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들이 묘사하는 음식은 다양한 수사로 차린 성찬이자 그 시대를 반영하는 미각의 증거다. 우리에게 너무 낯설지 않은 20세기 초중반, 근현대 한국 문학에 등장한 메뉴를 한 상 차림으로 소개한다.

 

빙수
방정환의 수필 · 빙수


빙수-누끼
‘빙수에는 바나나 물이나 오렌지 물을 쳐 먹는 이가 있지만, 얼음 맛을 정말 고맙게 해주는 것은 새빨간 딸기 물이다. 사랑하는 이의 보드라운 혀끝 맛 같은 맛을 얼음에 채운 맛! 옳다, 그 맛이다. 그냥 전신이 녹아 아스라지는 것같이 싱긋-하고도 보드랍고도 달콤한 맛이니, 어리광 부리는 아기처럼 딸기 탄 얼음물에 혀끝을 가만히 담그고 두 눈을 스르르 감는 사람, 그가 참말 빙수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중략) 얼음은 갈아서 꼭꼭 뭉쳐도 안 된다. 얼음발이 굵어서 싸래기를 혀에 대는 것 같아서는 더구나 못쓴다. 겨울에 함박같이 쏟아지는 눈발을 혓바닥 위에 받는 것같이 고와야 한다. 길거리에서 파는 솜사탕 같아야 한다.’ -<없는 이의 행복>(오늘의 책)

아동문학의 개척자인 소파 방정환은 빙수 마니아였다. 그는 빙수에 관해서라면 <수요미식회>의 황교익처럼 단호한 어조를 취한다. 경성 안에서 조선 사람의 빙수 집치고 제일 얼음을 잘 갈아주는 집으로 종로에 있는 조그만 빙수 가게 ‘환대 상점’을 꼽기도 한다. 얼음이 혓바닥에 닿는 눈발처럼 고와야 참된 빙수라는 그의 지론에서, 오늘날 ‘눈꽃 빙수’의 효시를 본다. 이 글은 1929년 여름 <별건곤>이라는 잡지에 실렸다. 재밌는 건 이 잡지사에서 전해 여름에도 방정환에게 빙수에 관한 글을 청탁했다는 것. 그만한 빙수 전문 필자가 없었기 때문일까?

 

시큼하고 퀴퀴한 무엇
백석의 시 · 북관

‘명태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 나는 가느슥히 여진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 까마득히 신라 백성의 향수도 맛본다.’ -<정본 백석 시집>(문학동네)

백석의 시에서는 음식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여행을 통해 만난 낯선 이들과 그들이 먹는 음식도 자주 소재가 되는데, 이 시는 <함주시초>라는 기행시편에 담겨 있다. 백석이 알려준 레시피대로라면 시에 소개된 것은 깍두기 내지 섞박지 같다. 시 제목인 북관은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일대를 일컫는 지역으로, 백석은 이 음식과 북관을 동일시한다. 명태 창난젓과 고춧가루와 무를 비벼 익힌 이것을 껴안고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 냄새에서 함경도에 많이 남하해 살았던 여진족까지 떠올린다. 맛과 냄새란 시각보다 더 원초적이어서 어떤 시절을 연상하고 기억하게 만드는 가장 강렬한 매개체다.

 

애저찜
채만식의 수필 · 애저찜

겨우 젖이 떨어졌을까 말까 한 도야지 새끼를 속만 그러내고 통으로 푹신 고아 육개장 하듯이 괴어서 국물을 먹는데,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입을 대기는 비로소 처음이고, 처음이라 그런지 좀 어색했다. 하기야 연계찜을 먹는 일을 생각하면 도야지 새끼를 통으로 삶아 먹는다고 별반 애색할 것은 없는 노릇이다. 또 우리가 일상 흔연히 감식을 하는 계란이며 어란이며 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천하 잔인스런 짓이요, 하필 애저찜만이 아닐 것이다. (중략) 맛은 그러나 일종 별미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고, 그중에도 술안주로는 썩 되었고, 다만 너무 기름진 게 나 같은 체질에는 맞지 않을 성불렀다.’ -<100년 전 우리가 먹은 음식>(가갸날)

