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섹시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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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인간에게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섹시함’이란 표현이다. 관능적이거나 지적이거나, 거칠거나 매끈하거나. 각자가 탐닉하고 상상하는 누군가가 있다. 남자 소설가 세 명이 섹시한 남자에 관한 단편 소설을 보내왔다. 동남아, 베를린, 황학동. 서로 다른 나라에서 그 남자에게 생긴 일.

늦은 우기의 바캉스 , 카일리 미노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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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동남아를 휴가지로 택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같은 직급의 사원들이 줄줄이 퇴사해버리고, 그들의 빈자리를 혼자 감당하고 나니 어느덧 여름이 훌쩍 지나 있었다. 2년 동안 만나던 남자와는 흐지부지 모든 게 끝나버렸다. 이별의 말미, 긴 폭염의 끝자락에 나는 긴 휴가를 썼고, 모든 것을 소진한 채로 이곳에 당도했다. 별다른 고민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내게 주어진 버짓에서 가장 편안하게,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을 수만 있는 장소가 이곳이었기에 고민 없이 예약했다.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앱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 내 얼굴과 몸이 선명히 드러난 사진을 버젓이 앱에 올리는 일, 아무렇게나 보내온 쪽지에 일일이 대답하는 일, 개중
얼굴 사진조차 걸리지 않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택시에 몸을 싣는 일, 그것은 한국에서의 나라면 좀체 하지 않았을 일이다. 하나 이곳은 동남아의 어느 도시, 이국의 어떤 곳.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비로소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플립플롭에 머슬 셔츠만 걸치고 밖으로 나섰을 때는 오후 언젠가의 시간. 초박형 콘돔 하나와 드럭 스토어에서 산 일회용 러브젤을 챙겼다. 이국의 언어와 딸기가 그려진, 캔디처럼 생긴 그것을 주머니에 넣자 든든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정말 안전이 중요하면 방 안에만 있으면 되잖아, 되물으며 괜히 웃음이 났다. 위험조차도 내가 감수해야 할 만족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얼마간의 흥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정도의 나이이긴 하니까. 바캉스란 그런 거니까.

호텔의 커다란 유리문이 열리자 습한 공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막 비가 걷힌 듯 습한 대기로 말미암아 우기의 끝자락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산을 챙길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직원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자신의 집에 찾아오라는 그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호텔에서 멀지 않은 그의 집 주소였다. 체모가 많은 몸, 삼십대 중후반의 나이, 영어권 국가 출신인 듯한 유려한 표현. 그 어느 것도 내 취향과는 가깝지 않았지만 기꺼이 그러겠다고 답을 보낸 것은 이국의 바캉스이기 때문이겠지. 나다운 것과 나답지 않은 것, 나와 타인들의 경계가 뭉크러지는 그런 공간. 이국, 바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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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스치듯 그의 검은 피부와 넓은 등을 보았다. 그는 방 안으로 나를 인도했다. 내가 씻고 나오기 무섭게 그가 욕실로 들어갔다. 왜 나보고 먼저 샤워하라고 한 걸까,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나는 천장에 맺힌 곰팡이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기하학적 패턴 같기도 하고, 실수로 옷깃에 흘린 잉크 같기도 한 자국이었다. 아무래도 물이 새는지 곰팡이 주위로 벽지가 울어 있었다. 고급 맨션답지 않은 마감이로군, 생각했다. 물소리가 멎었다. 욕실 문이 열렸다. 그가 욕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고 조도가 낮은 조명 때문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체리나무 소재의 협탁으로 가보스 블루투스 스피커를 켰다. 뭔가 묘하게 타임라인이 맞지 않는 집이라 생각한 찰나에 스피커에서 익숙한 일렉트로닉 넘버가 흘러나왔다.

카일리 미노그의 Slow.

그와 내가 나란히 누웠고 나는 천장의 곰팡이 자국을 부감으로 떨어지는 카메라를 생각하며 어쩌면 세상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섹스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카일리 미노그의 뮤직비디오가 그랬던 것 같군. 한없이 태양의 시점에서 떨어져 내리는 카메라. 수영복을 입은 남녀들. 그의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 딸기 향이 나는 젤을 발랐다. 합성착 향료의 냄새가 그의 방에 진동을 했다. 반복 재생을 걸어놓았는지 연신 카일리 미노그의 끈적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러브젤이 묻은 손을 입에 집어넣었다. 익숙한 향기. 눈을 감았다.

