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부산, 광주까지 비엔날레 순례기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비엔날레 순례기

2018-10-02T16:08:40+00:002018.10.03|FEATURE, 컬처|

지난 9월, 서울, 부산, 광주에서 비엔날레가 개막했다. 이맘때면 세 도시는 미술이 주는 흥겨움과 미술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으로 늦가을까지 익어간다. 예술 축제가 문을 열자마자 그곳에 다녀왔다.

‘아고라’. 비엔날레 속의 광장.

‘아고라’. 비엔날레 속의 광장.

 

STATION 1.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좋은 삶을 위하여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지난 2000년 ‘미디어_시티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그동안 ‘미디어_시티 서울’,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등 여러 이름을 거쳐 올해부터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로 명칭이 바뀌었다. 자주 바뀌는 명칭이 다소 혼란스럽지만, 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모습을 반영하고 미디어의 개념을 확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예술을 보여주는 미술 축제다. 올해는 지난 9월 6일부터 11월 18일까지 총 74일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과 서울로미디어캔버스에서 열린다. 국내외 16개국 68팀의 작가가 참여해 인공지능, 지구 생태와 환경, 민주주의, 경제 등 다양한 소재를 매개로 올해 비엔날레의 주제인 ‘좋은 삶’을 화두 삼는다.

비엔날레의 골자를 보면 예술을 넘어 좋은 삶이란 뭔지 질문을 던지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4인을 ‘디렉토리얼 콜렉티브’라는 이름의 공동 감독으로 선정한 것부터 색다르다. 공동 감독 4인은 김남수 무용평론가, 김장언 독립 큐레이터, 임경용 더북소사이어티 대표,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다. 이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와 관심사에 집중해 초대한 작가들은 현대미술 작가는 물론 활동가, 기획자, 연구자 등도 포함된다. 덕분에 관객은 정말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접하며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놓치면 안 될 공간은 전시장 1층 중앙에 있는 ‘아고라’다. 그 옛날 아테네 사람들이 도시 한복판에 아고라, 즉 광장을 만들고 토론하던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디렉토리얼 콜렉티브 4인은 비엔날레 속 광장을 마련했다.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강연과 토론회 11건, 공연 6건, 전시 연계 프로그램 32건 등 총 49개 프로그램이 71회 이상 진행된다. 호모이코노미쿠스에 대한 강연, 장애여성공감 극단의 공연, 청년 독립에 대한 토론회, ‘좋은 삶을 만드는 활동가 되기 ABC’라는 이름으로 그린피스 동아시아 서울 사무소가 진행하는 3시간짜리 시민 참여 프로그램 등. 여느 비엔날레에서는 부수적이고 2차적인 강연이나 공연을 메인 콘텐츠로 삼은 건 미술관을 공론의 장으로 만드는 차별화에 신경을 썼다는 의미다.

작품 대부분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층부터 3층에 걸쳐 전시된다.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이 시선을 끈다. 스크린 속에는 수많은 영단어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 작품은 데이터 시각화 아티스트인 민세희가 동료 작가들에게 인공지능 시대에 갖게 되는 의문이나 맞닥뜨리는 한계 등을 물어보고, 그들이 대답한 내용을 기계에게 학습시킨 뒤 비주얼화한 작품 ‘모두의 인공지능’이다. 1층 전시장에는 민세희의 작품처럼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작품이 꽤 많다. 마이크 타이카는 인공지능이 온라인 사진 공유 플랫폼인 플리커(Fliker)에서 얼굴 사진 수천 점을 학습해 만든 여러 가상 인물의 초상화를 전시한다. 또 그 가상 인물들이 실제 인물이라면 어떤 트위터 멘션을 보낼지, 인공지능을 학습해 만든 가짜 멘션들을 수많은 종이에 출력해서 커튼처럼 아래로 흘러내리게 설치했다. 관객이 현재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기계와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고, 상호간의 진정한 관계를 모색하길 바라며 완성한 작품이다.

