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루부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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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즈의 마법사, 크리스찬 루부탱.

슈즈의 마법사, 크리스찬 루부탱.

오트 쿠튀르 패션위크가 열린 지난 7월 3일, 파리에서는 크리스찬 루부탱의 2019 S/S 시즌 이벤트가 열렸다. 슈즈의 마법사 루부탱이 빚어낸 판타지 같은 현장에 슈즈를 향한 그의 예술적인 열정과 섬세한 크래프트맨십의 향연이 펼쳐진 것. 그다음 날, 장 자크 루소 길 쇼룸 옆에 마련된 프라이빗하고 매혹적인 살롱에서 세상에 관한 맹렬한 호기심과 성찰로 가득한 루부탱을 만났다. 곧, 슈즈를 말할 때 확고하게 빛나는 단호한 눈동자에, 슈즈 외 관심사를 이야기할 때는 흥분으로 가득한 신비한 눈빛에 빠져버렸다.

쿠튀르 기간에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나? 우리에겐 최고의 아틀리에 팀이 있다. 정점에 이른 루부탱 크래프트맨십의 우수성과 완벽성을 기념하고 싶었는데, 이번 오트 쿠튀르가 그 의미와 딱 맞아떨어졌다. 새로운 2019 S/S 컬렉션과 함께 하나하나가 작품인 그간 만들어온 슈즈들을 프레젠테이션 공간에 전시해 기념하고 싶었다.

슈즈의 그래픽 프린트가 정말 매혹적이었다. 2019 S/S 시즌에 특별히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그라피티, 키네틱 아트적 요소로 강렬한 무드를 연출했다. 특히 1970년대 실내 장식가들에게 영감을 받았다. 몇몇 위대한 장식가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타일을 믹스 매치하는 취향에 끌렸다. 크롬, 메탈, 거울 같은 모던한 소재를 중세 르네상스 스타일과 결합해서 새로운 미학을 제안한 스타일을 참고했다. 그
섬세함 안에서 장인 정신이 그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했고, 심지어 스니커즈도 컬러 블록, 스파이크, 화려한 장식적 요소를 담아 쿠튀르적 터치로 재해석했다.

실제로 신고 뛰고, 운동할 수 있는 ‘러닝 스니커즈’도 소개해 놀랐다. 그동안은 남자 스니커즈를 주로 진행했는데, 회사에서 여성용도 해보자고 권유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타서 머스큘린한 특징을 보다 여성적으로 풀어냈고, 스니커즈 외에 이브닝 슈즈에도 넥타이나 보타이 디테일을 차용한 아이템을 찾아볼 수 있다.

20년이 넘도록 슈즈 디자인을 해왔다. 지금까지도 뜨거운 슈즈 사랑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냥 내 캐릭터인 것 같다. 이따금씩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도대체 너의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와?”라며 혀를 내두른다. 내 안의 ‘열정’은 유전자적으로 타고난 게 분명하다. 특별히 따로 한 게 없으니 말이다.

당신의 촉을 건드린, ‘첫 슈즈’를 기억하나? 나의 첫 슈즈는 실물이 아닌, 스케치였다. 아홉 살 무렵에 부모님 집 옆에 있던 국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예술 박물관(Musee national des Arts d’Afrique et d’Oceanie)에 자주 갔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 유물을 전시한 곳인데, 역사적이고 이국적인 오브제를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지하에 커다란 아쿠아리움도 있었다. 각종 물고기와 악어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1931년에 지어진 아름다운 아르데코풍 박물관 빌딩에 들어가면 입구에 모자이크 바닥이 멋지게 깔려 있었다. 거기 놓여 있던 슈즈 스케치 하나를 잊을 수가 없다. 스케치 위에 빨간색으로 X라고 표기한 ‘스틸레토 금지’ 표지판이었는데, 분명 여성 슈즈였지만 굉장히 낯선 실루엣이었다. 50년대풍 스틸레토 스케치로 기억하는데, 당시 스파이키 힐은 힐 팁을 메탈 소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힐로 모자이크 바닥을 밟으면 쉽게 망가졌을 거다. 스케치 속 슈즈는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그걸 규제한다는 상징적인 콘셉트가 흥미와 의문을 자극했다. ‘금지’ 된다는 점도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루부탱 슈즈를 신은 가장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은? 춤추는 여인. 춤을 춘다는 건 행복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루부탱 슈즈야말로 또각또각 걷거나 다리를 꼴 때, 계단을 오르내릴 때 등 움직임이 있을 때 특히 아름답다. 발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표현하는 특별한 디자인 방식이 있나? 내 첫 컬렉션이 무대 위의 쇼걸에 헌정한 것이었지 않나. 내겐 강점이자 약점인 특징이 하나 있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만 직접적으로 관찰하고, 그것을 시각화하는 데에는 자신이 없다. 이를테면 돌 하나를 집어 들고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이게 어떻게 생겼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나 할까? 방이 두어 개 있는 텅 빈 공간에 날 데려다 놓으면 그 환경적 특징을 쉽사리 그려낼 수 없을 거다. 그런데 그 방 안에 몸과 연관되거나, 몸에 착용한, 혹은 속해 있는 물건이 있다면 난 단숨에 그 전체를 시각화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슈즈는 몸과 하나 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매개체다. 디자인적으로도 난 신발을 착용한 상태를 관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피팅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멋지게 그려내고 만든 슈즈라도 직접 여러 사람과 다양한 발에 신겨보는 게 필수다. 그 과정 없이는 절대 신발을 만들지 않는다. 슈즈 디자인은 우리 몸을 위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2019 S/S 프레젠테이션 현장 입구부터 루부탱 마법의 신비로움이 폭발했다.

