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파티 시즌을 기다리는 자, ‘크리스마스 따위’에 설레기보다 짙은 외로움을 즐기려는 자, 그 모두에게 필요한 것 하나는 바로 음악이다. 고전부터 신보까지, 은근한 연주곡부터 왁자지껄한 록까지. 당신이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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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 King Cole <The Christmas Song>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재즈 싱어 냇 킹 콜의 목소리를 들으면 크리스마스와 상관없는 노래여도 그 특유의 푸근함 때문에 왠지 그 시즌이 떠오른다. 지구상 가장 유명한 크리스마스 앨범인 본 작의 타이틀곡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2046>에 사용되면 서 다시금 새로운 세대에게 익숙해진 바 있다. 이 전통에 입각한 크리스마스 노래들은,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던 시대를 상상하게 만든다. 아무래도 프랭크 시내트라의 경쾌함보다는 냇 킹 콜의 ‘벨벳 보이스’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Low <Christmas>
호화롭고 떠들썩하게 한 해를 마감하는 이들 뒤에는 언제나 묵묵히 일하거나 혹은 여건상 혼자 지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존재한다. 의무적으로 숙연하게 연말을 보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슬로코어 밴드 ‘로우’의 앨범을 틀어놓으면 좀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앨범을 수식하는 여러 표현 중 가장 흔한 것은 ‘지구상 가장 쓸쓸한 크리스마스 앨범’. 이것은 축제나 모임을 위한 앨범이 아니다. 오히려 이 시즌을 탈출하려는 이를 위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조용하고 감동적이며, 무엇보다 성실한 크리스마스 앨범임에 틀림없다.

Vince Guaraldi Trio <A Charlie Brown Christmas>
신문 카툰으로 연재되다가 1965년 TV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피너츠> 중 크리스마스 에피소드의 사운드트랙은 시대를 초월하는 사랑을 받았다. 사실 <피너츠>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대부분 시니컬한 편이다. 이 에피소드의 주제 역시 ‘왜 점점 크리스마스가 행복하지 않을까’다. 극 중 찰리 브라운은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으로 변질되는 것에 질려서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데… 재즈 피아니스트 빈스 과랄디 트리오가 낸 이 앨범은 애니메이션 못지않게 큰 인기를 얻어 이후 다양한 버전으로 출시됐고, 그중에는 앨범과 스누피 집 모형으로 구성된 패키지도 있다.

MxPx <Punk Rawk Christmas>
1990년대부터 활약해온 멜로딕 펑크 록 밴드 MxPx는 팬클럽 회원만을 위해 발표한 곡 중 크리스마스가 테마인 곡을 모아 2009년 하나의 앨범으로 완성했다. 밴드 경력 중 17년 만에 발표한 크리스마스 앨범이다. 대부분 기존 캐럴이 아닌 자작곡이라 크리스마스라는 테마와 상관없는 주옥같은 펑크 록 앨범으로도 즐길 수 있다. 역사상 가장 방정맞은 버전의 ‘Auld Lang Syne’ 같은 곡을 감상하면서 한 해를 정리해볼 수도 있겠다.

Tom Waits <Franks Wild Years>
위대한 주정꾼인 톰 웨이츠의 모든 앨범이 크리스마스에 어울리겠지만, 특히 이 앨범에 수록된 ‘Innocent When You Dream’은 1990년대 중반에 나온 웨인 왕 감독의 영화 <스모크>에서 빛을 발한다. 극 중 하비 케이틀이 맡은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영화 마지막에 흐르는 곡이다. 톰 웨이츠가 술 취한 건지, 아니면 아코디언이 술 취한 건지 알 길 없는 이 떠들썩한 부랑자의 노래는 특히 라이브 버전으로 감상하면 더더욱 감동적이다. 천여 명의 관객들이 부랑자로 돌변해 ‘떼창’하는 것을 들으면 눈물이 날 것 같다. 화려함은 없지만 들을수록 마음에 깊이 스며드는 앨범이다.