민세희, 마이크 타이카, 오스카 샤프, 로스 구드윈을 포함해 작가 13인은 이번 비엔날레를 위해 ‘모두의 인공지능’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이 프로젝트를 통해 인공지능의 생활적 편리함에 익숙해지기 전에 인공지능이 인공(Artificial)이 아닌 증강된(Augmented) 지능을 의미한다면 과연 누구의 지능이 증강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특정한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기술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프로젝트에서 말하는 ‘모두’의 범위에 관객 자신도 속하는지 등을 묻는 것. 작품들은 가장 먼저 비주얼적으로 독특하지만, 무엇보다 관객이 작품들에 사용된 인공지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어 오픈일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개념미술로 유명한 독일 출신의 아람 바르톨도 재밌는 작품을 선보인다. ‘비밀정보교환소’가 그것으로 2층 전시장 한 벽면에 USB가 꽂혀 있는 것이 전부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시선을 끄는데, 누구나 USB에 파일을 넣거나 USB에서 파일을 찾을 수 있다. 아람 바르톨은 지난 2010년부터 현재까지 USB를 미술관뿐만 아니라 벽, 건물 외벽, 도로 경계석 등 공공 공간에 삽입하면서 ‘비밀정보교환소’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일종의 익명의 오프라인 네트워크인 ‘비밀정보교환소’를 통해 현재 만연해 있는 익명의 온라인 네트워크 세계가 편리한 삶인지, 좋은 삶인지를 되짚어보게 만든다.

작품군을 공동 감독 4인의 추천별로 나누어 본다면, 좋은 삶이라는 큰 주제는 4가지 테마로 구분되는 셈이다. 먼저 김장언 독립 큐레이터는 좋은 삶을 ‘연대, 생산, 생명’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얘기하고자 그와 관련한 작업을 하는 작가를 비엔날레에 초청했다. 그중 ‘크리티컬 아트 앙상블’이라는 작가 집단의 화두는 환경이다. ‘환경 트리아제 (Triage): 민주주의와 죽음의 정치(Necropolitics) 내에서의 실험’ 쪽으로 가면 각각 중랑천, 청계천, 아리수가 들어 있는 수조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관객은 어떤 물을 가장 먼저 깨끗이 해야 할지 해당 수조에 돌을 넣는 것으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식이다. 가장 오염된 수역을 개선하는 게 나을까, 이미 오염된 수역은 포기하고 가장 건강한 수역을 보전하는 데 집중해야 할까?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은 김상돈, 박형준, 복지국가청년네크워크 무중력지대 양천, 믹스라이스 등을 초청하며 포럼에 버금가는 강연도 마련했다. 주목할 만한 ‘호모이노코미쿠스의 진화: 공유 인간의 부활’은 박형준 글로벌정치연구소 부소장과 경제학 분야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전문가 케이트 라워스, 미셸 보웬스, 리처드 윌킨스 등 총 4명이 주축으로 이끄는 강연 시리즈다. 이들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인간을 뜻하는 호모이코노미쿠스의 한계를 파악하고, 적자생존의 경쟁적 인간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유 인간으로서의 진화에 대해 얘기한다.

김남수 무용평론가는 좋은 삶을 ‘지의류’(나무줄기나 바위 등에 붙어 사는 식물군)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공생하고 화합하고 개입하는 것을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들을 초청했다. 그가 무용평론가라서 그런지 초대 작가들의 작품 중 퍼포먼스와 연극에 눈길이 간다. 11월 8일과 9일 아고라에서 열리는 안무가 노경애의 작품 ‘움직이는 표준’은 질서와 개념 체계에 대한 그의 시선이 담긴 퍼포먼스다. 주류와 주류에서 배제되는 것, 그 배제됨에서 벗어나려는 것 등이 20분간 어떤 움직임을 통해 표현될지 기대된다.