전라북도의 10미 중 하나로 꼽히는 별미, 어미 젖만 먹고 자란 새끼 돼지를 푹 고아낸 보양식. 돼지는 워낙 새끼를 많이 낳는 동물이라 죽은 채 태어나거나 젖을 먹다 깔려 죽는 새끼 돼지가 있었다. 애초 애저찜은 가난한 농가에서 이 아까운 새끼를 그냥 버리지 못해 탄생한 요리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 시대 후기부터 ‘핫한 음식’으로 떠오르면서 잔인한 방식이 번져나갔다고 한다. 이 글은 채만식이 1940년 <박문>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수필이다. 그는 광주에 갔다가 우연히 애저찜을 대접받는데, 하필 그날 아침 여관집 마당에서 종종거리던 새끼 돼지 두 마리가 계속 눈에 밟혀 제대로 먹지를 못 한다. 영계로 만든 연계찜과 기타 등등을 떠올리며 이보다 잔인한 요리가 많다고 자기 합리화를 해보지만, 또 간밤에 본 애기 기생이 생각난다. 그 어린 기생이 새끼 돼지처럼 시달리며 사는 것 아닐까 싶어 채만식은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신선로
김상용의 수필 · 명월관 식 교자

신선로-누끼
‘내 봄은 명월관 교자 먹기일세. 가령 날이 저물고, 아침밥 기억은 오래된 역사의 한 페이지요, 호주머니 열일곱이 독촉장, 광고지, 먼지 부스러기의 피난처밖에 못 되고, 돈냥 있는 아는 놈은 일부러 피해 갈 때 마침 명월관 앞을 지나면, 이때 마비돼가는 뇌신경이 현기에 가까운 상상의 반역을 진압할 수가 있겠는가? 없을걸세. 두어 고팽이 ‘복도’를 지나 으슥한 뒷방으로 들어서거든, 썩 들어서자 첫눈에 뜨인 것이 신선로. 신선로에선 김이 무엿무엿 나는데, 신선로를 둘러 접시, 쟁반, 탕기 등 크고 작은 그릇들이 각기 진미를 받들고 옹위해 선 것이 아니라, 앉았단 말일세. 이것은 소위 교자라. 에헴, ‘안석’을 등지고 ‘베개’를 외고, 무엇을 먹을고 우선 총검열을 하겄다. (후략)’ -<100년 전 우리가 먹은 음식>(가갸날)

1935년 시인 김상용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이 글의 소재는 신선로이지만, 그 맛에 대한 언급은 없다. 김상용은 조선요리옥 명월관에 가서 신선로를 먹겠다고 다짐하거나 상상할 뿐이다. 가난한 문인에게 봄은 그의 표현대로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죽지도 않고 또 오고, 호기와 상상력 역시 봄과 함께 다시 온다. 20세기 초반부터 꽤 오랜 시간 동안 신선로는 한국의 진미로 통했다. 특히 화로와 냄비를 합체해 만든 그릇에 흥미를 느끼는 외국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 비슷한 일본의 요리인 ‘스키야키’가 신선로에 담겨 신선로 행세를 한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설렁탕
채만식의 소설 · 금의 정열

설렁탕-누끼

‘상문은 우량과 혀밑을 곁들인 30전짜리 맛보기에다가 고춧가루를 한 숟갈 듬뿍, 파 양념은 두 숟갈, 소금을 반 숟갈, 후추까지 골고루 쳐가지고는 휘휘 저어서, 우선 국물을 걸찍하니 후루루후루루… (중략) 손님은 상하 없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심지어 하룻밤 20원의 실료를 무는 호텔 손님까지도 새벽같이 자동차를 몰고 찾아오니 이대도록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다면야 설렁탕이 잘못하다가는 국보로 지정될 위험이 다분히 없지 않다.’ -<채만식전집 3>(창작과비평사)