*
그날, 중학생이었던 우리는 백 년은 된 듯한 커다란 느티나무 옆 평상에 함께 누워 있었다. 합성착향료 맛이 나는 오렌지색 팝시클을 하나씩 나눠 문 채였지. 노인이 운영하던 트램펄린은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 위를 기어 올라갔다.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 쥔 채 말이야. 손가락에 끈적한 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금방 먹어버려야지 생각하며. 그 애와 내가 함께 트램펄린 위에 올라서 있었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버드나무의 이파리가 떨 듯이 출렁였고, 덩달아 나의 마음도 요동쳤고, 우리는 박자에 맞춰 함께 뛰기 시작했고 한참을 뛰다 보니 더 높이 뛰고 싶어져버렸고, 그래서 무게를 실어, 더 열심히 뛰었지. 트램펄린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뛰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덧 세상에는 우리 둘만이 남았지. 어느새 입가와 손가락엔 끈적끈적한 팝시클이 잔뜩 녹아내려 있었만 상관없었어. 우리는 뛰었지. 끈적해진 채로.

더 높이.
더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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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를 마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음악을 껐고, 빗소리와 우리의 호흡 소리만이 적막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초박형 콘돔과 살이 쓸리도록 건조한 시트, 자꾸만 얼굴을 향해 바람을 토해내 아랫입술을 메마르게 한 오래된 캐리어 에어컨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가 불을 켜자 검은 몸이 눈에 들어온다. 그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우산 갖고 왔어?”
“아니.”
“비, 생각보다 오래 내릴지도 몰라.”
“그걸 어떻게 알아.”
“살다 보면 뻔하지.”

그래 뻔하지. 뻔하디뻔한 것. 뻔하지 않은 것. 뻔해서 뻔하지 않은 것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나는 끈적한 손가락을 입에 넣어 보았다. 달았다.

글 – 박상영

박상영은 단편 소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로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로 2018년 제9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올해 9월 동명의 소설집을 출간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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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테겔 공항은 이상한 곳이었다. 입국 심사가 없었다. 사람들을 따라 5분 남짓 걸었나, 갑자기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다. 보더 라인을 넘었고 돌아갈 수 없었다. 짐은? 25kg을 꽉 채운 두 개의 캐리어는? 상민이 짐을 찾으러 들어가려고 하자 공항 직원이 단호히 막았다. 짐을 두고 왔습니다. 배기지 서비스 센터로 가세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속옷도 양말도 현금도 없이, 카드지갑과 페미니즘 책 한 권, 은둔한 철학자 책 한 권만 가지고 숙소에 오게된 거라고. 상민은 이튿날 도착한 현수에게 말했다. 캐리어에는 현금 5백만원과 랩톱, 석 달 동안 입을 옷 등 모든 게 들어 있었다. 현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 안 찾고 뭐 했어? 그냥 두고 온 거잖아.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테겔 공항은 일처리가 느리기로 소문난 곳이었고 주인을 찾지 못한 짐이 수천 개나 있었다.

*

그러니까 그게 벌써 일주일 전 일이다. 현수는 상민과 만난 지 반년가량 됐고 3개월간 베를린 레지던시에 머무는 그와 함께 있기 위해 2주간의 휴가를 썼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짐이 없는 남자친구와 베를린에 있게 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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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천만다행이지 뭐야.”

일주일이 지나고 공항 배기지 서비스센터에 들렀지만 또다시 허탕을 친 뒤, 현수는 짐짓 쾌활한 척하며 말했다.

“뭐가?”
“나는 무사히 왔잖아.”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없었다. 파리랑 빈에 가기로 했는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매일 공항에 갔다. 프렌츨라우어 베르그에서 트램을 타고 알렉산더 플라츠에서 TXL 버스를 타고 50분이 걸려 공항에 갔고 1시간을 기다려 짐을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전근대적일 수가. 전화로도 웹으로도 확인이 안 된다니. 그러나 상민은 의연한 척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현수와 베를린 돔에 갔고 자전거를 타고 프레데릭 샤인을 돌아다녔으며 함부르크반호프에서 요셉 보이스의 작품을 봤다.