독립출판물을 선보이는 서점이자 프로젝트 공간인 더북소 사이어티의 임경용 대표는 특히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 방식을 통해 작업하는 작가들을 초청했다. 홍콩에서 활동하는 작가 4인으로 구성된 ‘인민의 아카이브’가 선보이는 ‘나를 아카이브하기 위한 가이드’가 전시된 공간에 가면, 관객은 컴퓨터를 통해 예술 관련 내용을 검색할 수 있다. 인민의 아카이브가 직접 만든 예술 검색 사이트는 예술가들이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정보를 업로드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예술가와 서치하는 사람 모두 기존 공공 기관에서 분류하고 확산한 예술 관련 자료 틀 속에 갇히지 않게 된다. 이렇게 섹션 하나하나를 접하며 느끼는 동안, ‘그래서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에 대해 물음표와 느낌표가 교차할 것이다.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전시물들을 통해 고민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 디렉토리얼 콜렉티브 4인의 전시 의도는 꽤 성공적이다.

글 | 이응경(프리랜스 에디터)

▼ 더북소사이어티 대표 &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공동 감독 임경용

더북소사이어티는 독립출판물 서점이자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곳이다. 당신이 비엔날레 총감독 중 하나로 선정됐다는 점은 이번 비엔날레의 어떤 점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올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좋은 삶’이라는 주제 아래 다양한 영역의 예술적 실천이 우리 삶 속에 어떻게 침투하고, 어떻게 생산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자리가 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나를 포함한 다양한 배경과 전문 지식을 가진 이들을 공동 감독으로 선정한 것 같다. 그리고 과거 예술 출판이 전시 결과물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역할 정도였다면, 지금은 현대미술 안에서 독립적인 매체로 기능하고 있다. 내가 초청한 작가들 일부는 출판과 연관된 작업을 선보이는 이들이다.

책을 만들고 큐레이팅하는 경험이 비엔날레 감독으로 일하는 데 어떤 작용을 하나?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과정은 다양한 요소를 종이 안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이번 비엔날레를 준비하면서 까다로웠던,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 수많은 작품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책을 기획하고 편집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공동 감독끼리 어떻게 조율하고 시너지 효과를 냈나? 서로의 영역에 대한 존중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격렬한 토론도 했다. 마치 자석의 서로 다른 극처럼 어느 순간에는 협력을, 어느 순간에는 토론을 통해서 서로를 담금질했고, 그 과정을 통해 지금의 전시가 완성됐다.

비엔날레에 참여한 국내외 16개국 68명(팀) 중 당신이 선정한 작가는 누구인가? 8명(팀)을 초청했는데, 그들은 주로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 방식을 통해 작업하는 작가들이다.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디스플레이 디스트리뷰트, 모노스콥(두샨 바록), 윤원화와 윤지원, 인민의 아카이브, 최하늘, 리슨투더시티, 류한길, 안건형.

작가군 선정에 특별히 신경 쓴 바가 있다면? 10여 년 동안 예술 출판의 생산과 유통 일을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일반적인 사회적 조건 밖에서 예술 출판물을 만들고 유통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거나 그것을 남과 나누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대안이나 흥미로운 지점을 찾는 작가들을 초청하려고 했다.

이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주제는 ‘좋은 삶’이다. 당신이 정의하는 좋은 삶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그것을 언제든지 행할 수 있는 삶.

비엔날레를 더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팁을 준다면? 토론회, 공연, 전시 연계 프로그램 등 49개 프로그램이 71회 이상 진행된다. 서울시립미술관 웹사이트 등에 나와 있는 정보들을 검색해 관심 있는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좋겠다. 올해 전시는 어떤 면에서는 매우 정적이고 단순해 보이지만, 전시 외 프로그램을 통해 그 안에서 활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STATION 2 . 광주비엔날레

