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시의 킹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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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버리의 새로운 수장 리카르도 티시가 세운 자신만의 왕국.

Burberry Spring_Summer 2019 Show Finale_004

지난 9월, 그러니까 2019 S/S 시즌을 선보인 패션위크는 여러모로 화제였다. 셀린으로 컴백하는 에디 슬리먼과 지방시를 떠난 리카르도 티시의 버버리 데뷔 쇼가 특히 그랬다. 현대의 패션 역사를 선도해온 두 브랜드가 같은 시즌, 새 디자이너의 데뷔 쇼를 앞두고 있었다. 먼저 시험대에 오를 티시의 데뷔 쇼를 두고 런던의 공기는 긴장감마저 감돈 가운데 살짝 들떴다. 영국을 대표하는, 영국과 동일시되는 브랜드의 새 출발. 고급 부티크가 들어선 메이 페어 지역에는 버버리의 새로운 TB 모노그램으로 래핑한 블랙캡이 종종 목격됐다. 이는 라프 시몬스가 부임한 캘빈 클라인의 로고를 리디자인한 바 있는 유명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사빌과 티시의 협업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브랜드 창립자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의 이니셜을 조합한 옅은 갈색 과 주홍색 모노그램은 블랙캡뿐 아니라 서울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 상하이 타이핑 호수의 테디베어 벌룬, 뉴욕 선셋 비치의 파라솔을 점령하며, 새로운 버버리의 탄생을 전 세계에 알렸다. 먼저 선임된 버버리의 새 CEO 마르코 고베티는 5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브랜드를 리포지셔닝할 계획임을 발표했 다. 지방시와 피비 파일로의 셀린을 걸쳐 버버리에 안착한 그는 이미 업계가 인정하는 베테랑. 리카르도 티시의 무명 시절, 그의 이름을 딴 레이블만 보고 지방시 여성복과 쿠튀르 디자이너 자리에 추천한 고베티는 다시 티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이탈리아 남자가 다시 조우했다는 소식으로도 버버리는 순 이익이 2.4% 소폭 상승했다. 티시는 지방시의 매출을 6배나 늘린 전력이 있 었다. 모두가 변화에 기대를 걸 것이 분명했다.

창립자 토머스 버버리의 이니셜을 사용한 TB 모노그램 백은 버버리의 유산과 창립자의 정신을 기념한다. 간결한 디자인, 내구성 뛰어난 가죽 소재, 0.5 마이크로 골드로 도금된 잠금장치, 실용성을 더한 내부의 포켓이 특징이다.

창립자 토머스 버버리의 이니셜을 사용한 TB 모노그램 백은 버버리의 유산과 창립자의 정신을 기념한다. 간결한 디자인, 내구성 뛰어난 가죽 소재, 0.5 마이크로 골드로 도금된 잠금장치, 실용성을 더한 내부의 포켓이 특징이다.

쇼는 런던 패션위크의 다섯 번째 날 17일 오후 5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17이 티시의 행운의 숫자라는 설이 더 유력해졌다(데뷔 쇼를 기념해 판매된 B시리즈 캡슐 컬렉션은 매달 17일, 다른 제품으로 ‘드롭’된다). 모래시계가 흐르는 것처럼 데뷔 쇼를 카운트하는 프레스에게 그는 리젠트 스트리트에 위치한 플래그십 스토어를 재단장해 먼저 선보였다. 브랜드를 상징하는 트렌치코트의 뉴트럴 컬러 팔레트로 싹 바뀐 내부의 중심에 영국 아티스트 그레이엄 허드슨(Graham Hudson)이 제작한 3층 규모의 거대 설치 작품 ‘시시포스 리클라인드(Sisyphus Reclined)’가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든다. 공사 현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작품은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가 설치되어 첨단 기술을 품은 현대 예술의 면모를 과시했다. 층마다 각각의 테마를 가진 방으로 구성됐는데, 헤리티지 트렌치코트, 카 코트부터 빈티지 체크로만 채워진 방 까지 버버리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갤러리처럼 전시됐다. 모든 것이 모던하 게, 단정하게 정렬된 스토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티시의 취향이 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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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버리가 공개한 마크 이작이 찍은 ‘Inside the Lift’라는 3분 남짓한 짧은 필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쇼를 앞둔 런던 헤드쿼터 직원들의 중압감을 유머 러스하게 포착한 것인데 물론 티시도 출연했다. 쇼를 사흘 남긴 그는 무덤덤하게 스트레스, 흥분, 행복 같은 단어를 내뱉었다가 다시 두렵다고 말한다. 유서 깊은 하우스의 책임자 자리는 누구나 부담감을 느낄 테지만 티시의 경우는 더 심할 것이다. 지방시를 떠난 이후 티시는 스포츠 브랜드와의 협업 외에 이렇다 할 행적을 보여주지 않았다. 베르사체로의 이적설 또한 루머에 그쳤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 코모에서 유복하지 못한 가정의 9남매 중 외동아들로 자랐고, 힘들게 입학한 런던의 패션 스쿨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입성한 지방시에서 12년을 보냈다. 그리고 좀처럼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던 하우스에 부흥과 전성기를 가져다주며 지방시를 파리 패션의 중심에 올렸다. 여기까지는 패션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그리고 긴 여정을 거쳐 런던으로 돌아오기까지, 티시는 20년 전 자신이 디자이너를 꿈꾸던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앞뒀다. 티시가 버버리로 합류한 것은 분명 놀랍긴 했지만, 아주 예상치 못한 조합은 아니었다. 고베티와 티시는 다른 자석의 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겼다. 내일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내일이면 분명해질 터였다.

