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세포를 깨울 연애소설 3편

이채민

연애가 시작될 즈음, 그 설레는 감정을 느껴본 지가 언제인가? 사라져가는 당신의 연애 세포에 심폐소생술을 가할 때다. 세 작가가 서로 다른 기운의 연애 감정을 품은 짧은 소설을 <더블유>에 보내왔다. 새로운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이나 헤어진 연인을 여전히 못 잊는 사람에 관하여.

Pink Tulip Closeup
Y 그리고 11시 28분

일요일 밤 10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여러 사람이 떠오른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 비율은 나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다음으로 이상한 사람이 차지하며, 마지막이 좋은 사람이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너무 많다며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사람과 자신이 가진 권력과 돈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사람. 어쨌든 좋은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좋은 사람 중 한 사람, Y는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내 방 천장은 이내 Y의 잔상으로 물결친다.

Y는 다른 누군가로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누구도 Y처럼 나를 흔들지 못하고, 누구도 Y처럼 나를 기다리게 하지 못한다. 오직 Y만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잠들기 전, 애인과 마지막으로 통화하며 어떤 달콤한 말을 주고받을까? 목과 어깨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키스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섹스는? 지금 이 시각,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을까?

숱한 상상 끝에 나는 결론을 내린다.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긴 숙취 끝에 오는 헛헛함 같은 것이 가슴속에 자리 잡은 이유는 하나라고. 누군가를 끊임없이 상상하고 떠올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시작이라면 그 끝은 그 누군가와 연애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러니까 나는, Y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Y와 연애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도 지금 당장! 사랑을 감출 순 있다. 그러나 떨쳐낼 순 없다.

좋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로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은 꼰대가 아닌 회사 사장만큼 희귀하다. 과거, 나쁜 사람과 이상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 적이 있다. 연애도 했다. 끝은 나쁜 이별과 이상한 이별이었다. Y를 놓쳐서는 안 된다. 주저하고 머뭇거리다 지구를 부유하는 생명체 중 가장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도록 나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나를 구원해야 한다. 거절의 위험? 거절의 공포?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말했다. “삶의 구원은 위험함에서 싹튼다”라고. 게다가 솔로인 Y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같은 침대를 쓰고 있는 상상이 더 위험하고 더 공포스럽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현듯 용기가 샘솟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간다. 주방에서 차가운 물을 컵에 따라 단번에 들이켠다. 그리고 지금부터 1시간 후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때, Y는 나와 사랑에 빠져 있다. Y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연인이다. 부정할 수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옷방으로 달려 들어간다.

늦은 밤,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사랑한다고, 당신과 연애하고 싶다고 웅얼거리는 궁상맞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신중하게 표정을 선택해야 한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진지하지만 유쾌함이 엿보이게. 옷도 세심하게 골라야 한다. 너무 튀어서는 안 된다. 너무 무난해서도 안 된다. 패션 잡지 화보에 반만 설득당한 사람처럼 입어야 한다. 옷을 입고 집을 나서기 전, 현관 전신 거울을 마지막으로 들여다본다. 평소 이따위 얼굴과 몸을 물려준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느 누구의 마음이라도 흔들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차에 시동을 걸고 Y의 집으로 향한다. 차창에 가는 빗방울이 부딪히며 흘러내린다. 가슴 떨린 고백을 하기에 적합한 날씨다. 그러나 머리카락과 얼굴이 비에 젖어서는 안 된다. 역효과가 날 것이다. 눈빛만 젖어야 한다. 생각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시나리오를 그려본다. Y의 반응에 따라 치고 빠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 사랑해요.
– 그래서요?
– 기회를 주세요.

이 정도는 괜찮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기회마저 주지 않는 것은 양심의 가책으로 작용할 테니까. 최악은 이것이다.

– 사랑해요. (아니면 연애할래요?)
– 미쳤어요?
– 아….