상상된 경계를 만나는 자의 용기

“뭐해?”라는 말과 그에 대한 답을 품고 2018 광주비엔날레를 관람했으면 한다. 우주의 난민들은 우주가 너무 넓은 탓에 자신들이 난민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기 어렵다. 그런데 광주에서 다들 그 사실을 알아채고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은밀하게 동지애를 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12회를 맞이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위적인 현대미술 축제인 광주비엔날레가 우주 난민인 우리의 실체를 들춰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 주제 ‘상상된 경계들 (Imagined Borders)’은 베네딕트 앤더슨 (Benedict Anderson)의 대표 저서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에서 차용한 개념이다. 확정성을 부정하는 기획에 걸맞게 2018 광주비엔날레는 단일 감독 체제가 아닌 11명의 큐레이터(클라라 킴, 그리티야 가위웡, 크리스틴 Y.킴, 리타 곤잘레스, 데이비드 테, 정연심, 이완 쿤, 김만석, 김성우, 백종옥, 문범강)의 주도하에 7개 섹션으로 열린다. 콘셉트가 다양하여 산만하다는 지적도 일부 있었지만, 상상된 경계들이라는 주제와 어울리는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지정학적 경계를 넘기 어려워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들과의 만남,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역사적 장소에 대한 체험을 열었기에, 경계에 대한 미적 감각을 새로이 갱신시킨다.

전시가 열리는 곳도 다양했다. 광주 전체가 비엔날레 장이 되었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관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진행되는 주제전 외에 ‘GB커미션’,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통해 근현대사 역사적 공공장소-구 국군병원, 구 도청, 무각사, 광주시립미술관, 이강하미술관, 핫하우스-를 거점화해 민주화 항쟁의 거점인 광주의 역사성을 현재로 끌어들여 그 경계를 다시 파괴하고 세우고 더듬는 작업을 선보인다. 가방과 제 몸을 이고 지고 광주를 돌아다니는 현대미술 관람자가 되려나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그런데 ‘그야말로 당신은 난민이자 기록되지 못한 자입니다’라고 누군가에게 듣는다면 울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화를 내거나 부정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체험의 다른 이름은 자신의 허기를 깨닫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감정이 들든 그것이 2018 광주비엔날레가 의도한 바일 터이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과 우리가 부르는 우리의 이름마저 단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실인가? 정말 그러한가? 전시에 참여한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이 그렇다는 답을 내린 것 같다. 그리고 각자가 선 자리와 지나온 시간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광주에서 만난 몇몇 불가능의 체험을 선사하는 전시를 소개한다. 먼저 문범강 큐레이터의 <북한미술: 사실주의의 패러독스> 전시에서 선보이는 22점의 북한 조선화는 전시회의 주제인 상상된 경계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북한의 현대미술을 소개한다. 북한 대표 작가인 최창호 인민 예술가, 김인석 공훈 예술가 등 32명이 참여하는 이번 전시에는 4~5미터 폭의 대형 집체화 6점이 최초 공개되었다. 아사자가 속출한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웃음’이ㅜ그림 전면에 다채롭게 드러난 것이 특징이다. 인간이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인간이기에 자존심, 자긍심, 존엄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적 지향이 슬프고 아프다. 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듯 풍부한 색채에 녹아든 이들의 ‘웃음’으로 나타난 것이 그 특징이라고 문범강 큐레이터는 설명하였다.

정연심, 이완 쿤 큐레이터의 <지진:충돌하는 경계들(Fault Lines)> 전시에서 선보이는 나라 요시모토의 ‘토비우’도 아름답다.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시라오이(Shiraoi) 인근 마을에 사는 소녀들을 목탄으로 거칠고 소박하게 그린 그림들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두 눈으로 그 잔상을 남겨야만 한다. 프란시스 알리스의 ‘아니의 침묵(The Silence of Ani)’은 ‘1001개의 교회가 있는 도시’로 알려진 ‘아니’, 이제는 폐허가 된 그곳에서 아이들이 피리를 불며 새들을 부르는 장면을 촬영한 작품이다.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곳에서 숨어서 피리를 부는 아이들의 장면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김만석 큐레이터의 <집결지와 비장소(Assembly points and Non-places)>에 들어서면 관람자는 일단 손몽주의 밴드를 이용한 거대한 배틀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에 압도당하게 된다. 하얀 고무 밴드가 ‘분할, 집합, 통과, 저지’의 효과를 내며 펼쳐진 가운데 아키라 츠보이의 합판에 그려진 여성들이 손에 들고 있는 고통스러운 고백을 만난다. 그녀들을 따라 지나가면 마침내 집창촌을 형태화한 듯한 철제 구조물을 만나고, 그 2층을 따라 올라가면 정유승이 작업한 광주의 대표적 성매매 집결지에서 우리가 마주해야만 하는 불편한 진실, 인간이 인간을 매매한다는 것의 의미를 ‘시선의 반납’을 통해 되받는다. 경계를 지어둔 먼 곳이 먼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시 작품을 만지는 두 손이 떨리도록 알게 된다.

