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어디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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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거주지란 무엇일까? 현재 살고 있는 곳, 혹은 한 철을 살아본 곳. 마산 해안도로를 지나 완도, 서강대교, 그리고 베를린에서 일어난 네 편의 리얼리티가 당신을 뜻밖의 길로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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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도, 내가 숨긴 칼

일 년에 네 번 혹은 다섯 번 나는 완도에 산다. 가는 게 아니고 산다고 썼다. 완도는 내가 오래 유년을 보냈고 아직도 이어져 있는 곳이다. 서울에서 버스로 5시간 거리다. 명절에는 7시간이나 8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기차편은 없다. 추워도 눈은 잘 오지 않고 태풍이 오면 뭐든 날아다니고, 여름엔 정수리가 벗겨지게 덥다. 그리고 고요하다. 완도라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은 내게 맨발의 물질 경험을 기대하고, 밤배에서 보는 별밤이나 전복과 멸치 등속의 풍요를 묘사해주길 바란다. 굴껍지처럼 미역오리처럼 말라가는 처녀 이야기 같은 걸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바다를 보려면 차로 30분은 가야 한다.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르고, 물을 굉장히 무서워하며, 비린 것을 먹지 않는다. 늬 집엔 감자 없지, 이러면서 봄 감자를 내밀 만큼 농사짓는 집도 아니다.

그러면 완도엔 무엇이 있나. 물론, 바다가 있다. 종종 익사자가 나오던 정도리 구계등이 아주 아름답다. 그래서 내게 바다는 두 손으로 겨우 들 만큼 무거운 돌이 일제히 구르는 소리가 나는 곳이다. 그 파도에 돌 굴러가는 소리로 시도 한 편 썼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나. 사람들이 산다.

나는 완도에 가는 게 아니고 산다. 한 다리 건너면 김씨네 일가붙이이며 아버지의 지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들르게 된다. 그러니까 완도에 산다는 것은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인사와 소문을 피할 길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완도는 완도대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고, 고속버스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너무 작다. 그렇다고 산이나 바닷가로 혼자 돌아다니기에 완도는 너무 넓다. 완도의 곳곳은 아주 외진 곳이며, 아주 어둡다. 2018년에도 우리 집 근처에 깃든 완도의 밤은 발밑이 꺼졌나 싶게 어둡고 혼자서는 절대 슈퍼에 갈 수 없게 무섭다.

완도군 완도읍, 도코노마와 다락방이 있는 일본식 가옥에서 유년을 세 들어 살았다. 완도에는 남중학교와 여중학교가 하나씩 있는데, 나는 시내 중심가에서도 1시간씩 바다를 끼고 걸어가야 나오는 여중학교를 다녔다. 인적이 드문 길이라 반드시 친구와 짝을 지어 다녔다. 소리 소문 없이 갑자기 나오지 않는 친구가 가끔 있었다. 프랜차이즈 가게와 아파트가 들어섰음에도 완도는 여전히 내게 여자는 혼자 다녀선 안 되는 곳이고, 마당에서 잘 놀고 있던 개가 없어지더라도 혼자 울고 얼굴 붉히지 않고 웃어야 하는 곳, 다 알 만한 사람 사는 동네라 어려운 곳이다.

완도에 사는 동안 나는 자고 일어나면 내가 남자아이가 되어있기를 바랐고, 그런 바보 같은 자유를 꿈꿨다. 그 마음은 내게 작고 빛나는, 손잡이 없는 칼이었다. 온전치 않아서 내보이기에 어렵고 말없이 가지고 있자니 다칠 것처럼 두려운 마음. 그런데 해마다 조금씩 날카로워지는 칼이어서 무시하기 어려웠다. 나는 완도를 떠나면서 그 칼을 부러 빠뜨려두었다. 칼 빠뜨린 곳을 뱃전에 표시해둔 아둔한 이처럼, 내 칼 있는 곳이 완도지 완도야,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손잡이가 완성되면 칼을 건져내야지 생각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분명히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무덤도 집도 거기 있지만, ‘완도’ 하면, 마음이 서늘하다. 희미하게 빛나는 물 밑으로 허리를 깊이 숙여 칼을 찾으려 하는 기분이다.

나의 완도는 칼을 숨겨둔 곳이면서 내가 숨긴 칼이기도 하다. 어떻게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막막하고 어려운 유년이 있는 곳이고, 여전히 두렵다. 두려우면서도 살러 가는 곳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할 수 없다는 식으로 회피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아직도 계속해서 아름다운 손잡이를 만들고 있다고. 완도로 내 칼을 보러 가끔 살러 가고 있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글 | 김복희(시인)

SEOUL

서강대교를 건너는 일

상수동의 문제는 이름이 상수라는 것이다. 합정동의 문제는 이름이 합정이라는 것이고 마포구의 문제는 이름이 마포라는 것이다. 광흥창의 문제는 그보다 덜한데 이름이 광흥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 역시 문제다. 광흥창은 녹봉을 관장하는 관서와 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합정은 조개우물이라는 뜻이다.