언젠가부터 낭만적 사랑은 멸시와 수모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미신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쓰는 것 역시 한심하고 시대에 뒤처진 행동이 되어버렸다. 사실, 낭만적 사랑은 귀찮은 일투성이다.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 열정적이어야 하니까. 나를 보란 듯이 불태워버려야 하니까.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기보다는 ‘누군가’와 ‘무언가’를 열렬히 증오하며 그것들을 내 삶의 시야에서 치워버리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이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무능하고 이기적인 직장 상사 H를 엿 먹이고, 거지 같은 지금의 회사를 떠나 더 나은 회사로 이직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과거,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에게 물었다. 사랑과 증오 중에 잘못 사용할 경우 더 많은 해악을 끼치는 것은 무엇이냐고. 데카르트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하다. 현재 내 삶이 아름답지 못한 이유는 넘쳐나는 증오 때문이지 주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은 아니라는 것. 나와 그리고 Y에게 부족한 것은 사랑이지 증오가 아니다. 게다가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이렇게 선언하지 않았나? 난 사랑에 미쳤어! Y가 미쳤냐고 물어보면 나는 나도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괴로운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그런 것 같아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오늘은 그냥 돌아갈게요. 그렇지만 기회를 줘요. 그거면 충분해요.

‘기회를 주세요’는 마법의 문장이다. 스스로 흡족해하는 사이 Y의 집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거실 불이 켜져 있다. 커튼 너머로는 Y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휴대폰으로 마음을 진정시킬 만한 음악을 골라 튼다. Los Indios Tabajaras의 ‘Always in my heart’. 영화 <아비정전>의 엔딩곡이다. 아비(장국영)는 수리진(장만옥)에게 시계를 보여주며 이렇게 고백한다. 지금 자신과 보낸 1분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될 거라고. 헤어진 후에도 수리진은 그 1분을 잊지 못한다. 현재 시각은 11시 22분. 나는 11시 23분에 문자를 보낸다. 집 앞에 있다고. 할 말이 있으니 잠깐 나와 줄 수 있느냐고. 5분 후, Y에게서 답장이 온다. 나는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11시 28분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울지도 않았는데 사랑해 준다고요?

어떤 남자가 나를 따라 내렸다. 나는 지하철에서 시집을 읽고 있었다. 거울을 닦듯 읽고 또 읽었다. 닦을수록 그 시에서 내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럴수록 울고 싶었다. 헤어진 애인, 얀의 얼굴이 시에서 어른거렸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으면 울지 못한다. 왠지 눈물의 진정성이 떨어진다. 곁에 타인이 있으면 고개의 각도를 생각하거나 눈물이 양 볼로 흐를 수 있게 조절하는 것이다. 나는 어느새 몸에서 떨어져 나가 유령처럼 위에서 나를 구경하고 있다. 자의식 때문에 눈물이 멈춰버린다.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야 예뻐 보이는데 그게 안 된다. 일전에, 내 친구 윤은 떠난 애인을 잡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던 중 친한 형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형은 딱 한 마디 했더랬다. “그냥, 가서 무조건 울어. 여기서 중요한 건 한 마디도 안 하고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우는 거야. 눈도 안 마주치고.” 어쨌든, 떠난 애인 잡는 데나 소용되는 게 눈물인데 나는 성격상 그게 안 된다. 그러니까 눈물을 제대로 써먹어본 적이 없는 셈이다. 나는 울 때가 제일 예쁜데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 우는 모습은 아껴두었다가 필살기로 써야겠다고 노상 생각은 하지만 모든 애인은 내가 우는 걸 구경도 못 해보고 떠났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거의 우는 얼굴이었다. 우는 얼굴에 가까운 얼굴에 호기심이 생긴 어떤 남자가 나를 따라왔다. 시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가 물었다. 웃을 때 눈과 광대 사이에 인디언 주름이 잡히는 남자였다. 웃는 게 귀여웠다. 나보다 어려 보였다. 지하철에서 시 읽는 분 처음 봤어요, 하하. 저도 어렸을 때 시 좀 끄적거렸는데. 남자는 말했다. 허허, 정말요? 따라 물었더니 네, 김소월을 알아요, 라고 말하길래, 아, 이 사람은 현대시는 읽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시를 쓰는 내 입장에서,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은 안전하게 느껴졌다. 시를 쓰는 사람은 옛 애인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 남자는 인디언 주름이 예쁘고 다행히 시는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와 연애를 하기로 했다. 이름의 마지막 자가 ‘고’이므로 고라고 이름하겠다.

