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시대, 가리는 것이 곧 드러내는 방식이 되다

1990년대 짐 캐리가 연기한 영화 <마스크>. 신비한 힘이 깃든 나무 마스크만 쓰면 본래의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은행원이 녹색 가면을 쓴, 초인적인 힘을 가진 불사신이 된다. 얼굴을 가리는 것은 단순하게 신체 일부를 감춘 것이 아니라 정체성 또는 본래의 모습을 감췄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이 공포가 될 수도, 위트가 될 수도 있다. 뭐 하나 정해진 것이 없는 ‘익명’의 상징인 가면을 패션계는 어떻게 해석할까?

아주 오래 전부터 가면은 종교적 세레머니 또는 변장을 위해 ‘기능적’으로 사용됐고 가면을 즐기면서 사용하게 된 것은 카니발 풍의 가면무도회를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름을 숨기거나 본래의 정체성을 숨긴다는 ‘익명’의 정의와 패션계에 흐르는 ‘익명’의 정의는 확실히 달라 보인다. 얼굴을 가리는 가면 혹은 복면이 정체성의 일부로 자신을 표출하는 아이템, 곧 패션으로 해석되기 때문. 2019년 봄 여름 컬렉션을 통해서도 보통의 마스크를 뛰어 넘어 눈과 이마를 가린 구찌, 닌자 처럼 얼굴의 반을 마스크로 가리거나 페인팅으로 가리는 방식을 선택한 알렉산더 왕. 얼굴과 머리 전체를 복면처럼 덮은 형태로도 등장했기 때문. ‘패션에는 정답이 없다’라는 상징적인 말처럼 디자이너가 해석하는 가면에는 시즌과 어떤 형태, 소재의 제한이 없다. 가리는 것이 곧 드러내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얼굴을 가렸지만 그로 인해 드러나는 디자이너의 개성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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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퀸(Richard Quinn)

센트럴 세인트 마틴 졸업 패션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붙잡은 그는 얼굴을 가리다 못해 전신을 덮는 과감함을 가진 디자이너다. 플라워 패턴 혹은 기하학적 도형으로 모델의 신체에 꼭 맞도록 얼굴과 머리 형태, 손가락을 포함한 전신을 모두 감싸 흡사 마네킹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한 인터뷰를 통해 시대를 초월하는 팀 워커, 팀 버튼의 작품을 통해 영감을 받는다고 밝힌 바 있다. 리차드 퀸의 컬렉션은 현실을 초월한 그만의 디자인 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마스크’를 활용했다. 첫 등장을 알린 2017년 H&M 디자인 어워드부터 지금까지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플로럴 패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방식을 이어오고 있다.

 

릭 오웬스(Rick Owens)

릭 오웬스는 2016년 2017년 컬렉션에서 독특한 헤드피스를 연달아 선보였다. 얼굴의 전체를 가려 정체를 숨기기 아주 적합할 만큼 큼직한 헤드피스는 스웻 셔츠의 일부와 머리카락을 활용했다. 2017년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는 고대, 중세, 동물계 전체를 탐구해 철사 프레임과 스웻 셔츠를 활용, 즉흥적으로 베일과 크라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환경 변화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했던 2016년 가을 컬렉션에서는 신비롭고 괴기스러운 느낌이 드는 거대한 누에고치로 머리를 감싼 듯 혹은 수증기로 덮인 듯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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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무라야마(Shin Murayama)

자신을 마스크 메이커라고 소개하는 신 무라야마는 1990년대 후반부터 디자이너와 혹은 브랜드와 프로젝트로 마스크를 디자인하다 2008년 미국에서 본인의 이름으로 개인 전시와 작품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신 무라야마의 감각적인 작품을 눈여겨본 패션 브랜드들은 그에게 모자와 마스크 디자인을 의뢰했다. 마스크라는 한 길만 고수하는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나이키 양말로 만든 헤드피스, 마스크 디자인 스케치뿐만 아니라 아티스트와 협업한 마스크도 업로드하고 있다. 단순히 마스크만 파는 마니아 수준을 뛰어넘어 완성도가 높은 그의 작품을 알아본 힙합 스타 에이셉 라키(ASAP Rocky)도 신 무라야마의 의뢰인 중 한 명이었고 지난 4월 밴드 혁오(Hyuck Oh)와의 컬래버레이션 마스크 4피스도 공개했다. 폴로 모자를 해체해 다시 구성한 듯한 그의 마스크는 꽤 디테일 해 오래 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스크뿐만 아니라 데님을 리폼하거나 신발을 디자인하는 등 다른 영역의 활동도 조금씩 보이고 있는 그의 향후 계획이 궁금해진다. 그의 작업물은 인스타그램 계정과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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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신비로움에 둘러싸인 데님 브랜드 69는 성별이 아닌 ‘비 인구통계’ 의류 브랜드라고 소개한다. 내놓은 점프슈트는 성인 세 명도 거뜬하게 들어갈 만큼 넉넉하고 여성의 가슴을 입체적으로 옷에 붙이는 시도 등 괴짜스럽고 웃음이 나는 요소들을 선보이는 브랜드다.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옷뿐만 아니라 침구, 가구, 오브제까지 데님으로 만들어 패션 브랜드가 아닌 데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목표로 한다는 포부도 밝힌 바 있다. 흑과 백처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 짓는 것을 원치 않듯 얼굴이 드러나는걸 극도로 꺼려하는 디자이너와 그간 발표한 옷들로 인해 ‘외계인이 운영하는 브랜드가 아닌가’ 하는 우스갯소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같은 행보에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는 빠질 수 없는데, 69의 복면은 데님을 얇게 재단해 국수가락처럼 쏟아져 내리는 혹은 흘러내리는 이미지를 주지만 역시나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은 할 수 없다. 보이는 대로 느끼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