Rob Halford <Halford III: Winter Songs>
올해 12월 1일 내한 공연 예정인 ‘메탈 갓’ 주다스 프리스트의 보컬리스트 롭 핼퍼드가 크리스마스 앨범을 낸 사실을 아는지. 이 사내는 옛날부터 크리스마스 앨범을 만들고 싶어 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의 대변자를 밴드명으로 내세운 점을 생각하면 좀 의외인데, 진지하고 장엄한 내용의 앨범인지라 그 바람이 장난이나 비꼬는 의도처럼 보이진 않는다. 메탈 특유의 소란스러운 편곡은 아니기 때문에 주다스 프리스트의 팬이 아니어도 신선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Johnny Smith Trio <Easy Listening>
‘하모니의 마술사’라 불리는 재즈 기타리스트 조니 스미스가 1958년에 낸 걸작으로, 아름다운 코드의 솔로와 멜로디 라인이 돋보이는 기타 트리오 편성이다. 이 조용한 앨범은 대놓고 크리스마스 분위기인 곡을 수록한 건 아니지만, 그 어떤 크리스마스 앨범보다도 은은한 겨울 분위기를 조성한다. 여건이 허락하면 앨범 커버 이미지처럼 벽난로 앞에서 레코드로 감상하면 정말 좋겠다. 한밤중 겨울 공기에 무심코 물들어버리게끔 만드는 연주다.

Ryuichi Sakamoto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는 데이비드 보위와 류이치 사카모토의 불꽃 같은 연기 또한 감상할 수 있는 영화다. 1983년 작인 이 작품이 류이치 사카모토에게는 첫 영화 출연작이자 첫 영화음악 도전이었는데, 동명의 메인 테마곡이 결국 그의 커리어를 대표하는 곡이 됐다. 동양 혹은 서양풍의 구분이나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콘셉트로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시사이저 소리가 울려퍼지는 연주곡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이 앨범에 실린 것 외에도 데이비드 실비앙이 보컬을 입힌 ‘Forbidden Colours’, 추후 공개된 피아노 연주 버전 등이 있어 취향 따라 찾아 들을 만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류이치 사카모토가 직접 피아노 연주로 들려주기도 했다.

Randy Edelman <While You Were Sleeping> 사운드트랙
산드라 블록이 <스피드> 이후 한창 주가가 높던 시절 출연한 1995년 작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고독하게 살아온 한 여성이 새로운 가족의 일원처럼 받아들여지는 소재와 배경으로 인해 여전히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회자된다. 랜디 에델만은 <맥가이버>를 비롯해 각종 액션 영화와 가족 영화의 음악을 작업한 것으로도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출신 영화음악가다. 그의 대표작인 이 앨범에는 유독 피아노가 중심인 곡이 많다. 시카고의 찬 공기처럼 쾌활하고 가슴 시린 익숙한 멜로디들이 크리스마스와 한겨울 풍경 사이 어딘가로 데려간다.

Bright Eyes <A Christmas Album>
밴드 브라이트 아이즈 리더인 코너 오버스트는 10여 년 전 처음 등장했을 당시 ‘천재’ 소리를 들은 인물이다. 그가 발표한 크리스마스 앨범 또한 그다운 순수한 영특함이 돋보인다. 앨범은 그의 고향 네브래스카에서 에이즈 치료를 지원하는 데 쓸 목적으로 웹 스토어에서만 판매됐고, 이후 다시 발매됐다. <NME>는 코너 오버스트의 목소리를 두고 ‘상처 입은 천사 같다’고 말했는데, 불안정한 음정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마음을 보듬어주는 느긋한 정경을 그리는 앨범이다.

John Legend <A Legendary Christmas>
올겨울 드디어 존 레전드의 크리스마스 앨범이 나온다. 자기 이름에서 따왔을 ‘전설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은 좀 거창해 보이기도 하지만, R&B 뮤지션 라파엘 사딕과 함께 오래된 무드의 크리스마스 음악을 녹음하면서 자작곡을 여섯 곡이나 넣어 뻔한 레퍼토리를 피했다. 스티비 원더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점 또한 흥미로워서 확실히 올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앨범 중 가장 화제가 될 만하다. 크리스마스 시즌 발매 일을 맞추기 위해 뜨거운 한여름에 녹음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