*

고와 만난 지 어느덧 한 달이 되었다. 고를 만나러 가는 길에 지하철 환승로에서 구두를 한 켤레 샀다. 모든 구두를 9천원에 팔았다. 그 구두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태풍에 날아간 집에 깔려 죽은 마녀가 신고 있던 구두와 흡사했다. 구두를 신은 마녀의 다리만 밖으로 노출된. 구두 매장에는 240, 235, 230, 225 사이즈별로 매대가 있었고, 매대마다 구두가 놓여 있었다. 겉으로 보면 신발 사이즈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235 오즈의 마법사 구두를 신어본 뒤, 230 오즈의 마법사 구두를 신어보고, 225 오즈의 마법사 구두를 신어봤다. 점점 내가 세계에 알맞은 크기가 되는 것 같았다. 세상에 적응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나의 일과는 6시가 되면 회사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퇴근하는 고와 맛있는 것을 먹고 귀가하는 것이다.

고의 집 앞에는 배불뚝이 나무가 있다. 배불뚝이 나무는 얀의 집 앞에도 있었다. 얀과 나는 그 나무를 좋아했다. 우리가 걸을 때, 행로를 방해했고 그래서 느리게 걸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이 우둘투둘하고 흉악하게 생겼는데도 왠지 귀여웠다. 배를 내놓음으로써 관심을 구한다는 게 말이다. 그런 나무에게는 아주 커다란 슬픔 같은 게 없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고는 출근하느라 새벽에 나갔다. 어제는 비가 왔는데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고가 잠결에 뽀뽀를 하고 나갔다(이 대목에서 내 얘기를 듣던 친구 윤은 “그러니까, 잠결에 뭘 받으면 못써”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나는 고가 없는 방을 둘러보았다.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사롭다. 음악을 틀었다. 습관이 된 탓에 볼륨을 작게 조절했다. 그러다 이곳은 고시원이 아니라는 생각에 볼륨을 한껏 키웠다. 좋구나. 그냥 여기서 살까. 나는 훔칠 만한 것이 없나, 하고 집을 둘러보았다.

고는 재무팀에서 일하기 때문에 돈을 건드렸다가 큰코다칠 수도 있으니까 현금은 두고 핸드크림과 펜 몇 자루를 챙겼다. 고가 먹으라고 씻어놓은 딸기를 먹고 해놓은 꽁치김치찌개도 먹었다. 그리고 자주색 양말 한 짝을 훔쳤다. 나중에 애도할 때 제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냉장고 위에, 무슨 병 때문에 먹는지는 모르겠는, 서울 신보건 약국 봉지에 담긴 약 몇 봉지도 챙겼다. 나중에 잠이 오지 않을 때 수면제 대용으로 쓰면 좋을 것이다.

책상에는 반쯤 쓰다 만 인어공주 스프링 노트가 있었다. 나는 디즈니 공주 중 인어 공주를 제일 좋아한다. 디즈니 공주들은 다 구함을 당하는데, 인어공주만 구함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했고.

그리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골초인 고는 베란다에서 줄담배를 태운다. 베란다 문 옆에 허리 높이의 책장이 있는데 그 위에 분홍색 상자가 눈에 띄었다. 열어 보니 하트 모양의 커다란 쿠키 위에 UG♥JW라고 쓰여 있더라. 내 이름 이니셜이 JW이다. 아니 벌써 이런 걸 다…. 편지를 읽어보니 고에겐 애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애인과 내 이름이 같았다. 쿠키는 고의 애인이 직접 구운 쿠키였다. 이름을 부를 때 헷갈리지 않아서 좋을 거라 생각하니 내 이름이 문득 자랑스러웠다. 그 쿠키 아래에는 수제 빼빼로가 수북했다. 손가락보다 약간 긴 빼빼로들이 쌍으로 분홍 봉지 안에 담겨 예쁘게 포장되어 있다. 아몬드와 빨강 노랑 가루로 장식되어 있다. 아주 예쁘다. 그래서 고의 애인이 구워준 쿠키랑 빼빼로 몇 개 훔쳐서 가방에 넣었다. 윤에게 줄 쿠키도 챙겼다.

근데, 저런 분홍 박스처럼은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뻔질나게 베란다를 드나드는 사이 쿠키 박스가 그 앞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만큼 너무 익숙해진 무엇. 어느 순간부터 고의 눈에 저 박스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한자리에 있어서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물건들이 있다. 다른 애인을 집에 들일 때 숨기는 것조차 까먹게 된 그런 선물. 그런 핸드메이드 분홍 박스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고는 그 애인과 헤어지는 절차를 밟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무관한 일로 여겨졌다. 나는 다시 짐을 쌌다.

