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남성의 엉덩이와 고환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사진이 떡하니 걸려도, 그걸 문제 삼는 관람객은 요즘 없다. 동성애를 다룬 미술 전시가 금기에 가까웠던 시절부터 과거의 장벽을 허무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현재까지, 그 다사다난한 흐름을 살펴봤다.

피터 후자의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에게 기대기 (2)’.

피터 후자의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에게 기대기 (2)’.

1982년, 젊은 큐레이터였던 댄 캐머런은 뉴 뮤지엄에서 당대의 퀴어 미술가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동성애자에 관한 최초의 전시였다. 이 전시를 두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댄 캐머런은 동성애자들로부터 ‘자살에 가까운 실수’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가 전시를 위해 찾은 작가들은 대부분 거의 잃을 게 없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의 미술가였다. 당시에는 미술가로서 커밍아웃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그가 회상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편집증이 저를 억압했죠. 저 역시 내면화된 호모포비아로부터 완전히 면역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누드나 에로티시즘 같은 걸 구현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레즈비언은 은유적인 방식으로라도 성적인 관계를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지난겨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미켈란젤로와 데이비드 호크니의 블록버스터 전시에서, 큐레이터들은 두 예술가가 게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작품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흐르고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생전에 게이 미술가로 컬트적 명성을 누린 피터 후자와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도 마침내 인정받았다. 피터 후자의 사진 143장은 모건 도서관에 걸려 있고, 그의 친구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의 전시는 7월부터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자신들의 젠더 정체성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단 보와 조 레너드는 각각 구겐하임과 휘트니 미술관에서 중간 평가 격의 회고전을 열었다.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의 ‘피터 후자의 꿈/ 유키오 미시마: 성 세바스찬’.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치의 ‘피터 후자의 꿈/ 유키오 미시마: 성 세바스찬’.

동성혼이 합법화되고 있는 시대다. 미술관 관람객은 동성애 코드에 더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다. 노골적인 동성애 이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테이트 모던에서 열린 볼프강 틸먼스의 전시에서 털이 많이 난 엉덩이와 고환이 노출된 남성의 뒷모습을 담은 대형 사진은 전시장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렸지만,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않았다. 미술계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서 이제 사람들이 눈길 주는 곳은 성적 지향이나 욕망 따위가 아니다. 패션계 트렌드에서도 언급되는 ‘젠더 플루이드’나 젠더 정체성 자체가 주목받고 있다. 이런 양상과 도전은 더 깊고 의미 있는 전복이다.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모든 사람이 이성애자라는 가정을 뒤엎는 것 정도로도 문화 전쟁을 촉발시키는 데 도움이 됐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근본을 흔드는 질문은 우리 모두가 선천적으로 남과 여로 구분되어 한쪽에 위치한다는 원칙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버클리 미술관 퍼시픽 필름 아카이브의 디렉터인 로렌스 린더는 그 변화의 충동이 굉장히 흥분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 문화가 드디어 성별을 직접 선택하는 사람들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가 달라진 만큼 미술계의 전략도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닐까? 작년 겨울, 뉴 뮤지엄에서는 젠더 문제의 혼란스러움을 현대미술의 언어로 연구한 전시 <트리거: 도구와 무기로서의 젠더>가 열렸다. 전시를 큐레이팅한 조한나 버튼은 어느 정도의 혼란은 단지 급진적인 불안정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과거에도 현재 일어나는 변화의 움직임과 비슷한 양상이 있었다는 것. 한 세대 전에 가죽 재킷과 플란넬 셔츠를 입은 게이들은 과장된 남성성의 형태를 대중화시켰다. 그들은 ‘진짜 남성’으로 간주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남성성을 과장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크리스티나 쿼즈의 ‘아름다운 애도’.

크리스티나 쿼즈의 ‘아름다운 애도’.

오늘날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극단적으로 여성스럽게 치장하고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트리거: 도구와 무기로서의 젠더> 전에 참여한 트랜스젠더 여성 작가이자 시인과 디제이로도 활동하는 줄리아나 헉스터블은 자신의 몸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다. 그녀는 이미 3년 전 뉴 뮤지엄 트리엔날레에 출품된 작품에서도 놀라운 면을 보였는데, 이를테면 벌거벗은 흑인 여성 조각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미를 한껏 묘사하되 그 몸에 남성 생식기를 달아놓는 식이다. 헉스터블은 당시 조각상과 함께 전형적인 누드 이미지로 찍힌 자기 사진과 글을 벽에 붙여놓기도 했다.

