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의 두 남자, 이준익&박정민

이채민

감독 이준익은 엇박자와 정박자, 철없음과 철듦을 오가며 외면은 유쾌하고 내면은 무르익은 영화인에 이르렀다. 배우 박정민은 연기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집요하게 의심하며, 결국 탁월한 답을 내놓는 필모그래피를 쌓는 중이다. 나이도, 캐릭터도 아주 다르지만 영화라는 불안한 파도 타기를 공유하는 두 사람이 <변산>에서 의기투합했다.

이준익이 입은 검정 재킷과 모자는 디올 옴므 제품, 티셔츠는 본인 소장품. 박정민이 입은 검정 점퍼는 CDG 제품.

이준익이 입은 검정 재킷과 모자는 디올 옴므 제품, 티셔츠는 본인 소장품. 박정민이 입은 검정 점퍼는 CDG 제품.

<W Korea> 7월 개봉을 앞둔 <변산>을 제목만 듣고 사극이나 무거운 작품으로 아는 이가 적지 않을 것 같다.
이준익
 <박열> <동주> <사도> 같은 내 전작들 영향도 있을 것이다. 전라북도 변산과 힙합이라니, 정말 이질적인 조합이지. 감독이 관객과 게임을 하는 존재라면, 관객의 예측을 반드시 벗어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식상하지 않으니까. 그러면서도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 이율배반적인 그 두 가지를 다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박정민 내가 래퍼로 등장하고, 고향이 배경이라는 정보를 아는 분 중에는 한국판 <8마일>을 예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변산>은 랩의 비중이 아주 크다든가 래퍼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건 아니다. 유쾌함과 재미, 어느 정도의 촌스러움도 있는 영화다.

지명을 제목으로 내세운 걸 보면 이야기의 키워드가 ‘고향’ 이겠다.
이준익 그렇다, 제목이 의미를 반영하니까. 첫 번째 키워드가 고향이고, 두 번째로는 ‘누구’의 고향인가를 들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성공으로 가는 장 중의 하나가 랩 아닌가. 랩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6년 연속 개근한 방구석 래퍼가 아버지 때문에 고향으로 소환되는 이야기다. 회귀가 아니라 소환이다. 부름을 당한 거다.
박정민 고향에 내려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 불편한 관계의 인물을 하나씩 만난다. 다시 고향에 내려가도록 결정적 역할을 하는 고향 친구 역할은 김고은 배우가 맡았다.

제작 보고회에선 기자들이 박정민의 랩 도전에 대해 많이 물었나? 래퍼 얀키와 랩 준비를 철저히 했고, 박정민이 직접 가사를 다 썼다.
이준익 작품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회견을 한다는 자체가 서로 추상적인 언어의 교환을 뜻한다. 기자들 입장에서도 인물에 대한 궁금증 정도를 물어볼 수밖에. 그들도 난감할 것이다. 기자, 영화 마케터, 셀렙들까지,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 상업주의의 희생양인 셈이다.

하지만 희생양이라고 하기엔 이준익 감독은 이미 그 분야의 달인일 텐데?
이준익 내가 내뱉는 말의 반은 다 말실수다(웃음). 실수해도 옛날에는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매스미디어 세상이었는데, 요즘엔 말과 그에 대한 댓글 역시 실시간으로 퍼진다. 관계자들은 당연히 피드백을 부지런히 체크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가’보다 ‘누구의 이야기에 어떤 피드백이 나오나’에 끌려가기 쉽다. 한편으로는 그게 정당하고 민주적인 소통 방식이다. 과거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좀 혼란스럽지만 말이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를 떠나,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권력자가, 한쪽이,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던 시대는 갔다.

유명 인사는 말을 적게 해도 말이 많아 보인다. 실어 나르고 재생산하는 매체가 워낙 많으니까.
이준익 말뿐 아니라 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말하는 자는 그만큼 이득을 보고, 이득 보는 만큼 피해도 본다. 그래서 결국엔 ‘돈돈’이라는 말씀(웃음).

박정민이 입은 티셔츠는 퍼킹 어썸, 팬츠는 셀린 제품.

박정민이 입은 티셔츠는 퍼킹 어썸, 팬츠는 셀린 제품.

두 사람은 <동주>에 이어 다시 작업했다. 시인을 꿈꾸는 식물성 인간 윤동주와 독립 운동에 여념이 없는 동물적 기질의 송몽규를 캐스팅하기 전, 배우 황정민이 “동주는 강하늘, 몽규는 박정민으로 가시죠”라고 했다는 일화가 꽤 퍼졌다.
이준익 강하늘은 내 영화 <평양성>으로 데뷔했다. 애초 윤동주는 강하늘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내 준비가 다 되기 전까지는 배우에게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다. 자칫 그들의 일정과 계획을 침범할 수 있어서다. 그런데 이제 준비가 다 됐다 싶은 딱 그때 황정민이 그런 말을 했다. 박정민을 알고 있었지만, 황정민의 입에서 언급되는 박정민이 내가 아는 박정민일 줄은 몰랐다. “어떤 박정민? 그 박정민? 그래! 알았어!” 이렇게 됐다. 만날 사람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만나지는 것 같다.

