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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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의 거장, 슈퍼팝의 창시자 케니 샤프가 첫 개인전으로 서울을 찾았다. 이번 전시의 도슨트로 나선 뮤지션 서사무엘이 그를 인터뷰했다. 지구의 종말과 한반도의 평화, 예술의 역할과 아름다움의 정의까지, 사이키델릭한 작품 속에서 펼쳐진 두 남자의 진지하고 유쾌한 케미스트리.

키스 해링, 장 미셸 바스키아와 함께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살아 있는 팝아트의 전설, 케니 샤프가 서울을 찾았다. 2019년 3월 3일까지 롯데뮤지엄에서 그의 전시 <케니 샤프, 슈퍼팝 유니버스> 전시가 열린다. 회화, 조각, 드로잉, 비디오 등 총 100여 점이 전시된 뮤지엄 안은 케니 샤프가 설계한 하나의 놀이공원 같다. 형형색색 물감으로 잔뜩 칠해놓은 온갖 잡동사니, 도너츠와 핫도그 그림, 익살스럽게 놓인 폭탄 형상의 의자, 우주 가족 젯슨과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 형광색 폐장난감으로 가득 찬 사이키델릭한 방까지, 낡은 물건에 장난치듯 그림을 그려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소비사회 속에서 탄생한 슈퍼팝이란 새로운 개념을 창시한 그의 세계를 조우할 기회다. 케니 샤프는 미래와 우주에 대해 낙관적인 기류가 가득했던 1950〜60년대 이미지를 가지고 초현실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근엄하지도 난해하지도 않은 그의 작품은 까르르 웃으며 ‘셀피’를 남기기에 좋을 만큼 화려하고 직관적이지만 그 안을 파고들면 평화, 환경 문제, 핵무기, 마약 등 무섭고도 두려운 기호들이 가득 심어져 있다. <더블유>가 예술에 남다른 호기심과 애정을 품은 뮤지션 서사무엘을 인터뷰어로 초대했다. 서사무엘은 케니 샤프라는 거대한 세계 속으로의 탐험에 기꺼이 조력자로 나섰다.

케니 샤프가 입은 스웨트셔츠와 팬츠는 오디너리 피플 제품. 서사무엘이 입은 화려한 패턴의 니트는 타미 힐피거 제품.

케니 샤프가 입은 스웨트셔츠와 팬츠는 오디너리 피플 제품. 서사무엘이 입은 화려한 패턴의 니트는 타미 힐피거 제품.

이번 전시는 서울, 그리고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당신의 개인전이다. 서울의 첫인상은 어땠나?  ‘Oh My God!’ 왜 이렇게 높아? 뮤지엄이 있는 롯데타워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웃음). 그러고서는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 룸에서 바깥 풍경을 보고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래 도시에 와 있는 기분이랄까. 얼마 전 두바이에 가서도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빌딩 버즈 칼리파를 봤다. 나는 주로 자연을 보고 감탄하지만 이렇게 높은 빌딩을 봐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주로 자란 나에게 서울은 컬러풀함이 배제된 도시 같다. 온통 회색인 빌딩숲, 도심을 달리는 흑백의 자동차. 반면에 당신의 작품은 다채로운 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혹시 서울에 어울리는 컬러 하나를 추가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늘은 보라색을 선택하고 싶다. 지금 밖에 비가 내리고 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나? 호텔이냐 집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집에서는 가장 먼저 뜨거운 레몬 주스를 마신다. 몸의 pH 균형을 잡기 위해서. 그러고 나서는 요가를 한다. 나는 더 이상 젊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큰 작품을 완성하려면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한다. 요가는 내 몸뿐 아니라 정신 건강과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두려움과 스트레스도 없애주고.

당신을 스트레스 받게 하는 건 무엇인가? 이 세상 돌아가는 상황들. 밤중에 자다가도 갑자기 깨어나 지구를 걱정한다. 얼마 전 캘리포니아에는 큰 산불이 났다. 자연재해로 숲은 죽어가는데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지구 온난화를 부정한다. 그런 점이 나를 화나게 만든다.

