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고 진지하게, 최다니엘

이채민

열정 하나로 내달리기만 했던 20대를 지나, 최다니엘은 이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연기를 고민하고 욕심내고 있다.

검은색 셔츠는 메종 마르지엘라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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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Korea 면도를 하지 않고 나타나서 언제 하려나 싶었는데 그대로 촬영에 들어가더라. 누구도 특별히 요구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평소 이렇게 화보를 찍고 싶었던 건가?
최다니엘 미리 받은 시안 속 배우들이 모두 수염을 안 깎은 상태기에 그대로 왔을 뿐이다(웃음). 혹시 몰라 면도기는 챙겨 왔고. 이런 상태로 화보를 찍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어릴 땐 사진 찍히는 게 정말 싫었다. 아버지가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셨는데, 매번 군대에서나 취할 법한 자세를 시키는 거다. 그때 사진 보면 죄다 울상이다. 오늘은 현장 자체가 즐거웠다. 보시는 분들에게도 그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자취 생활 10년 차라고 들었다. 혼자 시간을 보낼 때의 모습이 궁금하다.
강동구 지박령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전학을 자주 안 시키려고 애쓰셨다. 지금은 여기가 내 고향이려니, 집이려니 하고 산다. 이번 집은 사실 아버지와 같이 살려고 마련했지만 얘기 끝에 혼사 살게 됐다. 몇 년 전부터는 외로움도 별로 안 느끼고, 마냥 집이 편하다. 요리 예능을 보면서 곧잘 음식도 따라 해 먹게 됐고. 여름엔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서 자주 끄고 켜고, 겨울엔 침대에만 전기장판 깔고 산다. 대체로 집 안 공기가 서늘한 걸 선호한다. 쇼핑백, 비닐봉지는 언젠가 쓸 거 같아서 모아 두는 편인데, 어느 날 ‘더는 안 되겠다, 치우자!’ 하고 싹 버리는 패턴을 반복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편인가? 일단 두고두고 고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버리는?
사람한테는 애당초 기대를 안 하는 편이다. 나 편한 대로 기대고 나 혼자 오해하는 일이 반복되면서부터였다. 만나면 신나게 놀고, 연락 없으면 바쁘겠거니 하고. 배우 오정세 형과 친한데 1년씩 연락 없이 지내기도 한다. 작품 하나 들어가면 몇 개월 동안 정신없이 사는데, 그걸 서로 너무 잘 아니까.

배색 셔츠는 J.W. 앤더슨 by 무이, 검은색 통넓은 팬츠는 디올 옴므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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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을 가리지 않는 편인가? 촬영장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밝은 표정에 목소리도 크고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
아니다. 낯은 많이 가리는데 매사 웃고 있으니 자주 오해를 받는다. 그냥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거지, 낯을 가리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지금 기분이 좋다면 그걸 표현하는 것. 아버지가 딱 그렇다. 평소 위트 넘치고 순박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신다. 그의 아들이니까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로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얘기인데, 스트레스도 잘 안 받는 편인가?
화가 나면 화를 내고, 할 얘기는 한다. 끌어안고 있는 성격은 아니다. 타인과의 갈등은 아주 빠르게 푸는 편이지만 나만의 내적 갈등에는 취약하다. 어릴 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내 성격이 어떻다 한들 어쨌든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직업이고 나이니까. 그래도 아직 서툰 부분이 많다. 그걸 아니까 더 노력 중이다. 얼마 전에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더라. 태어나 처음으로 제주도에 갔다니까 아무도 안 믿더라. 놀라고, 놀리고. 배우 김기남 형이 같이 갔는데 전날 둘 다 무리해서 떠난 터라 도착하자마자 잠부터 잤다. 제주도는 서울 같지 않다는 걸 몰랐지. 밤 10시에 배가 고픈데 편의점조차 문을 닫은 거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결국 PC방 가서 게임하고, 라면이랑 과자 먹다가 들어왔다. 돌아오는 날 성산일출봉이 숙소에서 5km 거리에 있다는 걸 이정표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래도 전복죽과 흑돼지는 맛봤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원래 여행 준비를 꼼꼼히 하는 스타일은 아닌가 보다.
해외 여행도 크게 흥미가 없다. 일단 탑승 수속하는 일련의 과정이 싫고. 여행지 가서도 그렇다. 하루 정도면 감흥이 사라지고 집에 가고 싶어진다. 그나마 좋아하는 여행이라면 진짜 그 도시 사람들처럼 살아보는 것. 한번은 미국의 친한 형 집에 머문 적이 있다. 유명 관광지도 모두 돌았지만 가장 재밌는 건 카펫 깔린 집 거실에 둘러앉아 카드 게임하고 감자와 양파 튀겨 먹는 일이었다.