*

현수는 상민이 짐을 못 찾게 될까 봐 불안했다. 관광을 해도 전혀 기분이 안 났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상민이 더 불안해할지도 모를 일이고 왜 짐을 두고 왔냐고 탓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이 머무는 에어비앤비의 와이파이 비번은 ‘Fear Eats Soul’ 이었다. 주인이 영화를 좀 봤네. 상민이 말했다. 응?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영화 제목이잖아.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렇구나. 우리도 오늘 밤에 노트북으로 영화 볼까? 아, 참. 노트북은 캐리어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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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상민은 빈틈이 없었고 흔들림이 없었다. 원하는 장소를 정확히 알았고 불필요한 곳에는 가지 않았다. 손톱은 바싹 잘랐고 셔츠는 보기 좋게 맞았고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향수는 아니었다. 그는 몸에서 특정 브랜드의 냄새가 나는 걸 혐오했다). 지금은 품이 맞지 않은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평소에 먹는 알레르기약을 먹지 못해 피부는 뒤집어졌고 사용하던 헤어 제품이 없어 머리는 엉성했다. 위치를 옮길 때마다 쩔쩔맸고 땀에 젖은 채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흐트러진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아니었다. 현수도 그와 함께 당황했다. 이럴 때 더 좋아해야지, 이런 모습 실망이군 같은 생각을 할 정신도 없었다. 걱정이 됐고 한편으로 답답했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는 말이 없었다. 안달이 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한숨을 크게 쉬는 거로 끝이었다. 그래서 답답한 건가. 생각보다 말이 없는 사람이군. 함께 여행을 온 건 처음이었고 예상과 다른 여행이 되었지만 아무튼 그렇군. 현수는 관계에서 처음으로 우위를 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은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 거지?”
“그렇지.”
“그럼 파리는 나 혼자 갔다 올까?”
현수가 말했다.
“그럴래?” 상민이 말했다.
“나는 괜찮아.”

좀 미안하긴 했지만 겨우 낸 연차고 일주일 동안 함께 공항을 왔다 갔다 했으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바로 표를 예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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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상민과 현수는 공항으로 향했다. 수속을 밟고 남는 시간에 다시 배기지 서비스센터에 갔다. 그런데 상민의 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찾았다! 상민이 소리쳤다. 현수도 비명을 질렀다. 우와! 그런데 속으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파리는 그럼 어떡하지? 괜히 혼자 간다 그랬나? 잠시 못 참고 그딴 소리를 하다니 내가 나쁜 년인가. 상민이 갑자기 캐리어를 열더니 옷가지와 몇몇 물건과 돈을 꺼냈다. 그러고는 두 개의 캐리어를 보관 센터에 맡기고 에어프랑스 창구로 가서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다행히 표가 있었다.

정말··· 현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자!” 상민이 말했다.

‘정말 신나는 여행이 되겠네.’ 현수가 생각했다.

글 – 정지돈

정지돈은 2013년 단편 소설 <눈먼 부엉이가>로 <문학과 사회>의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과 <창백한 말>로 2016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와 장편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가 있다.

랜덤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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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길 씨는 어느 모로 보나 섹시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에게도 나름 좋았던 시절과 좋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고, 누구에겐가 사랑을 받거나 그렇지 못한 시절이 있었지만,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조차 흔히 섹시하다고 칭해지는 매력은 전혀 없었다. 키는 165cm를 겨우 넘는 단신이었고, 체중은 가장 많이 나갈 때도 60kg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춘길 씨의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품평은 한결같았다.

‘지지리 궁상.’

한 인간의 매력을 외양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하나 춘 길 씨는 고아로 자라나 길거리에서 자란 탓에 문맹이었고, 머리도 그닥 영민하지 못했다. 가난 속에서 평생을 한 몸뚱이만 믿고 살아온 탓에 인품이란 걸 함양할 여유도 없었고, 지속적인 관계랄 것 자체가 없었으므로 성격 역시 좋다 말하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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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길 씨 아내 숙자 씨에게 어째서 그를 사랑했는가 물어보게 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숫자 8을 썼을 것이다. 숫자를 쓸 수밖에 없었던 건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신아비의 소개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팔려가듯 했던 결혼이었다. 말도 안 되는 혼인이었지만 독재자 사진이 교실마다 붙어 있던 시절에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한 이불을 덮고 산 지 10년쯤 지나서야 숙자 씨는 매력이라곤 눈 씻고 찾으려야 찾아볼 수 없는 남편에게 어떤 애틋함을 갖게 되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애증과 동정 사이의 무언가였지만 숙자 씨는 이것도 일종의 사랑이라 믿었다. 아, 그녀가 썼을 숫자 8은 다 팔자라는 의미였다. 결혼한 것도 아이가 없
는 것도 그녀는 다 팔자라 믿었다. 그래도 나름 사랑이 있었으니 섹시 비슷한 무언가가 있지 않았냐고? 춘길 씨는 자신이 아내를 사랑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급성 심근경색으로 아내를 잃은 후 도배 일을 그만두면서도 남들에겐 이렇게 말했다.

“지미~~럴, 도배지 잡을 년이 없으니 풀을 칠할 수가 있나. 왜 먼저 뒤지고 지랄이야.”

