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년생과 친구하세요?

이채민

한국식 나이 때문에 족보가 실타래처럼 꼬인다. 폐지됐으나 곳곳에 남아있는 빠른 년생의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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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는 빠른 86라서요. 제 친구들은 다 85에요.” 살면서 한 783번 정도 들은 말이다. 그래서 친구를 하겠다는 건지. 나이 많은 사람대접을 해달라는 건지. 대체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길래? 한 시속 300km 정도 되나 보다. 빠른 년생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세종대왕님이 알면 줄담배를 피우실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렇게 저렇게 친구를 맺고 올라가면 송해 선생님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같은 연도에 태어났는데 형이라니, 아무리 1월에 태어났다고 해도 에디터는 5월생이라 4개월 밖에 차이가 안 난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면 슬며시 ‘학번’ 카드를 꺼낸다. 같은 학번이면 친구가 될 수 있는데, 재수를 하거나 애초에 초등학교 입학을 빨리 해 버리면 그때부터 또 머리가 아프다. 나 참, 맷돌을 돌리려는데 손잡이가 없다. 문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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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간의 표준시를 맞추고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해진 이 시점에서 나이 표기가 가끔 발목을 잡는다. 한국 사람은 세 개의 나이를 가지고 있다. 해가 바뀌면 한 살을 먹는 한국식 나이, 생일을 기점으로 계산하는 만 나이, 그리고 현재 연도에서 태어난 해를 빼는 연 나이(이 연 나이는 공공기관에서 주로 사용). 이렇게 희한한 방법으로 나이를 계산하는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심지어 중국, 북한에서조차 만 나이를 사용하고 있다. 매년 1월 1일에 한 살을 더 먹는 건 전 세계에서 한국인들뿐이다. 이쯤 되면 매년 초에 광화문 광장에서 전 국민의 생일 파티라도 열어야 하는 거 아닐까. 심지어 12월 31일에 태어난 아기는 하루 만에 두 살이 되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도 발생한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벤자민 버튼도 물음표가 생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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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한국식 나이를 폐지하고 만 나이로 통일하자’는 청원이 있었다. 만 나이로 통일하면 불편함도 덜할뿐더러 지금보다 두 살 더 젊어질 수 있다. 한 설문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2.9%가 ‘빠른 년생으로 인해 서열이 꼬인 적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단순히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라 법률적인 문제까지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오늘이 2018년 6월 22일이라고 가정해보자. 99년 6월 25일생인 소년이 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아직 만 19세가 아니기 때문에 소년법으로 성인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를 한국식 나이로 따진다면 20세. 얼마 전, 지방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했을 명백한 성인이다. 물론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태아가 뱃속에 있는 기간도 나이로 계산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렇게 되면 생명공학적인 문제로 넘어간다. 그럼 정자로 헤엄칠 때부터 개월 수를 계산하자는 건가. 그렇다고 나이를 성적표 위조하듯 쉽게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라 전체의 문서와 전산시스템을 갈아엎어야 하는데, 도로명 주소로 변경할 때와 비교할 수 없는 혼란이 올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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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도 문을 연지 1년이 되어야 ‘개업 1주년’이라고 하는데 왜 한국 사람은 태어나서 1년만 지나도 2살이 되는 걸까. 어쩌면 분쟁이 생길 때마다 “너 몇 살이야?”라고 묻는 서열 문화부터 뜯어고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외국처럼 서로 이름 부르면서 다 친구하면 안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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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리뷰팅 에디터
박한빛누리
사진
Val Vesa, Greg Raines, Hannah Valentine, Sam Manns, Melissa Askew by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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