이러한 접근이 별 새로울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남성과 여성을 가릴 것 없이, 인간의 육체는 오래전부터 미술가의 소재이고 주제였으니 말이다. 가장 유명한 예로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관람객이 쉽게 이물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남성 생식기를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이 분야의 선각자인 마르셀 뒤샹은 1921년에 젠더 정체성을 주제로 놀이하듯 퍼포먼스를 벌였다. 뒤샹은 여장을 하고서 스스로에게 로즈 셀라비라는 또 다른 자아를 부여했는데, 그 여성형 자아로 사진가 만 레이의 카메라 앞에 선 것이다. 앤디 워홀이나 메이플소프가 여장을 했던 것보다 50년도 더 앞서 벌어진 일이다.

호크니의 초기작인 ‘이 닦기, 이른 아침(오후 10시) W11’.

호크니의 초기작인 ‘이 닦기, 이른 아침(오후 10시) W11’.

피터 후자의 방식은 요즘 젠더 플루이드 시각을 지닌 작업들과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가 나체를 연구하면서 촬영한 뒷모습 사진 중 머리는 흐릿하게 처리하고 엉덩이는 넓어서 마치 서양배 혹은 비너스나 오달리스크의 모습처럼 보이는 게 있다. 다리 사이에 있는 고환도 보인다는 게 포인트다. 수염을 기른 채 치마를 입는 드랙 공연자들, 무대 위에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파괴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과장된 옷차림을 한 크로스 드레서들 역시 젠더 정체성의 모호함을 탐구한 피터 후자의 피사체였다. 물론 요즘의 트랜스젠더 미술가들은 피터 후자보다 더 과감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피터 후자의 주제가 ‘젠더 이분법’이었음에도 트랜스젠더 미술가들이 그에 딱히 반기를 들지 않은 건 후자가 유머와 긍정적인 태도로 젠더 이분법 자체를 대담하게 무시하는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다. 모건 박물관의 사진 담당 큐레이터가 말한다. “피터 후자의 사진과 함께 ‘젠더 꺼져’라는 문구가 벽에 붙어 있죠. 박물관에 이런 말이 쓰여 있는 예는 아마 없을 거예요.” 그러나 앞서 소개한 1982년의 그 문제적 전시에 피터 후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게이 사진가’라는 틀에 갇히길 거부했다.

동성애 해방 운동이 연이어 승리를 거두는 요즘이지만, 1980년대에는 신시내티 현대미술센터 관장이 퀴어 아트를 전면에 내세운 전시를 했다가 풍기문란을 일으킨다며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다. 현대미술센터 측이 곤욕을 치르게 만든 문제의 작가는 로버트 메이플소프로, 그는 근육질의 남성이 성행위를 하는 듯한 작업을 선보여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게이 미술가들은 그 첨예한 갈등의 시간을 뒤로하고 마침내 오늘날에 이르렀다. “메이플소프가 결국 이긴 거죠.” 미술가이자 큐레이터인 네일랜드 블레이크가 말했다. “옛날부터 복근이 선명하게 부각된 백인 남성 사진은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어요. 이젠 동성혼 역시 인정되는 순간을 지나고 있고요. 자, 그럼 소외된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나처럼 뚱뚱하고 체모가 많은 백인 혼혈 흑인은요?”

블레이크는 메이플소프가 만든 이미지 속 인물이나 애버크롬비 앤 피치의 모델들과는 다른 외모의 소유자다. 그는 ‘털북숭이 클럽’이라는 하위문화 모임에서 활동하는데, 참여자들은 다소 관습적인 방식으로 동물로 분장하고 연기한다. 블레이크가 선호하는 동물은 성별을 바꿀 수 있는 곰과 들소가 섞인 변종이다. “정말 흥미로운 모임이에요. 사람들이 각자의 욕망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이미지를 만들고 유포하길 즐기죠. 그런데 이게 좀 미묘합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닌 캐릭터를 만들어내고서, 자신은 생물학적 신체와 무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거든요.” 그의 말에 따르면, 털북숭이 클럽은 종종 스스로를 트랜스젠더로 인식하게 된 비교적 어린 사람들이 놀이하듯 트랜스젠더를 체험해볼 수 있는 환경으로 작용한다고. 블레이크는 필라델피아 현대미술연구소의 <태그: 퀴어들의 놀이와 앞으로의 방법에 대한 제안>을 기획했다. 전시엔 게이 미술가들이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상상하며 제작한 장난감과 놀이 무대가 설치돼 있었다. 복잡 미묘한 털북숭이 클럽도 그 무대 중 하나로 재현됐다.