당신의 작품은 ‘슈퍼팝’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장르를 대표한다. ‘슈퍼팝’이라는 개념을 어린아이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팝아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슈퍼마켓에서 가져온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가 예술이 된 것처럼, 그전까지는 아무도 예술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술로 만들었다. 팝아트는 예술이 나아갈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슈퍼팝은 그 계보를 따르면서 좀 더 높이 나아가는 개념이다. 팝아트가 사물을 객관화해 그 외면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면, 슈퍼팝은 외관이 아닌 그 속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내 그림은 주로 내면의 잠재의식 속에서 탄생한다. 나의 내면에는 ‘TV 세대’로서 내가 어린 시절부터 봐온 광고, 카툰 등의 온갖 대중문화로 둘러싸여 있다. 그런 것들이 내 안에서 소화되어 작품으로 분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부터 브라질에 가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브라질을 여행한 후 정글 시리즈 작업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그 여행이 당신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그곳에서 나는 자연인이 되고 싶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살면서 열대 우림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충격적이었고, 무척 슬펐다. 사라져가는 아마존 숲을 살리기 위해 모금과 기부 활동을 시작했다. 자연을 파괴하고 원주민을 쫓아내는 건 끔찍한 일이다.

당신은 LA에서 태어나 1978년 뉴욕에서 활동했고, 지금은 다시 LA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다. 그곳의 바이브는 어떤가? 내 작품에 등장하는 건축 양식, 컬러, 자동차 등 긍정적이고 미래적인 분위기가 LA에 다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우주로 가득 차 있었다. 1960년대는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광고, 쇼, 옷 등 모든 영역이 우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시대였다. 내가 태어난 1958년에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띄웠고, 1969년에는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디뎠다. 1984년이 되면 달로 가는 로켓 티켓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학교에서 가르쳤을 정도니까. 그런데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삶의 흥미를 잃었고, 나 스스로 그런 판타지를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1978년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위치한 클럽 57은 당신뿐만 아니라 키스 해링, 바스키아와 같은 아티스트에게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여러 젊은 아티스트와 뮤지션들이 모여 다양한 파티, 전시, 퍼포먼스를 선보인 상징적인 공간 말이다. 2017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대규모 기획전으로 <Club 57: Film, Performance, and Art in the East Village, 1973-1983>이 열리기도 했다. 그렇다. 매일매일 아트 쇼와 밴드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고, 단 하루도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는 훗날 우리가 도모한 것들이 이렇게 전시로 다뤄질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다. 지금에야 그때 일어났던 퍼포먼스를 정의 내릴 수 있지만 당시 관중은 오직 그곳에 모인 아티스트뿐이었다. 나는 페인터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이지만 그 당시엔 거기서 노래도 부르고 춤을 추고 연기도 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무슨 형식과 매체로든 자신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멋진 장소였다. 그때 당시 찍은 비디오를 돌려보면 무척 재미있는 장면이 많다. 지금 시대는 아티스트에게 유명해져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압박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누구도 우리를 주목하지 않았다.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가? 물론이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나에게 앞으로 어떻게 작업을 이어가야 하며, 어떻게 하면 갤러리에 소속될 수 있는지 묻는다. 나 역시도 그런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관계를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다 보면 그 외의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작가에게 작품이 없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무척이나 듣고 싶었던 말이다. 문득 당신은 내 나이에 어땠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나는 지금 스물여덟 살이다. (웃음) 아빠가 되었다. 당시 나는 너무 어렸지만 내 삶과 예술이 그러하듯 어느 날 갑자기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아내와 두 딸을 정말 사랑한다. 지금은 여섯 살, 네 살 손주도 있다. 나는 작품 속에서 아이들을 표현하기도 한다. 음악을 자주 듣는 편인가? 그렇다. 나는 언제나 음악과 함께 산다.

그렇다면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가? 정말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는다. 라디오를 즐겨 듣는데 글램 록을 좋아한다. 데이비드 보위, 벨벳 언더그라운드, 티렉스, 마이클 잭슨. 그리고 최근엔 1960년대 브라질에서 사이키델릭한 음악을 했던 밴드 오스 무탄테스(Os Mutantes) 151의 음악에 빠져 있다. 시대를 앞서간 음악이다.

지금 입고 있는 티셔츠는 직접 그림을 그린 것인가? 평소 좋아하는 스타일이 궁금하다. 나는 옷을 자주 사지 않는다. 일단 사면 해질 때까지 입는 편이다. 1985년에 산 옷을 아직도 잘 입고 다닌다. 개성 있고 재미있는 옷에 끌린다. 종종 패션 디자이너들과 같이 작업을 한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함께 작업한 제러미 스콧의 것이다. 실크스크린 방식으로도 작업하는데, 물감이 남으면 버리지 않고 티셔츠나 청바지에 툭툭 묻히거나 찍어서 옷을 새롭게 만들기도 한다.