검은색 테일러드 재킷과 블라우스, 팬츠는 모두 우영미, 슈즈는 크리스티앙 루부탱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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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KBS 드라마 <저글러스>를 마쳤다. 대기업 계열사 중 하나인 광고 회사에 내부 비리 척결의 칼을 품고 입사한 상무 남치원 역으로, 얼굴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팩트 폭격을 날리는 냉혈한 캐릭터였다. 이 드라마는 배우 최다니엘에게 무엇을 남겼나?
연기와 촬영 현장에서의 또 다른 재미를 알게 됐다. 예전에는 내 연기만 하면 돼, 또 잘 해내야겠다는 조금은 이기적인 강박 같은 게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하니까 매번 다른 작품, 다른 역할인데도 연기가 지루하기도 했다. <저글러스>를 시작할 때는 내 캐릭터보다 전체 밸런스에 집중해보자 마음먹었다. 드라마에는 주연만 있는 게 아니라 조역도 많고, 또 각자의 역할이 있지 않나. 각 배우와 캐릭터가 이 현장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을 테니 내가 모든 캐릭터를 연기하려 욕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촬영 없을 때도 괜히 놀러 가서 분위기도 느껴보고 같이 모니터링도 하고. 현장이 훨씬 즐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이 전환된 계기가 있었나? 그 드라마 촬영 들어가기 직전에 군 복무를 마쳐서 팀워크의 중요성이 아직 몸과 마음에 배어 있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웃음). 계기가 뭐였건 확실히 나도 덜 지치고 여유가 생기더라. 좋은 에너지를 얻고 끝난 것 같다.

배우 백진희는 극 중 남치원의 비서 좌윤이 역을 맡아 업무 파트너이자 로맨스 파트너로 열연했다. 같은 소속사이기도 하고 원래 안면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연기할 때는 어땠나?
<지붕 뚫고 하이킥> 때의 인연으로 알 게 됐다. 진희는 우직한 면이 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건 끝까지 밀고 가는 집중력도 강하다. 반면 나는 보다시피 정반대다(웃음). 수염 기른 모습으로 찍고 싶어 공들여 길러놓고도 한 신 찍고 나면 이내 지루해한다. 그런데 극중에서는 두 배우의 실제 성격과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했다. 좌윤이는 언제나 안테나를 세우고 민첩하게 태세를 바꾸고, 남치원은 누가 어디서 뭘 하든 개의치 않고. 실제와 연기가 섞여 독특한 케미가 나와서 반응이 좋았던 게 아닐까 싶다.

실제 본인 성격과 정반대였기 때문에 연기하기 어려운 점은 없었나?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말이다.
남치원은 개인적으로 닮고 싶은 부분이 많은 캐릭터였기 때문에 자주 대리 만족했다. 쉽게 타협하지 않는 성격, 그럴 수 있는 용기 같은 것 말이다. 현실의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니까. 쉬고 싶은데 형들이 나오라면 마음 약해져서 나가고, 하기 싫은 일도 필요하면 해야 하고. 나중에 좌윤이를 통해 바뀌기는 하지만 남치원은 자기 주관대로만 하면서도 잘만 산다. 그러면서도 회사 상무직은 유지하고 삼촌은 부사장이다. 이게 말이 되나?(웃음) 그래서 난 <저글러스> 캐릭터 중 가장 판타지스러운 게 내가 맡은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남치원 캐릭터를 보다 현실적으로 만들고자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나?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더 만화 같았다. 안 그래도 남치원 캐릭터 자체가 판타지인데 연기마저 그러면 드라마가 진정성도 없이 가볍게만 보일 것 같았다. 좌윤이는 아무리 발랄한 캐릭터라도 상황 자체가 현실적인 게많았다. ‘회사 생활 다 저렇지’, ‘저러면 나라도 짜증 나지’, ‘눈물 나지’,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웃으면서 부장님이랑 밥 먹게 되지’ 하면서. 하지만 남치원은 일단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뭘 더 할수록 공감을 사기 어렵겠더라. 감독님과 상의 끝에 남치원은 묵직하게, 중심을 잡는 역할로 가게 됐다.

청키한 니트 스웨터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쿠튀르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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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카메라 앞에 선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나?
2002년. 장나라 선배가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차양순을 연기한 직후에 빼빼로 CF를 찍었는데 거기서 ‘남자 2번’이었다. 대중에게 기억되기 시작한 건 SKT 광고와 〈지붕 뚫고 하이킥>을 하면서였던 거같다.

그때와 지금은 연기를 대하는 마음이 다른가?
완전히. 그땐 정말 겁 없이 연기했고, 지금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점점 어려워진다. 내가 볶음밥(그는 인터뷰 직전 볶음밥을 먹었고 빈 그릇이 눈앞에 있었다)을 아주 잘 만드는 중국집 사장이라 치자. 볶음밥은 누구나 좋아하는 무난한 메뉴고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잘 팔린다. 그런데 욕심이 생기는 거지. 아이스크림이나 콜라같이 아주 의외의 재료를 넣으면 더 기막힌 볶음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다만 문제는 내가 중국집 사장님이 아니라는 거다. 볶음밥은 설사 실패해도 사장님만 한 입 먹어보고 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 실험조차 연출자나 대중에게 평가를 받아봐야 하는 직업을 가졌으니까. 호응 없으면 자존심 상할 것 같은데 시도는 해보고 싶고. 요새 이런 고민이 잦아졌다.

더 많은 화보 컷과 자세한 인터뷰는 더블유 4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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