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유산, 맥주

이채민

마르코 파사렐라 세인트 버나두스의 마케팅 디렉터가 보여준 영상에는 연둣빛 홉밭이 끝도 없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들의 맥주처럼 깊고 풍요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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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밤이 있다. 조금은 특별한 술을 느긋하게 앉아 즐기고 싶은. 도수 낮고 배가 쉽게 부른 맥주는 전혀 느긋할 수 없으니 탈락, 무거운 데다 750mL나 되는 와인도 번거롭다 싶을 때면 벨지언 에일을 찾는다. 벨기에에서 생산되고 병입된 상면 발효한 에일을 통칭한 말로, 바디감과 색상은 맥주와 와인의 중간 수준이다. 어쩌면 가격도. ‘특별’하고 ‘느긋’하게 즐겨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아로마와 도수다. 아로마는 벨지언 에일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타협 없는 퀄리티 컨트롤과 숙성 시간이 그 재료가 된다. 고작 반 모금만으로도 건자두, 건포도, 체리, 흑설탕, 초콜릿의 향이 미각과 후각을 지배한다. 도수는 대개 10도가 넘고 와인과 비슷하게 15도까지 올라가는 것도 종종 있다. 그러니까 330mL의 벨지언 에일은, 파인트 사이즈 컵에 담아 서너 모금 안에 빠르게 흘려 넣는 술이 아니다. “벨지언 에일에서 알코올 향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그래서 온전히 숙성된 맥주의 향에 집중할 수 있고 부드럽게 느껴져서 빠르게 마시다가 금세 취기가 오르기도 해요. 그래서 한 병을 마실 때마다 그만큼의 물을 마시라고 권합니다.” 지난 12월, 아시아 순방의 일환으로 서울을 찾은 마르코 파사렐라(Marco Passarella) 는 대표적인 벨지언 에일로 꼽히는 세인트 버나두스(St. Bernadus)의 마케팅 디렉터다. 아시아 시장에서는 15년 전, 한국에는 6년 전부터 거래가 오고 갔지만 서울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세인트 버나두스는 1946년부터 지금까지 베스트블레테렌의 수도사들이 전수해준 전통적인 레시피로 생산됩니다. 1992년 베스트블레테렌과의 라이선스가 끝나기 전까지는 ‘수도원 맥주’라 불리기도 했죠. 이제는 ‘애비 에일(Abbey ale)’이라고 하고요. 베스트블레테렌 레시피의 가치를 알거나 세인트 버나두스의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주 고객입니다.” 벨기에의 3대 음식은 초콜릿, ‘프렌치프라이’의 기원인 감자튀김 프리츠(Frite), 그리고 맥주다. 2017년에는 ‘벨기에 맥주 문화’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지정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모든 음식은 산지에서 멀어질수록 신선함과 맛이 떨어지는 법. 가장 신선하게 세인트 버나두스를 맛볼 수 있는 곳을 물었다. “아무에게나 알려주지는 않습니다만,(웃음) 양조장 안에 B&B가 있어요. 공식 홈페이지도, 예약 사이트도 따로 없고 메일 문의만 가능하죠. 그런데도 꾸준히 손님이 찾아옵니다. 보통 이전에 왔던 손님들의 소개로 알음알음 오는 것이지요. B&B에 머무는 동안은 맥주를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어요.” 살면서 세인트 버나두스를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퀄리티 유지를 위해 어떤 유통사의, 얼마만큼의 주문이 밀려들어와도 일정량 이상은 판매하지 않는다는 그 맥주를 말이다. 70년 넘도록 일체의 광고, 마케팅, 홍보 없이 단 한 방울도 맥주가 남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마르코는 고객들이 좀 더 편하고 쾌적하게 맥주를 즐길 수 있게 또 다른 양조장을 신축 중이고, 그 루프톱에 카페를 만들고 있다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프리랜스 에디터
신정원
포토그래퍼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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