일종의 커스터마이징이겠다. 당신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커스터마이징은 지루한 예술의 해답이 될 것이다. 예술은 주위에 언제나 함께하며,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즐거운 일이다’라고. 당신은 이번에 롯데월드타워 광장에서 자동차에 그라피티를 그리는 ‘카밤즈(Karbombz) 퍼포먼스’를 했다. 어떻게 시작한 프로젝트인가? 어느 날 운전 중이던 사람이 내 옆에 차를 세우고서 그림을 그려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나는 냉큼 그러겠다고 했고 스프레이로 빠르게 그림을 그린 다음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리고 지원자를 받겠다고 했더니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참고로 그 이벤트는 무료였다. 그렇게 그림을 그려준 차가 지금까지 250대 정도다. 이번에 서울에서도 카밤즈 퍼포먼스를 했다. 나는 더 많은 자동차에 그림을 그려주고 싶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교통 체증 속에서 가지각색으로 페인팅된 차들을 상상해보라. 너무 재미있지 않은가? 내가 무료로 사람들에게 차에 그림을 그려주는 이유는 순수한 예술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나 또한 내 작품을 팔아 돈을 버는 작가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의 예술이란 그저 돈에만 한정되어 있는 측면이 크다. 얼마에 팔리는지에 따라 그 가치가 평가된다. 얼마나 끔찍한 사고 방식인가.

특별히 집착하는 대상이 있나? 알다시피 내가 그동안 쓰레기로 작품을 만들지 않았나? 그래서 나는 음료수를 마실 때마다 뚜껑을 모은다. 지금 내 슈트 케이스에는 그동안 모은 뚜껑이 잔뜩 들어 있다. L.A로 돌아가면 구멍을 뚫어 줄로 연결해서 장식을 만들어 작품의 일부로 활용할 거다. 작품 ‘Cosmic Carvern’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주변 여기저기를 들여다본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모으지 않은 이상한 사물에 대한 집착이 있다. 브라질 해변가에서도 플라스틱 쓰레기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가져왔다. 그것을 잘 씻어 말린 다음 작업의 재료로 썼다.

사실 나도 그런 비슷한 집착이 있다. 사람들이 버린 헌책을 집으로 가져가서 장식으로 사용한다. 이런 행위가 재미있는 점은 내가 무엇을 가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언어로 쓰여진 책을 주우면 횡재한 기분이 든다. 역시 쓰레기가 최고다. (일동 웃음) 혹시 살아가면서 절대 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나? 앤디 워홀, 키스 해링, 장 미셸 바스키아 등 나의 친구들과 동료들이 남긴 작품들. 나는 그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 인터뷰에서 앤디 워홀은 당신에게 영웅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뿐만 아니라 내 나이 또래 아티스트 가운데 뉴욕으로 이주한 이들에겐 앤디 워홀은 영웅 그 자체였다. 그는 예술의 영역과 아티스트의 의미를 넓힌 사람이다. 그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클럽 57은 60년대 앤디 워홀의 팩토리를 모방한 것이기도 하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당시에 그가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사람들은 앤디가 그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을 불러모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나중엔 그 안에서 마약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미친 사람은 앤디 워홀에게 총을 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앤디 워홀은 그 안에서 동시대 많은 작가를 지지하고 지원해주었다. 그는 내가 진실로 충고를 얻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앤디는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건조한 유머이긴 했지만.

이번 전시장 가운데 ‘Dragon serpents adore Korea!’라는 대형 그라피티 벽화 작품은 평화와 화합을 담은 것이라고 들었다. 남북한, 그리고 미국 간의 희망적인 정세를 염두에 두고 그린 작품인가? 몇 년 전만 해도 트럼프와 김정은이 서로 미사일을 쏘겠다고 했을 때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What the Fuck is going on? 지구온난화나 플라스틱 오염에 대한 문제도 문제지만 사실 핵폭발은 차원이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핵무기를 논하고 서로 쏘겠다고 위협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언급하는 것조차 믿을 수가 없다. 그 어느 나라라도 핵으로 공격한다면 그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 상상하고 싶지 않다. 올해 뉴스를 통해 남북한 정상이 서로 만나 악수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마침내 나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장면은 우리가 살아가는 비관적인 세상에서 몇 안 되는 희망적인 순간이었다.

당신은 추하고, 역겹고, 끔찍한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당연하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르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관념이다. 잡지를 볼 때 아름다운 사람을 본다고 치자. 그 사람의 외관이 아름답다고 해서 그 내면까지 아름다우리라는 법은 없다. 나는 아름다움이란 불완전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겠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사람이 코가 너무 커서 성형수술을 하고 싶어 할 때 나는 결점을 자신 있게 보여주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회가 정의하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관점이 사람들을 압박하고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나는 이것이 참으로 싫다. 모든 인간이 가진 결점을 열렬하게 축하해주고 싶다.

피처 에디터
김아름
패션 에디터
고선영
포토그래퍼
이창민
헤어, 메이크업
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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