매번 새로운 애인을 사귈 때마다 한 고아원에서 다른 고아원으로 입양되는 기분으로 짐을 싼다. 그림자를 삭히다가 잠시 그림자가 되었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 간밤에 벗어놓은 제정신들을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어제 비가 와서 우산을 들고 집에서 나왔는데 햇빛이 쏟아졌다. 어제 비가 내렸지. 집 앞엔 배불뚝이 나무가 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나는 나무에 기댔다. 얀에게 돌아가자고 나무와 함께 생각했다.


안경 낀 남자

소미는 지금까지의 인생에 걸쳐, 남자에 관한 한 취향은 뚜렷했다. 그녀는 ‘안경 낀 남자’를 한 치의 유보도 없이 편애했다. 처음 사랑한 안경 낀 남자는 아빠였다. 힘이 넘치는 아기였던 소미는 곧잘 아빠의 금테 안경을 잡아빼 자기 얼굴에 걸쳐보는 장난을 쳤고, 그럴 때마다 빙글빙글 어지러워 휘청거리면 아빠가 숨막힐 정도로 안아주던 그 온기를 기억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선생님 몰래 소미를 괴롭히던 덩치 큰 남자아이를 물리쳐준 것도, 평소에는 소심하고 말수 없던, 반에서 유일하게 안경을 쓴 짝꿍 남자아이였다. 비록 소미가 고작 열 살 때 아빠는 집을 나가고, 짝꿍 남자아이는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가버렸지만, 소미의 무의식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이제 소미는 남자가 안경을 쓰지 않으면 매력이나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대충 이 나라 남자의 절반쯤은 다 좋다는 거잖아.”

친구 희주는 어이없어 했지만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남자’가 이상형이라는 그녀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경 없이는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따라서 특정 물건에 의존해야 하는 취약함에 소미는 마음이 움직였다. 뿔테, 은테, 금테-자신에게 어울리는 안경을 고를 줄 아는 남자도 좋았지만 안경을 아름다운 동작으로 다루는 모습에도 끌렸다. 무언가에 집중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며 안경을 추켜올릴 때, 안경다리 끝을 입에 넣은 채 생각에 잠길 때, 눈을 끔벅거리며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뽀드득 닦을 때, 그리고 사랑을 나누기 전 마지막으로 침대맡 협탁 위에 안경을 벗어둘 때, 소미는 그 남자를 조금씩 더 사랑했다. 기어코 속속들이 살펴봐야겠다며 행위 도중에 팔을 협탁 위로 뻗어 다시 안경을 끼는 그 엉큼함조차. 어느덧 시간이 흘러 가슴 시린 이별을 겪는다 해도 소미는 그들과 만나고 사랑한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대신 충분한 애도를 거친 그 사랑들은 그리움으로 가슴에 남았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지만,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언제나 다시 또 사랑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렇게.

*

얼굴을 스치는 공기의 농도가 서서히 짙어지던 어느 봄날 밤, 소미는 희주를 동네 서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좋아하는 시인이 낭독회를 열어. 너네 집 근처니까 퇴근하고 와.”

소미는 사실 시에 관심이 없었지만 희주가 보고 싶어서 갔다. 서점 2층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데 막상 낭독회 시작 5분 전에 희주가 못 온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허탈해진 소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 했지만 하필 그때 사회자가 낭독회의 시작을 알렸고 소미는 꼼짝없이 도로 착석해야만 했다. 그나마 구석 맨 뒷자리에 앉아 슬며시 빠져나갈 기회를 노릴 뿐.

그 남자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각선, 그러니까 우측 맨 앞자리에 카페오레 색상에, 부드러운 곡선의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디자인은 최소한의 구조로 압축되어 있었고, 코받침 없이 가볍게 콧등에 얹히는 브리지는 간결했다. 안경테는 자연 갈색 머리칼에 헝클어진 반곱슬머리와도 잘 어울렸다. 연회색 스웨트셔츠와 카키색 코듀로이 팬츠에 흰색 테니스화 차림이었다. 그 남자는 허리를 바르게 세운 채, 단정하고 성의 있는 자세로 여성 시인의 낭독과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간혹 무릎 위에 펼쳐놓은 검정 노트에 팬으로 무언가를 끼적이곤 했다. 그 모습은 소미에게 아스라한 기쁨을 선물했다. 질의응답 시간으로 넘어가 객석 모두가 어색하게 침묵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소미가 먼저 번쩍 손을 든 것도 심장이 시킨 일이었다. 형언하기 힘든 감정은 묘한 방향으로 소미에게 용기를 주었다. 즉흥적으로 꾸며낸 질문이건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미의 허접한 질문에 시인은 근사한 답변을 돌려주어 객석의 탄성을 자아냈다. 분위기에 고무된 사회자는 다음 질문을 받겠다고 나섰으나 객석은 다시금 침묵하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질문… 질문 없으신가요?”