<종말들: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참여 정치(The Ends: The Politics of Participation in the Post-Internet Age)> 전시장의 선우훈의 작품 ‘평면이 진정한 길이다’는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를 픽셀을 통해 연결한다. 대한민국을 휩쓴 온 오프의 이슈를 관람자가 직접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면서 볼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부터 현재 미투 운동까지 대한민국을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만들어 내는 활동,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보게 된다.

<GB커미션>으로 구 국군병원에서 열리는 전시도 필히 가볼 것을 추천한다. 구 국군병원은 5·18민주화항쟁 당시 시민 을 치료한 곳이다. 재건도 복원도 없이 풀숲과 진해에 묻힌 건물 가운데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마이클 넬슨, 카데르 아티아의 작품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전기를 설치하지 않은 자연광 상태의 공간이다. 원래 거기 있었던 잔해를 활용한 작품도 있기에, 마치 관람자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공간에 침입한 듯한 기분마저 선사한다. 구 국군병원 옆 교회 건물 내부의 병원 거울들은 그 이지러짐과 불투명함으로 관람자에게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을 안길지도 모른다. 역사의 장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모종의 공포 안으로 몸을 들이며 마주 하는 아픔이기도 할 것이다. 기꺼이 그 아픔을 감수하시길.

필리핀, 헬싱키, 프랑스의 현대미술 전시를 볼 수 있는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작품들이 주는 이채로움도 있지만, 그 전시가 열리는 공간들만으로도 관람객에게 미로를 제공한다. 특히 미셀 우엘벡의 시에서 소주제를 뽑은 ‘팔레 드 도쿄’의 전시가 열리는 광주시민회관에 방문해볼 것. 핫하우스에 전시된 이세현의 중력을 거스르는 돌 이미지도 강렬하다. 역사의 현장에 한 덩이의 돌이 부서지면서 계속 공중으로 떠오르는 찰나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광주는 아직도 다 말해지지 않았다. 광주가 내포한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돌아보아야 하는 역사가 광주를 대한민국 여기 저기로 퍼뜨리기 때문이다. 스스로 움직이고 커지는 미로처럼 광주는 대한민국 여기저기에, 현대미술과 더불어 그 경계를 고정하지 않는다. 피할 수 있을까. 우주의 난민인 우리들은 이미 미로 안에 있다. 스스로 미로를 만들면서, 조금씩 갈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보는 것, 이것이 경계를 만나는 자의 용기다. “(나의 경계 바깥에서 지금) 뭐해?”라는 이 질문 아닌 질문, “(내 안에서 지금) 뭐해?”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 오기까지의 상상, 상상 속에서 너무나 무한해지거나 너무나 빈약해져서 무어라 호명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큰 질문을 전시관을 돌다가, 광주 시내를 걷다가 자꾸 하게 될 것이다. 상상의 한계를 상정하기보다 상상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11월 11일까지 계속되는 2018 광주비엔날레에서 마음껏 헤매시기를 빈다.