일제 강점기 소설들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음식 중 하나가 설렁탕이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무력한 지식인도,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가난한 김첨지의 아픈 아내도 설렁탕을 찾는다. 조선에 온 일본 지식인 중엔 이 ‘쇠머리 스프’가 세계의 어느 것과도 비견할 수 없는 한국 특유의 수출품이 될 거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금의 정열>은 <레디메이드 인생> <태평천하>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채만식의 단편 소설이다. 주인공은 금광으로 돈을 번 신흥 부르주아인데, 술을 많이 먹은 다음 날 해장을 하러 설렁탕집에 간다. 그러나 채만식은 설렁탕의 유행을 썩 반기지 않았던 것 같다. 맛은 천하일품이지만 위생 상태가 불결하다는 표현도 소설에 나온다.

 

메밀묵
박목월의 시 · 적막한 식욕

‘모밀묵이 먹고 싶다. / 그 싱겁고 구수하고 /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 새사돈을 대접하는 것. / 그것은 저문 봄날 해 질 무렵에 / 허전한 마음이 / 마음을 달래는 /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중략)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 손과 주인이 겸상을 하고 / 산나물을 / 곁들여 놓고 /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 먹는 음식. /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 그렇게 이웃끼리 / 이 세상을 건느고 저승을 갈 때, / 보이소 아는 양반 앙인기요 / 보이소 웃마을 이생원 앙인기요 /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 절로 젓가락이 가는 / 쓸쓸한 음식.’ -<박목월 시전집>(민음사)

박목월은 청빈낙도의 태도를 지녔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잔칫날처럼 모두가 신날 때, 허전하고 쓸쓸할 때, 심지어 우리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순간처럼 인생의 굽이마다 어울리는 음식으로 그는 메밀묵을 꼽는다. 못났지만, 그것엔 새사돈에게 내놔도 좋은 품격이 있다. 묵은 우리 고유의 식품으로 한때 서민 음식으로 통했다. 1980년대까지는 서울에서도 겨울철 밤에 찹쌀떡과 메밀묵을 판다고 외치는 행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인은 메밀묵에서 그가 지향하는 인간의 품성을 본 게 아닐까? 짜고 화려하기보다는 싱겁고 소박하며 점잖은 사람 말이다.

 

평양냉면
김남천의 수필 · 냉면

평냉-누끼
‘어린 시절 우리가 냉면을 국수라고 하여 비로소 입에 대게 된 것을 기억하는 평안도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밥보다도 아니, 쌀로 만든 음식보다도 일찍 나는 이 국수 맛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중략) 속이 클클한 때라든지,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화풀이로 담배를 피운다든지, 술을 마신다든지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럴 때 국수를 먹는 사람의 심리는 평안도 태생이 아니고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도박에 져서 실패한 김에 국수 한 양푼을 먹었다는 말이 우리 시골에 있다. 이렇게 될 때 이 국수는 확실히 술 대신이다.’ -<모단 에쎄이>(책읽는 섬)

냉면이 관북 지방에서 평양을 거쳐 서울(경성)에까지 진출하면서, 1920~30년대 거리에는 근대화의 바람과 냉면 바람이 동시에 불었다. 자전거를 타고 냉면을 가정집으로 나르는 배달부도 등장했다. 사회주의 문학단체 ‘카프’의 일원이었던 김남천은 평안도 태생으로 광복 후 월북한 소설가다. 1938년 <조선일보>에 실린 이 수필의 말미에서 그는 시골 외에는 순수한 메밀로 만드는 평양냉면이 극히 희소하고, 서울의 많은 평양냉면은 유사품이라고 일갈한다. 반면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은 ‘평양에 머문 지 4년이 되었으나 기억에 남는 음식이 없다’ ‘평양냉면은 서울냉면만큼 색깔이 희지 못하다’라고 했다. 두 문인은 2018년에도 평양냉면의 맛을 둘러싼 갑론을박과 메밀 성분을 따지는 논의가 끝나지 않을 것을 짐작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