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옷의 태로 본 현대 여성복의 어느 지점.

꽃무늬 폴로 셔츠, 재킷을 해체한 베스트는 셀린, 레이스업 슈즈는 트리커즈 바이 유니페어, 트위스트 데님 팬츠는 발렌시아가 제품.

꽃무늬 폴로 셔츠, 재킷을 해체한 베스트는 셀린, 레이스업 슈즈는 트리커즈 바이 유니페어, 트위스트 데님 팬츠는 발렌시아가 제품.

브래지어 착용을 잘 안 하는 편이다. 시작은 편안한 숙면을 위해서였고, 차츰 밖에 나설 때도 입지 않게 됐다. 그러다 보니 가슴이 부각되지 않는 오버사이즈 옷에 자연스레 손이 갔다. 남녀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톰보이 같은 옷. 훌륭한 아이템이나 심플한 옷과 매치하면 패션 에디터로 일상생활은 충분했다. 물론 집에가면 부모님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결이 다른 오버사이즈도 찾아봤다. 이를테면 피비 파일로의 셀린 같은 옷 말이다. 셀린의 테일러링 재킷을 입었을 땐 나를 지켜줄 우아한 갑옷을 입은 듯했고, XS 사이즈인데도 내 몸의 두 배는 될 듯한 큼지막한 폴로 셔츠는 오히려 사이즈 구분을 무시해버린 듯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지점은 내게 진보적이고 과감한 여성이 된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결국 그 폴로 셔츠는 내 옷장으로 모셔오게 됐다.

티셔츠가 붙어 있는 체크 셔츠, 깅엄 체크 스커트, 부츠는 모두 발렌시아가 제품.

티셔츠가 붙어 있는 체크 셔츠, 깅엄 체크 스커트, 부츠는 모두 발렌시아가 제품.

얼마 전, 레드벨벳의 아이린은 예능에서 잘 웃지 않은 모습을 두고 불성실한 태도 논란에 휩싸였다(<82년생 김지영> 독서 사건도 있다). 왜? 여자 아이돌은 보기 좋은 채로 예쁘게 존재해야 한다 는 한국적 분위기 때문이다. 30대에 접어든 나는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성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법한 옷이나,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것 대신 나를 위한 옷을 입는다. 패션 에디터로서도 굳이 유행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태도를 가진 여성복을 제안하기 위해 고민한다. 이게 현대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테일이 길게 떨어지는 재킷, 안에 입은 셔츠, 갈색 벨트는 셀린, 데님 팬츠는 코스 제품. 가죽 타이는 에디터 소장품.

테일이 길게 떨어지는 재킷, 안에 입은 셔츠, 갈색 벨트는 셀린, 데님 팬츠는 코스 제품. 가죽 타이는 에디터 소장품.

이런 동시대성을 의복으로 구현해온 디자이너를 꼽자면 남성복을 디자인하는 여성 디자이너 마틴 로즈가 일순위다. 영국패션협회의 지원으로 데뷔한 그녀의 2017 F/W 시즌 첫 런웨이 컬렉션은 세상의 모든 직업군을 탐험한 듯한 모습이었다. 은행원, 사무식, 버스 기사… 이들 대다수는 극한으로 통이 넓은 바지에 실키한 셔츠를 입고 타이와 타이핀을 했다. 스타일링에 남성적 요소가 당연히 많지만, 오버사이즈 실루엣은 오히려 성의 구분을 없앴다.

회색 체크 재킷, 민트색 패턴 니트, 줄무늬 셔츠, 통이 넓은 팬츠는 모두 우영미, 뱀 자수 장식 타이는 구찌 제품.

회색 체크 재킷, 민트색 패턴 니트, 줄무늬 셔츠, 통이 넓은 팬츠는 모두 우영미, 뱀 자수 장식 타이는 구찌 제품.

같은 시즌 많은 디자이너가 남성성의 전복을 주제로 삼았지만, 마틴 로즈만큼 신선하고 설득력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러더니 2018 S/S 시즌 런웨이에서는 여성 모델이 두셋 포함됐다. 유독 많은 여성이 그녀의 남성복을 사 입었기 때문이다. 마틴이 제시한 역설적인 성 체제에 설득당한 것이다. 마틴은 현재 뎀나 바잘리아의 발렌시아가 남성복 컬렉션의 컨설턴트이기도 하다. 이런 여성 디자이너는 흔치 않기에 더 소중하다.

큼지막한 카 코트, 플란넬 셔츠, 트위스트 데님 팬츠, 트위드 소재 펌프스, 조형적인 귀고리는 모두 발렌시아가 제품.

큼지막한 카 코트, 플란넬 셔츠, 트위스트 데님 팬츠, 트위드 소재 펌프스, 조형적인 귀고리는 모두 발렌시아가 제품.

성에 대한 담론이 용광로 같은 시기다. 보테가 베네타, 버버리, 지방시처럼 남녀 통합 컬렉션을 선언한 브랜드가 늘어나고 있고, 남성복, 여성복 디자이너라는 구분도 사라지고 있다. 커다란 여성복, 오버사이즈의 의미만큼 여성복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훨씬 넓어져야 하는 것이다. 성별은 물론 온갖 이질적인 것이 격돌할 앞으로의 세계. ‘상식은 진화하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