글 | 김복희(시인)

 

STATION 3. 부산비엔날레

분단은 영혼을 잠식한다

2018 부산비엔날레 프레스 리뷰가 열리던 날, 짙은 하늘이 드리웠다. 서울에서 막 도착한 수십 명의 취재진을 실은 미니버스가 사람들을 뱉어낸 곳은 을숙도라는 낯선 땅이다. 한때 쓰레기 매립지였던 이곳은 철새의 서식지로 뜨내기 관광객은 알 길 없는 생소한 공간이다. 낙동강을 따라 다리를 건너면 저 멀리 초록색 외관의 정체가 선명해진다. 겉면이 온통 풀과 나무로 기이하게 뒤덮인 건물이 올해 6월 개관한 부산현대미술관이다. 부산비엔날레 전용관으로 낙점된 부산현대미술관과 구 한국은행 부산본부 건물 두 곳에서 11월 11일까지 전시가 계속된다.

올해 9회를 맞이하는 부산비엔날레의 가장 큰 변화는 장소와 규모다. 그동안 부산시립미술관이 위치한 해운대구를 중심으로 열리던 비엔날레의 거점이 사하구로 옮겨지며 ‘서부산의 시대’를 열었다. 아직 새 건물 냄새가 짙게 밴 부산현대미술관 지하 1층에서 열린 기자회견 현장. 전시 감독 크리스티나 리쿠페로와 큐레이터 외르그 하이저는 “미술 전문가도 지쳐 떨어져 나가는 메가 비엔날레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올해 부산비엔날레에서는 34개국 66명 아티스트들이 총 125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관람객들로 하여금 벼락치기 공부하듯 시간에 쫓기며 작품을 ‘소비’하지 않도록 했다. 올해 주제는 ‘비록 떨어져 있어도(Divided We Stand)’, 핵심 키워드는 ‘분단과 분열’이다. 크리스티나 리쿠페로와 외르그 하이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영토가 분열, 분할되는 과정은 일반 대중을 비롯해 특히 예술적 심상에 어떠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또 어떤 새로운 조건을 부여하는가?’, 잘려 나간 것은 영토만이 아니라는 것. 이런 현상이 사람들의 영혼과 심령에도 깊이 작용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전시 서문에 이렇게 구체적으로 썼다. “가령 냉전 시대를 떠올려 보면 편집증, 양극단 사이의 기이한 유사성, 핵 종말에 대한 공포 등을 쉽게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정체를 숨기고 잠입한 스파이들, 극명히 대립되는 이념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판박이같이 벌어지는 상황들, 그리고 바닷속에서 솟아오른 고질라 같은 괴물들이 바로 그 사례이다.”

부산현대미술관 1층,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첫 번째로 맞닥뜨리는 작품은 뜻밖에도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1991년에 완성한 영화 <유로파>. 영화 도입부의 최면 시퀀스 영상이 짤막하게 상영된다. <엑소시스트>의 신부님으로 등장하는 배우 막스 폰 시도우의 묵직한 내레이션이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여기서 좌측으로 돌면 최선아 작가의 대형 사이즈 작품 ‘부산 1:10,000’이 눈에 들어온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작가가 부산비엔날레를 위해 선보인 신작이다. 군중 속에 엑스트라 배우처럼 숨어 있던 작가가 어느새 작품 앞으로 다가와 설명을 들려줬다. “저는 해운대에서 나고 자라서 부산에 대한 개인사도 추억도 많아요. 부산 도로교통지도 책을 복사한 다음 그 종이를 조각조각 오려서 청사진을 만들었어요. 제 나름의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본 거죠. 저는 분단이라는 단어가 한국의 정치적 상황뿐만 아니라 도시 안에서도 시간과 공간의 분단이 일어난다고 생각했어요.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텍스트처럼 읽어낼 거리가 많은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그의 말처럼 부산역, 국제시장 등 작가의 고향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서린 이미지들이 파편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는 주로 과거 냉전 시대를 비롯해 오늘날 냉전 상태로 회귀하는 기이한 상황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라는 전시 감독의 소개처럼 1층엔 최근 해외 굵직한 비엔날레에서 자주 다루곤 했던 국제적 이슈가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안전 제일’이라는 로고가 적힌 화이트 점프슈트 작업복을 입고 한창 영상 설치에 몰두 중인 작가 듀오 노메다와 게디미나스 우르보나스에게 다가가 눈인사를 건넸다. 리투아니아 출생인 이들은 마치 사이언스 픽션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이들은 과학자, 건축가, 행정 관료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벌여왔다. 두 작가는 52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베니스에서 로마 주재 러시아 대사관까지 비둘기 경주를 해보자는 기발한 제안을 한 적 있다. 숨은 의도는 당시 여전히 장악력을 발휘하던 옛 소련의 힘에 저항하려는 것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변이(變異)’라는 제목의 미디어 작업을 선보인다. 큐레이터는 이들의 작업을 ‘레트로 퓨처리스틱’이라고 소개했다. 작가가 말했다. “이번 작품은 이중간첩을 다룹니다. 다른 국가의 정보를 캐내는 스파이들이 궁극적으로 하는 역할은 정보와 지식을 밀수하는 일이죠. 그런 밀수 행위를 하려면 특별한 기술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무중력 상태에서 식물을 재배한 1970년대 과학자들의 실험을 이곳에서 재현해보았어요.” 미래의 동굴처럼 설계된 공간 사이에는 발트해 연안 국가 출신 배우들이 스파이나 외국인 역할을 맡아 연기한 옛 소련의 컬트 영화가 부분적으로 콜라주되어 있다.