이준익 감독은 박정민에게서 어떤 잠재력을 봤나?
이준익 입소문 난 영화 <파수꾼>은 보지 못한 상태에서 <신촌좀비만화>라는 영화를 봤다. 안경 끼고 좀 덜 떨어진 아이가 하나 나오는데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거다. 대체 누군가 싶어 검색해보니 <전설의 주먹>에서 어린 황정민으로 나온 친구라네. 너무 충격을 받았다. <전설의 주먹>을 볼 때도 정민이가 눈에 띄었단 말이다.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내가 못 알아본 거지. 각인이 된 두 배우가 동일 인물이라니, 그런 건 감독에게 아주 큰 영감이 된다. 반드시 이 친구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주>를 준비할 때 윤동주의 친구 같은 사촌 송몽규 역에 이미 박정민이라는 배우를 매칭해놨다.
박정민 <신촌좀비만화>는 류승완, 한지승, 김태용 감독이 각각 연출한 세 편을 모아놓은 작품인데 그거 본 사람이 거의 없다. DVD도 없고 영화 파일로 구하기도 힘들 거다.

두 작품을 해보니 배우 박정민은 어떤 특징이 있던가?
이준익 정민이는 사고 체계가 굉장히 정교하다. 연기에 대한 답을 찾을 때까지 그 정교한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낸다. 그런 점은 배우에게 엄청난 힘이다.
박정민 ‘감독들은 귀납을 하고, 배우들은 연역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인 상적이었다. 감독이란 이미 시나리오를 많이 연구하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인데, 배우는 어떤 대사와 행동을 하기 위해선 동기가 필요하다. 그 동기에 설득되지 않으면 연기하기가 어려운 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작품에 임할 때마다 그런 부분에서 어려울 때가 많았다.

이준익이 입은 저지 티셔츠는 버쉬카 제품.

이준익이 입은 저지 티셔츠는 버쉬카 제품.

이준익 감독의 스타일은 ‘디렉션을 안 하는 게 디렉션’인 것 으로 알고 있다. 박정민이 혼자 생각을 많이 했겠다.
박정민 나는 알아서 하도록 안 맡겨두어도 원래 생각과 고민이 많은 사람이다(웃음). 시나리오를 자기 방식대로 어떻게든 해석해서 현장에 나가는 게 배우의 임무 아닐까? 그런데 요즘 들어 깨달은 건 배우가 이런저런 아이디어와 생각을 갖고 있어도 결국엔 감독이 생각한 그림이 가장 정답 같다는 점이다. <변산>의 학수 같은 경우는 사실 인물의 정서나 동기를 파악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영화가 학수의 이야기라, 학수의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까 연결이 잘 된다. 하지만 조연이나 단역 배우는 주연의 맥락에 기여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동기와 정당성을 찾기 힘든 경우도 잦다. 나도 조연을 많이 했으니 그런 어려움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준익 정민이가 이렇게 섬세하다. 얘 나한테 뭐 잘 안 물어본다.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지. 그 결과가 좋고.

배우는 한 작품에 임하는 동안에도 성장한다. 이준익 감독 은 박정민을 지켜보다가 좋은 의미로 낯설고 놀란 적이 있나?
이준익 거의 매번 그랬다. 난 촬영 전 리허설을 잘 안 하는데, 그냥 바로 첫 테이크에 들어갔을 때의 그 긴장감이 짜릿하다. 헤드폰을 끼고 모니터를 25c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정민이의 연기가 확 다가온다. 난 그 순간을 즐기며 ‘컷!’ ‘OK!’만 외쳤다.

배우를 잘 믿어주는 사람인 것 같다. 연기 현장에서든, 직장 생활에서든, 감독은 배우와 스태프를 믿고, 회사의 팀원은 또 다른 팀원을 믿는 게 이상적인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이준익 감독이 배우를 안 믿으면 누굴 믿어? 심하게 믿어서 오히려 배우들이 나를 잘 안 믿는 것 같아… 그냥 ‘OK!’ 하고 나서 배우가 ‘한 번만 더 갈게요’ 하면 ‘그래 또 해봐라’ 이러니 까. 정민, 너도 나 안 믿어?
박정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사실 <동주> 첫 촬영 전날 황정민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은 감독님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같이 해봤다. 형님이 그러더라, 감독님은 처음 아니면 두 번째 테이크에서 바로 OK를 잘 내리는 분이라고. 그러니 만약 준비한 걸 다 못 보여준 것 같으면 꼭 다시 가보자고 해라, 그래야 감독님도 나중에 편집실에서 고를 게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해주셨다. 그 때의 습관인지 내 연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도 ‘OK’ 소리만 들리면 자동반사적으로 ‘한 번만 더 갈게요’라고 했다(웃음).

이준익 감독이 박정민을 ‘지적인 양아치’라고 표현한다고 들었다. 박정민이 양아치 같은 연기를 잘하긴 한다. 드라마 <일리 있는 사랑>에서도 그런 면을 봤고, 심지어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 언니의 남자친구로 잠깐 등장했을 때도 보면서 ‘저런 양아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박정민은 어떻게 생각하나? ‘a.k.a. 지적인 양아치’에 대해.
박정민 과분한 표현이다. 지질하게 살았던 사람은 소위 양아치에 대한 동경이 있다. 괜히 집에서 폼도 잡아보고 한 과거가 있으니까 그런 면을 뽑아 연기로 가져오면 된다. 난 스스로 생각해도 좀 싸가지가 없는 면이 있다. 정해진 길을 가면 재미없어서 약간 엇나가는 걸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이준익 지적인 양아치, 그거 매력의 최정점이지. 최근 트위터에서 멋진 말을 득템했다. 파스칼이 한 말인데,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 자기 입으로 ‘양아치’나 ‘싸가지’라고 말하면 아주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소리지. 안 그러면 그런 말 못 한다. 내가 아니라 무려 파스칼이 그랬다니까?

더 자세한 인터뷰는 더블유 7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김희준
스타일리스트
최진우
헤어
윤성호
메이크업
권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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