쇼 전경과 백스테이지. 영국의 상징이자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버버리의 유산이 티시의 손길을 거쳐 아주 섬세하고 고급스럽게 재탄생했다.

쇼 전경과 백스테이지. 영국의 상징이자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버버리의 유산이 티시의 손길을 거쳐 아주 섬세하고 고급스럽게 재탄생했다.

철통 보안으로 베일에 싸여 있던 쇼의 베뉴는 런던 남서부 복스홀의 사우스 런던 메일 센터였다. 입장은 아주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패션쇼에 만연한 지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프런트로에 그의 주변을 떠들썩하게 하던 ‘티시 갱’도 없었다(대신 카니예 웨스트, 리한나 같은 스타들은 B시리즈를 입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으로 응원을 보냈다). 오직 프레스, 티시가 직접 초청한 각국의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가족이 자리했다. 곳곳이 기역자로 꺾인 런웨이는 무척 길었다. 쇼장 내부는 고급스럽고 차분하게 꾸며졌는데, 베이지 커튼, 검은색 창틀, 회색 콘크리트 같은 담담한 색상에서 버버리다움이 읽혔다. 마호가니와 유리, 거울, 커튼으로 만들어진 가벽은 음악이 시작되자 미끄러지듯 굴러가 쇼의 시작을 알렸다. 이는 전체를 관통하는 시선을 차단하고 룩에 집중하게 하는 의도처럼 보였다. 매시브 어택의 로버트 델 나자가 특별 제작한 리드미컬한 사운드트랙 위로 트렌치코트를 입은 첫 번째 모델이 걸어 나왔다.

쇼 전경과 백스테이지. 영국의 상징이자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버버리의 유산이 티시의 손길을 거쳐 아주 섬세하고 고급스럽게 재탄생했다.

쇼 전경과 백스테이지. 영국의 상징이자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버버리의 유산이 티시의 손길을 거쳐 아주 섬세하고 고급스럽게 재탄생했다.