프레스 투어가 열리던 날,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모은 작가는 독일 츠키바우 출생의 1984년생 헨리케 나우만이다. 무대 디자인을 공부한 작가는 영상 및 사운드 작품을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시노그래피적인 공간에 결합하는 방식의 설치 작업을 한다. 기이한 취향을 가진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이케아와 멤피스의 가구가 이종 교배된 것 같은 기묘한 공간이었다. ‘독일 통일을 애도하는 제단’이라는 제목의 공간에는 무덤 형상으로 설치된 거실용 장식장이 눈에 띄었다. 투 블록 단발에, 발렌시아가 대디 슈즈를 신은 작가가 말했다. ‘2000’이란 설치 작품은 독일 통일 이후 18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2000년대 독일에 대해 회고하는 작업이에요. 제가 지금 서 있는 이 카펫은 서독과 동독의 경계를 형상화한 것이죠. 1990년대 독일이 통일됐을 당시엔 제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그것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심리적인 변화가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는 건 인지할 수 있었어요. 그 당시 동독 사람들은 서독에서 제공해준 그럴싸한 장식장을 집에 들여놓으려고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가구를 모두 내다 버리곤 했죠. 그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장식장 가구를 통해 독일이 결국 완전한 통일과 민주화에 실패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어요. 이런 기이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가구를 여러분의 집에 가져다 놓는다고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헨리케 나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면 정면으로 임민욱 작가의 ‘만일의 약속’이 보인다. 부산비엔날레의 주제인 ‘분단’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대형 설치 작업이다. 1983년 453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된 KBS 프로그램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작가의 기억 속에 강렬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임 작가는 국가적 프로파간다를 전파하는 국영 방송국이 냉전 분위기 아래 숨죽이며 살아온 수 많은 이산가족에 의해 오히려 점령당한 당시 상황에 주목했다. 전시장에는 기능이 마비된 방송국이 구현되어 있고, 이산가족이 사용한 오브제들이 흩어져 있다. 방송국의 상황실처럼 조성된 공간에는 신작 ‘내가 지은 이름이에요’라는 영상이 설치되어 있다. 영상 속에는 너무 어린 시절 헤어짐을 겪어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참가자들이 등장한다. 신원 미상인 그들이 각자의 사연을 적어낸 종이를 손에 쥔 채 서 있다. 임민욱 작가는 “이번 작업을 통해 디아스포라의 자기 인식 행위이자 생존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초코파이 10만 개로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한 천민정 작가의 관객 참여형 설치 작품 ‘초코파이 함께 먹어요’는 당이 떨어질 때쯤 들러볼 것.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도 부산비엔날레 개막 7일 차에 전시장을 방문하여 초코파이를 먹는 관객 퍼포펀스에 함께 동참했다. 천민정 작가는 정치와 대중문화를 결합한 폴리티컬 팝아트 작업을 한다. 경직된 정치적 상황을 대중문화라는 매개를 통해 위트 있게 풀어낸다. 작가는 최근 몇 년 동안 ‘김일순(김일성의 이름에서 따온 것)’ 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작품에 자신을 등장시켰다. 북한을 주제로 한 작품 가운데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 올리버 라리치의 ‘만수대 해외 프로젝트’를 찾아볼 것. 대형 작품들 사이에서 무릎 높이 정도의 청동상이라 그냥 지나치기 쉽다. 이 작품은 북한 미술 분야 최고의 작가들이 모인 평양 ‘만수대창작사’에서 근무하는 공훈 예술가 리선명이 라리치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것이다. 이 작은 청동상은 만수대 창작사가 해외 인사에게 개인적으로 의뢰받은 첫 작품이다.작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조각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 전형 (典型)을 이상화하는 측면이 있다”라고 말한다.

