상 두 번째로 큰 프로젝트였다.

1933130일 히틀러는 독일 총리 자리에 올랐고, 3월 바이마르 공화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곧 나치의 비밀국가경찰 게슈타포가 바우하우스에 들이닥쳐 문을 봉쇄했다. 미스 판 데어 로에는 신임 문화부 장관을 찾아갔다. “바우하우스는 그만의 특별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당신 책상 생긴 걸 좀 보시죠. 그게 좋나요? 저 같으면 창문 밖으로 내다 버리겠네요.”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지만 730일 타의가 아닌 자의로 폐교를 결정했다. 나치의 손아귀를 피해 많은 교수진이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및 예일 대학 등에서 강의를 이어갔고,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했으며, 독일계 유대인 건축가들은 당시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현재 이스라엘)으로 피난했다. 그들에 의해 지금 4천여 채의 바우하우스 건물이 텔아비브에 들어섰다. 권위적 웅장함과 고전적 장식을 다시 건축에 들여온 나치 정권의 노스탤지어 미학의 발굽 아래 바우하우스는 숨 쉴 수 없었지만, 그 구성원들이 디자인의 현대성, 국제성, 기능성에 대한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간 덕에 오늘 우리는 주변의 주전자, 의자, 건물 등에 깃든 ‘모던함’이라는, 어렴풋하게나마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미적 감각을 즐길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