줄리아나 헉스터블 조각상.

줄리아나 헉스터블 조각상.

나눌 수 있다. 피터 후자는 에이즈로 사망한 많은 미술가 중 한 명이며 보이나로비치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트랜스젠더의 경험이 그런 것처럼, 보이나로비치는 과거 동성애자에게 닥친 실존적 위기가 미술가의 손을 거치며 어떻게 더 큰 의미로 울려 퍼지는지 보여준 인물이다. 1970년대 후반 보이나로비치가 미술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이미 ‘소외된 관찰자’였다.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에 출품된 초기 사진은 ‘뉴욕의 아서 림보’ 시리즈. 보이나로비치는 19세기 시인의 마스크를 쓰고 식당, 지하철, 쓰러져가는 서쪽 부두의 게이 동네 등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속에서 림보의 얼굴은 젊지만 멍하고, 그는 무력하게 한 곳을 응시한다.

보이나로비치는 실제로 무력한 편이 아니었다. 그는 에이즈가 발병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 병에 대한 권력자들의 무관심에 분노를 터트렸다. 직접 쓴 글에서는 적나라하고 대담하게, 회화와 콜라주 작품에서는 야심 있고 삐딱하게, 정부가 의도적으로 에이즈를 묵인하는 것을 더 큰 재난, 특히 환경 오염과 연관 지었다. 회고전의 큐레이터는 ‘피터 후자가 에이즈 확진을 받은 이후, 절친 보이나로비치의 작품에 담긴 톤이 점점 더 강경해졌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사람을 도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것이다. 피터 후자가 사망한 직후, 보이나로비치는 친구의 시신을 촬영했다.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를 묘사한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가 연상될 정도로 감정을 최대한 이입해서 엄숙하게 담았고, 손과 발의 클로즈업도 촬영했다. 몇 년이 지나 자신의 병도 악화되자, 그는 얼굴을 흙과 돌로 뒤덮은 채 임시 묘지에 매장된 것처럼 보이는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예견된 죽음을 우울하게 받아들이기보다 대항하며 거스르려고 했다.

털북숭이 클럽 모임에서 고양이와 토끼의 혼종으로 변장한 사람.

털북숭이 클럽 모임에서 고양이와 토끼의 혼종으로 변장한 사람.

볼프강 틸먼스의 ‘목’.

볼프강 틸먼스의 ‘목’.

만 레이가 여장한 뒤샹을 촬영한 사진.

만 레이가 여장한 뒤샹을 촬영한 사진.

미국에 레이건과 부시가 집권하던 시절, 보이나로비치의 종말론적 작품은 오늘날 트랜스젠더 미술가가 젠더 이분법을 교차시켜서 흐리는 것만큼이나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트랜스젠더 문화를 주류 문화가 수용하는 건 너무 획기적인 일이라, 퀴어 미술이 앞으로 무엇을 더 성취할 것인지 확신하긴 어렵다. 1995년, 로렌스 린더와 네일랜드 블레이크 두 큐레이터는 전시 <다른 빛 안에서>를 공동 기획했다. 게이와 레즈비언의 경험에 국한하지 않고 에이즈라는 재앙을 다시 되짚어보는, 그렇게 성소수자라는 개념을 파헤쳐보려는 시도였다. 당시 그들은 다양한 성 정체성의 미술가를 포용하고자 했다.

20년이 더 흐른 지금, 두 사람은 당시 전시에 트랜스젠더 미술가가 없었다는 점을 스스로 지적한다. 아쉬움과 냉정한 판단을 바탕으로, 로렌스 린더는 과거와 현재 미술가들의 창작에서 연결되는 흐름을 발견했다. “동성애자들의 경험에는 늘 갈등과 관련한 것이 있죠. 그러나 그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충동이 꼭 동성애자의 경험을 규정하는 건 아닙니다.” 퀴어 감수성은 무례하고 반항적이게도, 앞뒤가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거부한다. 시대가 바뀐 지금도 트랜스젠더 미술가들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