장인 정신이 느껴지는 예술 작품 같은 루부탱의 보디 부츠와 슈즈들.

20여 년 전 루부탱을 론칭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켜온 신념이 있다면? 디자인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직접 진행한다는 것.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디자인 공정 중 일부는 직원에게 맡기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매달, 어떨 땐 매주 이태리 공장에 가 일하고 거기서 먹고 자기도 한다. 나는 신발을 그저 패션이나 스타일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 물론 다양한 디자이너와 협업을 해왔고, 그들을 존중하지만 대부분 슈즈를 액세서리로 보는 시선이 강하다. 하지만 슈즈는 ‘리얼리티’다. 그리고 그 리얼리티는 ‘테크닉’을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깐깐해 보이겠지만, 그저 슈즈 디자이너이자 장인의 관점에서 그렇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충실할 뿐이다.

여행은 이국적 아름다움이 넘치는 루부탱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가 없다. 좋아하는 여행지가 궁금하다.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정말 많다. 몽골도 가고 싶고, 현재는 갈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의 자연 경관도 보고 싶다. 수도 니코시아가 정말 아름답다는 키프로스도 못 가봐서 아쉽다. 콜롬비아의 바랑키야와 메데인의 아름다움도 언젠간 꼭 볼 것이다. 그리고 누비아 왕조의 피라미드가 있는 수단도 꿈꾸는 여행지 중 하나다.

워낙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신기하게도 대부분 패션과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오래전부터 영화 스크립트를 써오고 있을 만큼 글쓰기를 좋아한다. 가드닝과 조경도 애정의 대상이다. 조경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 건축과 관련된 것들을 보고 알아가는 일도 내게 큰 기쁨이다.

반짝이는 우주를 옮겨다 놓은 듯한 러닝 스니커즈에는 루부탱의 아이코닉한 레드 컬러가 그대로 적용됐다.

그래픽 프린트로 생기를 불어넣은 패셔너블한 루부탱 스니커즈.

스파이크 장식을 더한 버킷 스타일의 메리제인 백.

집에서 가드닝도 하나? 가드닝이라는 게,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인내심을 길러준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겸손해지는 경험도 한다. 컬렉션 디자인 전에는 잠시 가드닝을 쉰다. 손을 베이거나 다칠 수 있으니까.

좋아하는 꽃은? 작약. 꽃잎이 닫혀 있을 때부터 만개할 때까지 보고 감상할 수 있는 다양한 모양과 색감, 그 과정이 너무나 아름답다. 양귀비꽃도 정말 ‘사랑’한다. 특히 양귀비꽃의 은유적인 유피미즘이 매력적이다. 양귀비꽃은 와일드하다. 꽃을 꺾어 화병에 꽂으면 이내 꽃잎이 떨어져 사라지고 만다. 양귀비는 인내심을 요구하고, 꽃을 향한 어떤 존경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야생의 양귀비가 지닌 메시지가 그래서 좋다. ‘나에게서 떨어져! 당신이 날 갖는다면, 난 살아남지 못할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메시지 말이다.

그럼 나무는 어떤가? 올리브나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 몇천 년 동안 한자리에서 묵묵히 자라는 올리브나무는 문화, 역사적 측면에서 의미가 무척 크다. 난 무엇이든지 스토리텔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올리브나무는 지중해 지역 역사에서 특히 중요했다. 지중해의 첫 도시가 올리브나무가 있던 들판 위에 세워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시리아 알레포 근처에 위치한 데드 시티(Dead Cities)에는 세계 최초의 호텔이 지금도 있는데, 이것도 올리브와 관련이 있다. 고대에 사막을 오가던 세계 무역상들은 올리브를 사러 그 지역을 찾았다. 그런데 워낙 먼 여정이라 자고 갈 곳이 없어서, 누군가 그곳에 무역상을 위한 호텔을 짓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거래가 이뤄지고, 의사소통을 하며, 이동과 더불어 최초의 호텔까지 생겨난 그 시작이 바로 올리브라는 게 놀랍지 않나? 그러니 올리브야말로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사회적 유동성을 갖도록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몰두해 있는 것이 있다면 <W Korea> 독자에게 공유해줄 수 있나? 책, <사피엔스, Sapiens>. 얼마 전 친구를 만났는데 도대체 그 책 이야기를 몇 달 동안 하는 거냐며 핀잔을 주기까지 했다. 나는 한 번 꽂힌 책이 생기면 몇 번씩 읽어보고, 그걸 거의 쌓아두다시피 사놓고선 친구에게 선물하는 걸 좋아한다. <사피엔스>도 이미 두 번 읽었다. 인간의 역사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써 내려간 책은 약속에 늦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만 더 읽고 가야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장을 펼치는 즉시 빠져버린다. 인류학적인 접근을 어쩌면 그토록 위트 있고 재미있게 펼쳐낼 수 있을까? 책을 읽고선 저자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에 대해서도 엄청 검색해봤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그는 40세의 이스라엘 출신으로, 남편 이지크 야하브(Itzik Yahav)와 결혼했다. 또 채식주의자이자 부디스트다. 정말 특이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다. 독자들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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