상수라는 이름은 한강에 위치한 마을 중에서 가장 위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침수되지 않는다. 태풍 볼라벤이 왔을 때 서교동에 사는 친구는 집에 물이 들어와 장판을 새로 갈아야 했다. 동사무소에 신고했더니 보상금이 나왔다고 한다.

나는 상수에 산 지 12년이 됐고 친구는 서교에 산 지 6년이 됐다. 친구와 나는 각자 산책을 한다. 코스는 유사하다. 나는 상수 나들목으로 나가서 합정이나 공덕 방향으로 걷는다. 친구는 양화진 공원으로 나가서 한강철교까지 걷는다. 한강을 걷는 일은 놀라운 일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 10년이 걸렸다. 강 바로 옆에 사는데도 말이다.

나는 아주 늦은 밤 서강대교나 양화대교를 건너기도 한다. 서울의 다리를 건너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인도는 옹색하기 이를 데 없이 좁고, 차들은 광기 어린 속도로 달린다. 한강의 다리는 걷기 위해 만들어진 스케일의 다리가 아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걷는 일은 일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 된다. 비인간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낭만이라고는 없는, 자연과 적대하는 삭막한 걷기. 이러한 걷기의 와중에 우리는 새삼 발견한다. 제방에 필요한 재료를 얻기 위해 폭파시킨 한강의 섬이 자연의 힘에 의해 복구되어 폭파 전보다 더 커진 모습을, 마구 자란 섬의 나무에는 철새들이 앉아 있고, 밤이면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을 떠올리게 하는 섬의 모습을 발견한다. 마포구 쪽 산책로에서 바라보면 여의도의 빌딩들은 섬 위로 자라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여의도는 섬을 폭파해 얻은 돌과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초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스산하고 평화롭다. 잘 만들어진 거리와 도시에는 이런 풍경이 없다. 못 만들어진 거리와 도시에도 이런 풍경은 없다. 이건 만들다 만 도시의 풍경,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도시의 풍경이다. 풍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다리를 건널 수 있지만 다리에 머무를 수 없고 섬을 볼 수 있지만 섬에 들어올 수 없다.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지만 뭐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서울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서울적인 일은 한강의 대교를 걸어서 건너는 일이다. 친구는 한 번도 걸어서 건너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름도 대교잖아. 무슨 다리나 브리지가 아니라 대교. 우리는 조만간 서강대교를 건너기로 했다. 물론 걸어서 건널 생각이다.

글 | 정지돈(소설가)

MA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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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해안도로의 낮과 밤

20년 전 찾은 마산의 해안도로 산책로를 다시 걷는다. 산책로는 도시 안쪽으로 파고든 만을 따라 제법 길게 뻗어 있다. 산책로 왼편에는 만을 사이에 두고 한국 최초의 외국인 전용 공단이자 한국의 산업화를 견인한 마산수출자유지역이 무거운 철근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다. 20년 전보다 더 오래된 기억에 따르면 이 거리는 흐린 겨울날 아침처럼 온통 잿빛이었다. 잿빛 공기, 잿빛 건물, 잿빛 얼굴 그리고 잿빛 바다. 바다 아래에는 먹을 수 없는 물고기가 살았고, 바다 위에는 쇳가루 탄 물을 머금은 듯한 해파리들이 퉁퉁 불은 시체처럼 떠다녔다. 바다에게는 더없이 곤혹스러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활기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빈 땅에 집들이 쉬지 않고 들어섰고, 시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롯데 야구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도시 전체가 들썩거렸다. 롯데가 지면 야구장과 그 주변은 소요로 요란스러웠다. 그럴 때면 어른들은 말했다. 3.15의거가 괜히 여기서 일어났겠느냐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의사(義士)와 폭도의 차이를 알고있다. 산책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3.15의거를 기념하는 탑이 엄마 잃은 아이처럼 우두커니 서있다.