하늘이 어둑해지고 작은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30여 분간 차를 타고 부산비엔날레의 또 다른 전시 장소인 구 한국은행 부산본부로 향했다. 1963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2013년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두 번의 화폐 개혁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멈춰버린 엘리베이터와 문을 활짝 열어젖힌 ‘통제구역 제1호 금고’와 같은 장면이 묘한 감흥을 주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전시 감독과 큐레이터는 ‘과거로부터 온 미래의 단편’으로 묘사했다. 대리석이 넓게 깔린 은행 창구부터 금고, 숙직실까지 옛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 곳곳에 작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산비엔날레의 주제이자 표제작인 프랑스 출신의 작가 장 뤽 블랑의 ‘비록 떨어져 있어도’가 가장 처음 관객을 맞이한다. 관객을 단도직입적으로 응시하는 한 남자의 얼굴이 벽면을 꽉 차지하고 있다. 장 뤽 블랑은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빅 브라더를 떠올리며 이 작품을 만들었다. 2층으로 올라가자 기괴한 형상이 먹으로 가득 칠해진 벽화 작품 ‘요한 계시록의’가 공간을 압도했다. 이 작품은 홍콩 출신의 젊은 작가 오스카 찬 익 롱의 것이다. 작가는 동서양에 등장하는 재난과 불운의 상징적인 장면을 통해 근미래의 종말을 표현한다. 영국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 필 콜린스는 ‘딜리트 비치’라는 작품을 통해 인간과 화석 연료 간의 관계를 다뤘다. 사방이 온통 암흑인 공간 속에 타이어, 버려진 기름통, 찢긴 고무 조각 무더기 등이 있고, 디스토피아적 공상 과학을 다루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다. 일본의 아니메 스튜디오 ‘스튜디오 4℃’와 영화 <재키>의 음악을 맡은 작곡가 미카 레비가 협업해 제작한 이 작품은 결국 비극적인 최후의 결말을 목격하게 한다. 자신들을 ‘불한당 같은 반(反)국가 재(再) 브랜딩 캠페인’이라고 소개하는 다국적 미술 컬렉티브 더 프로펠러 그룹의 작품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번 부산비엔날레는 ‘부산’이란 도시의 감춰진 면모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준다. 가이드 투어 형식을 차용한 일종의 다크 투어리즘인 정윤선 작가의 ‘길 위의 진실’이 바로 그것이다. 부산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부산 영도구에 위치한 피란촌 이북마을을 지나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한국전쟁 초기에 남한 내 좌익 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의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의 희생자들이 구금된 옛 부산형무소, 실제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동매산 일대를 거쳐 다시 을숙도로 돌아왔다. 유리창 밖으로는 그저 평화롭고 일상적인 장면이 스쳐 지나가지만,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은 과거의 비극을 오버랩시킨다. 폐막 하루 전날인 11월 10일 토요일 ‘길 위의 진실’ 프로젝트는 두 번 더 진행될 예정이다. 미술관을 벗어나 오랫동안 조명되지 않은 부산의 아픈 역사를 길 위에서 목도하는 것도 좋겠다.

글 | 김아름 (<더블유>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