티시는 자신의 데뷔 컬렉션을 ‘킹덤’이라 명명했다. 펑크 정신을 기반으로 다양성과 창의성으로 대변되는 영국적 태도에 보내는 경의였다. 쇼는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었다. ‘리파인드(Refined)’, ‘릴랙스(Relax)’, ‘이브닝(Evening)’. 리파인드는 버버리의 클래식한 유산을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한 포멀하고 세련된 룩 위주였다. 티시가 하우스에 입성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카이브를 면밀히 살펴보고 분석한 것이다. 시그너처 패턴인 아이콘 스트라이프, 개버딘 소재에 주로 사용되는 80년대 아카이브 베이지 색상이 현대적 감성을 입었고, 정교한 테일러링을 통해 재탄생했다. 마치 완벽하게 조율된 피아노처럼 섬세하게 다듬어졌달까. 완성도에 대한 티시의 집착과 심미안이 돋보인 대목이었다. 허리를 강조한 트렌치코트, 카 코트, 주름 스커트, 가죽 펜슬 스커트, TB 모노그램이 사용된 실크 블라우스 등은 80년대 부르주아 같기도, 말을 탈 것 같은 목가적인 버버리식 여성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최근에 런웨이에서 잘 볼 수 없었던 스텔라 테넌트, 프레야베하 에릭슨, 릴리 도날슨, 나탈리아 보디아노바 같은 다수의 톱모델도 등장했는데 절제된 메이크업과 헤어 덕분에 그녀들의 오롯한 뷰티가 더욱 돋보였다. 헤리티지가 담긴 모노그램 잠금장치의 TB백은 실용성이 뛰어나 보여 차기 잇백으로 손색없을 듯했다. 또 머리를 묶거나 레인코트 자락, 벨트 등 컬렉션 전반에 사용된 스카프는 브랜드의 클래식한 코드가 절묘하게 배어 나옴과 동시에 너무 쿨해 탐이 날 지경이었다. “한동안 섬세함을 잊고 있었죠. 모두 스트리트풍이었어요. 나도 그걸 리드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섬세한 커팅과 새빌로 테일러링을 어떻게 잊겠어요.” 그렇다. 티시는 하이패션과 스트리트를 크로스오버한 장본인이었다. 릴랙스 부분에서 그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직선적인 실루엣의 셔츠와 티셔츠, 로고, 동물 프린트는 티시 특유의 대담함을 더욱 강조했다. 반항적인 영국 펑크 정신에서 영감을 얻은 룩은 자유로움과 여행을 상징했다. 특히 고릴라, 사슴, 유니콘 등 티시가 사랑하는 동물 프린트는 위트를 더하는 모티프로 활용됐다. 두툼한 고무 밑창을 사용해 청키한 느낌을 살린 베이비돌 슈즈와 모노그램이 사용된 남성용 슈즈 또한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피부색의 남성 모델들은 하나같이 듬직한 몸매로 건강하고 섹시한 남성상을 보여줬다. 쇼의 말미로 치닫자 이브닝 컬렉션이 등장했다. 어둡고 고혹적인 블랙 드레스에 이따금씩 반짝이는 금색 프린지의 변주가 이어졌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장소에 어울리는 것이랄까. 티시는 버버리에 모든 세대를 결집하길 원했다.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아들 말이에요. 이를테면 패치워크 같은 거죠. 모든 영국식 라이프스타일을 믹스한.” 킹덤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134벌이란 대장정의 피날레. 데뷔 컬렉션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가지가 너무 많을 뿐 일관성이 없다는 비평도, 모더니티에 경배를 바친 입기 좋은 컬렉션이라는 호평도 있었다. 어쨌든 스트리트 브랜드의 ‘드롭’ 방식을 차용한 B시리즈는 만만치 않은 가격대의 티셔츠와 후디임에도 불티나게 팔렸다. 브랜드의 헤리티지는 사는 이에게 만족할 만한 스토리텔링을 주지만, 이제는 밀레니얼 세대가 감탄할 만한 혁신이 수반되어야 함을 티시는 잘 알고 있었다. 기록으로 검증되었고 능숙한 스킬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감각, 명성까지 갖춘 최정상급 패션 타이탄의 킹덤. 쇼 다음 날 티시는 꽃더미에 파묻힌 자신의 오피스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SNS에 능숙한 그는 아주 친근해 보였다. 그리고 석 달 후 런던 펑크 패션의 대모 비비안 웨스트우드와의 협업을 발표했다. 파티에 여장 남자, 스킨헤드, 피어싱과 타투로 무장한 펑크족 등 영국의 다양성을 품은 인물들이 모인 건 당연했다. 아노락, 유틸리티 셔츠, 레인 판초, 잘린 팬츠, 프린트 곳곳에 있었던 영국 펑크밴드 섹스피스톨즈의 노래 가사 “왜 밤비를 죽였어(Why did they kill Bambi)?”가 자꾸 메아리쳤다. 어쩌면 그는 ‘아들’과 ‘딸’을 위한 아이디어가 더 편할지도. 타이탄은 더욱 기지개를 켤 것이다. 그의 킹덤은 벌써 공고해진 듯 보였다.

패션 에디터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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