커다란 하버 크레인(Harbor Crane)을 장착한 바다 위의 배들을 바라보며 조금 더 걷는다. 마산의 외양은 IMF 사태 이후 화석처럼 굳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지만 바다는 많이 정화되었다. 바다가 물러나며 드러난 만의 갯벌 위에는 부리를 쉴 새 없이 조아리는 새들이 군집을 이루고, 산책로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낚시꾼들은 밤낮 가리지 않고 물고기를 낚는다. 방금 보리멸을 낚아 올린 어르신에게 다가가 물었다. “먹을 수 있어요?” “먹을 만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는다. 나는 마산과 창원을 잇고자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마창대교의 불빛을 바라보며 다시 걷는다. 진짜 의심 없이 먹을 수 있는 물고기는 산책로가 잠깐 끊어지는 곳에 위치한 마산어시장에 다 모여 있다. 이곳의 활기는 세월과 계절에 무관하게 흘러넘친다. 봄에는 도다리쑥국과 미더덕회, 여름에는 아귀찜, 가을에는 전어회와 구이, 겨울에는 복국과 물메기탕. 어시장 주변으로는 아귀찜 거리와 복국 거리, 통술 거리가 잔가지처럼 뻗어 있다. 술 생각이 간절하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친다. 마산어시장을 지나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길로 발길을 돌린다. 바닷바람에 시달린 담벼락과 지붕을 인 낡고 조그마한 주택들 사이로 꽤 세련된 단독 주택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다. 한 뼘 크기의 카페와 서점, 진열대가 휑한 구멍가게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뒤이어 언덕길 끄트머리에 위치한 문신미술관이 눈에 들어온다. 머무는 곳이 자신의 작업장이라던 조각가 문신은 14년 동안 추산동 ‘바위 언덕 전체를 파내고 쌓아 올려’ 이곳을 지었다. 문신미술관에 들어서면 그의 조각이 등대처럼 서있는 바다 위의 돝섬이 보인다. 돝섬은 해상유원지로 유명했지만 쇠락을 거듭하다 지금은 자연테마공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돝섬에는 가락국 왕의 후궁인 미희가 환궁을 거부하고 이 섬으로 도망치면서 지금의 형태가 만들어졌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부귀영화를 뒤로한 채 섬에 숨어든 미희처럼 마산은 남부럽지 않게 역동적이었던 시절을 홀로 쓸쓸히 품고서 지금은 창원시로 통합되었다. 수평선 가까이로 눈길을 돌리니 마창대교를 지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애처롭게 반짝인다.

글 | 김기창(소설가)

BERLIN

살아서 베를린을 탈출하는 법

베를린의 겨울을 경험해본 이라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겨울의 베를린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각종 심심한 상황을 정성껏 모아놓은 곳이다. 해는 오후 4시면 지고, 춥고, TV는 재미없고, 음식도 맛이 없다. 게다가, 인터넷도 느리다(인터넷 설치를 신청하면, 두 달 뒤에 설치 기사가 온다). 할 일이라곤 오로지 맥주를 마시는 것뿐인데, 어느 날 자각하게 된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 아닌가.’ 그러면 우리는 맥주잔을 놓고 책을 잡기 시작한다. 마침 베를린의 지하철에는 책을 들고 있는 시민이 많다. 어쩐지 ‘아. 나도 맥주에 지쳤단 말이야’라는 표정을 짓는 것 같다.

여기서 잠깐, 독서 시장에 대해서 말해보자. 말이 나온 김에, 독일 북부부터 시작하는 북유럽에 대해.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2013년 출판 당시 스웨덴에서만 100만 부가 팔렸다고 광고했다. 당시 스웨덴 인구는 900만 명이었다. 통계적으로 흔히 쓰는 계산법, 즉 가구당 가족 수를 4인이라고 가정하면 스웨덴에는 225만 가구가 있는 셈이 된다. 그런데 100만 부가 팔렸으니, 2.25가구당 이 책이 한 권씩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북유럽이니까. 북유럽의 겨울에는 할 게 없다. 왜 하이데거나 니체 같은 철학자가 독일에서 탄생했겠는가. 겨울에 할 일이 없는 탓이다. 온종일 관념적인 생각에 빠지는 게 겨울을 보내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왜 러시아에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같은 대문호가 탄생했겠는가. 겨울에 할 일이 없어서다. 밖에 나가면 추우니까,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독일에 쇼펜하우어 같은 염세적인 철학자가 탄생했겠는가. 독일의 겨울을 지내면 정상적인 인간이라도 염세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미치지 않으려면 생각의 결과물을 책으로라도 내는 수밖에.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자. 말했다시피, 북유럽 TV는 지독할 만큼 재미없는 데다, 경제 수준에 비해 자국 영화는 별로 없고 흥미롭지도 않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긴 겨울을 때우려면 책이 필요하다. 가급적이면 긴 겨울만큼 끝나지 않을 긴 이야기의 두꺼운 책을 쟁여놓는 게 바로 월동 준비다.

나는 몇 해 전 베를린에서 석 달간 체류했다. 때마침 겨울이었다. 회심의 ‘비상도서’를 다 읽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오후 3시면 어둑했고, 맥주를 매일 마셨지만 밤 9시면 대부분 집에 들어와 있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글을 쓰는 것 뿐이었다. 이런 연유로 베를린에 체류한 90일 동안 매일 일기를 썼고, 그 일기들을 묶어서 <베를린 일기>라는 책을 냈다. 당신도 겨울에 베를린에 가서 맥주에 지치면 공감할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일기라도 쓰는 게 낫다는 것을. 그렇기에 누군가 나에게 글쓰기 가장 좋은 도시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한겨울의 베를린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글을 안 쓰면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형벌’을 받는 것과 같으니까. 만약 살아서 지옥을 체험하고 싶다면, 한겨울의 베를린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지옥에서 탈출하는 방법도 있다. 눈치챘겠지만,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글을 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글 | 최민석(소설가)

피처 에디터
김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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