물론 도배지를 펼치기도 전, 풀을 섞을 때부터 목울대가 싸했지만 춘길 씨는 그게 다 황사 때문이라 확신했다. 그날 서울 하늘은 보기 드물게 맑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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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이나 부부가 함께해온 도배 일을 그만두고 그는 고물을 줍기 시작했다. 도배할 때 비하면 입에 풀칠한다 말하기도 민망한 벌이였지만 상관없었다. 춘길 씨에게 중요한 것이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그는 고아 시절 그랬듯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삶은 치러야 할 무언가일 뿐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에 리어카를 끌고 나가 사람들이 출근할 무렵엔 빈 박스나 철근 따위를 고물상에서 처분했다. 오전에 주운 것 중 돈이 될 만한 것은 닦아 황학동으로 향했다. 망가지지 않은 낡은 물건이라면 매입하는 상인 몇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한 교회의 무료 급식소에 들러 점심을 먹고 집으로 향했다. 오후엔 주워온 물건 중 자신이 쓰려고 남겨둔 것들을 고쳤다. 잠들기 전까지 그의 곁을 지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그랬고, 운동화 앞뒤에 밑창을 덧댄 신발 역시 직접 만든 것이었다. 시장에서 파는 헐한 것이긴 했지만 아내가 살아 있을 땐 단색의 작업복도 신발도 새 것만 사서 입고 신었는데 홀로 된 지금은 재활용 의류 상자가 그가 입을 옷을 골라주었다.

그날은 모처럼 수확이 좋은 날이었다. 미어터지게 가득 찬 재활용 의류 상자에서 제법 입을 만한 옷을 한보따리 건진 것이다. 한 철 옷 걱정은 던 춘길 씨는 기분이 좋았다. 동묘역에 내려서는 자신도 모르게 지나간 유행가를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이밀며 사진을 찍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한 하루였다.

“뭐 하는 거요?”
“멋있어서 찍은 겁니다.”

외국인 옆에 있던 곱상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이렇게 거들었다. 춘길 씨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외국인을 다시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멋있다는 단어는 평생 그와 무관한 말이었다. 막상 들어보니 나쁘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옷을 걸친 외국인은 팔뚝만 한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그에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말로 춘길 씨에게 뭐라 뭐라 했다. 곱상한 젊은이가 통역해주었다.

“이런 옷은 어떻게 입으신 겁니까?”

춘길 씨의 그날 옷차림은 이랬다. 머리엔 주황색 선캡을 썼고, 보라색 자전거 저지 위에 80년대 스타일의 어깨뽕이 날아갈 듯한 파워숄더 슈트-여성용-를 걸쳤으며, 하의에는 90년 중반 한창 붐이었던 치자색 개량 한복 바지에 털고무신 앞코와 뒤창을 덧댄 아식스 마라톤화를 신고 있었다. 무명으로 된 개량 한복 바지는 원단의 한계로 무릎에 구멍이 나 있었기에 춘길 씨는 팬티스타킹의 엉덩이에서 잘라낸 나일론으로 무릎을 둥그렇게 덧대놓았다. “어떻게 입긴. 죄다 줘 입고 고쳐 입은 거지.” 곱상한 사내는 외국인에게 그의 말을 번역했다. 외국인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춘길 씨는 참 싱거운 놈이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무료 급식소는 늦으면 밥을 먹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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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ycling and Modification’

주워 입고 고쳐 입었다는 춘길 씨의 답은 이렇게 번역되어 프레타포르테에서 검은 옷 외국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주최한 컬렉션의 소제목이 되었다. 보색을 사용한 과감한 믹스 매치와 복고, 그리고 친환경이 테마였다. 그 후로 한동안 수석 디자이너 사무실 보드판에는 춘길 씨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곳 디자이너들에게 춘길 씨는 거리의 뮤즈였다. 전 세계 패션 피플들이 매장 앞에서 밤샘을 하게 할 컬렉션이 그렇게 탄생했다. 2년 뒤 벨파스트에서 찍은 노숙자 사진을 붙이기 위해 보드판에서 춘길 씨의 사진을 떼었을 때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스트리트 패션’.

*
그 순간에도 춘길 씨는 지구 반대편에서 재활용 의류 상자란 이름의 패션의 랜덤 박스를 뒤지고 있었다.

글 – 임성순

임성순은 장편 소설 <컨설턴트>로 제6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장편 소설 <문근영은 위험해>,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극해>, <자기 개발의 정석> 등을 썼고, 제9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피쳐 에디터
김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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