서로 눈치 보며 숨죽이는 몇 분간이 영원처럼 느껴질 무렵, 우측 앞쪽 방향에서 한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두 분 잠시만요.”

낭독회가 끝나고 시집에 사인을 받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출판사 관계자가 그 ‘안경 낀 남자’와 소미를 붙잡았다.

“아까 질문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질문자들을 위해 몰래 준비한 출판사의 책 선물 덕분에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함께 마지막으로 그곳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

빌라 담벼락을 타고 오른 붉은 들장미가 오월의 어두운 밤길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피었지.’

평소 얼마나 마음이 분주했으면 집 앞에 장미 피는 것도 제대로 못 봤을까. 소미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장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향긋한 장미 향을 한껏 들이마시며 여전히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애썼다. 아까 갈림길에서 헤어지기 전까지 그 남자와 함께 걸었던 20분간의 기억에.

“많이 무거우실 텐데 저 주세요.”

그 남자는 소미의 책들을 대신 들어주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집 방향도 묻지 않고 무작정 걸었다.

“근처에 작업실이 있는데, 저녁에 산책 나오는 김에 자주 그 서점에 들려요. 평소처럼 책을 보고 있는데 2층에서 소리가 들려 호기심에 올라가봤다가 얼떨결에 잡혔지 뭐예요. 심지어 앞쪽 자리 비었다고 거기 가서 앉으라고….”

소미는 그의 안경 낀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선한 두 눈이 안경 너머로 반짝였다. “성격상 빈자리 보면 괜히 내 일처럼 신경 쓰이고, 분위기가 썰렁해지면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아, 하지만 아까는 가장 먼저 용기 내서 질문하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저도 용기 내서 따라 해본 거구요.”

그가 고개를 돌려 소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소미도 자신이 그날 밤 그곳에 온 경위를 털어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공통점은 둘만이 아는 비밀이 되었다. 20분이라는 시간은 소미에게 길거나 짧기도 했고, 부족하거나 충분하게 여겨졌다. 어쨌거나 모든 게 다 끝난 지금으로서는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아.

그가 까맣게 잊고 소미의 책 선물을 그대로 들고 가버렸다는 것을 소미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름을 기억한다면 출판사의 신청자 명단에서 연락처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이젠 더 이상 철없는 아이처럼 섣부른 기대는 하지 않아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어른처럼 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하지만 들장미 덩굴의 황홀한 향기에서 빠져나와 두 눈을 떠보니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쉼 없이 뛰어 왔는지 호흡이 가빠 말을 못했고 땀으로 안경이 자꾸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내일 연락처 알아봐서 전달해드릴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출판사가 친구분 연락처만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서… 하아하아… 또 이것 때문에 다시 뵙자고 하면 부담스러워하실지도 몰라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무작정 뛰어왔어요…하아하아… 찾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들장미 향기가 소미를 붙잡아두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희주는 ‘김희주 외 1인’으로 신청했다고 일러주었으니까. 소미는 문득 울고만 싶어졌다.

“그런데 막상 오고 나니 후회되네요.”

남자는 숨을 고르더니 들장미 덩굴 앞에 선 일렁이는 눈망울의 소미를 바라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가 소미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오자 가로등에 비친 둘의 그림자가 하나로 포개졌다.

“이걸 드리고 나면 두 번 다시 뵐 기회가 없어지잖아요.”
원망하듯 말하는 그의 어투에 소미의 뺨은 붉은 들장미처럼, 철없는 아이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다시 말하지만, 안경 낀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Y 그리고 11시 28분_김기창(소설가), 울지도 않았는데 사랑해 준다고요?_문보영(시인), 안경 낀 남자_임경선(작가)
사진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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