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타이밍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씨 나우 바이 나우’ 체험기.

“완전 패피네!” 런던 패션위크 버버리 쇼가 끝나고,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던 런웨이의 트렌치코트를 샀다는 말에 지인들의 반응은 놀라울 만큼 한결같았다. 얼마에 샀느냐는 궁금증보다는 정말 ‘See Now Buy Now’를 몸소 경험한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패션 캘린더에 대해 그간 쏟아져나온 수많은 기사, 인스타그램을 통한 게릴라 홍보에도 불구하고 정말 사볼 생각을 한 건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지금이 아니면 늦으리’라는 생각에 지갑을 열었고, 그것은 꽤 짜릿한 경험이었다.

3년여 전부터 등장한 ‘런웨이 투 리테일’의 시도에 발을 담근 디자이너는 마이클 코어스, 멀버리, 모스키노, 버버리, 베르수스, 알렉 산더 왕, 타미 힐피거, 타쿤부터 전혀 의외인 톰 포드까지 다양했다(톰 포드는 지난 시즌 단 한 번의 도전 후 손사래를 치며 미련 없이 예전의 전통적인 패션 스케줄 방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든든한 물리적 지원이 가능한 큰 규모의 브랜드일수록 더욱 성대하고 현란한 프레젠테이션 방식과 버즈 마케팅으로 구매와 직결되는 핫이슈를 만들어갔다. 캡슐 컬렉션이나 일부 컬렉션만 새로운 흐름에 합류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보인 디자이너도 있었다. 칼 라거펠트가 새로운 패션 캘린더를 두고 “패션쇼를 선보인 후 ‘재워두는(Marinate)’ 시간이 필요하다”며 새로운 패션 캘린더에 부정적인 의견을 비추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소셜 미디어가 이끄는 변화무쌍한 시대에 패션계의 대응과 변신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됐다. 런웨이에 누가, 무엇을 입고 등장했는지 가장 빨리 알고 싶고, 가장 먼저 입고, 사진을 찍고, 포스팅하고 싶어 하는 패션 피플의 심리를 공략하는 디지털 시대의 트렌드는 뒤처진 사람을 빠르게 지워버린다.

조금 전 모델이 입고 캣워크를 장식한 옷을 클릭/터치 한 번으로 주문하고, 부티크에 가서 입어보고, 곧바로 내 옷장에 걸어놓을 수 있다니…! 득템에 목마른 이들에게는 거부할 수 있는 유혹일 터. 물론 무계획적 소비를 조장하는 ‘슈퍼 스투핏’한 행위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도, 구경하러 재미 삼아 간 매장에서 고가의 트렌치코트 하나를 옷장으로 모셔오고야 말았다. 고백하자면 처음에 입어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매장을 나왔다가, 정확히 10분 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매장을 찾아 쇼핑백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번 밀란 패션위크 스트리트를 ‘마이 리틀 포니’로 동심 넘치게 장식한 모스키노는 매 시즌 재미난 캡슐 컬렉션으로 즉각적인 구매 반응을 이끈다. 제레미 스콧은 휴대폰 케이스, 열쇠고리, 미니 가방, 티셔츠, 니트 등 가장 쉽게 접근 가능한 제품을 골라 컬렉션으로 엮어 판매율을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일종의 밀란 컬렉션 ‘기념품’인 셈이다.

떠들썩한 테마, 예상치 못한 협업 환호를 자아내는 볼거리 가득한 이벤트는 씨 나우 바이 나우가 등장한 이래 더욱 활발해졌다. ‘런웨이의 민주화’를 내세우며 글로벌한 영향력을 소비자에게 집중하고자 한다는 타미 힐피거도 시즌마다 성대한 쇼와 함께 폭발적인 씨 나우 바이 나우 반응을 이끌어오고 있다. 고향 격인 뉴욕을 떠나 LA, 이번엔 런던에서 화려한 유랑을 펼쳤는데, ‘록 서커스’를 테마로 런던 패션위크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게다가 패션계 보증 수표인 지지 하디드와의 컬래버레이션까지 진행했다. 타미 힐피거의 CEO 다니엘 그리거의 말을 들어보자.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아메리칸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의 하나로서, 또 뉴욕 패션위크에서 가장 존재감 있는 패션쇼의 하나로서, 우리는 런웨이를 소비자에게 보다 가까이 가져가는 데 리더십을 발휘할 특별한 위치에 있어요. 우리 쇼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존재감과 관심을 컬렉션이 공개되는 그  순간에 집중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소비자 중심의 브랜드가 되고자 하는 우리의 비전과도 상통하죠. 개발 사이클을 단축하고 소비자, 바이어, 그리고 미디어의 다양한 니즈를 충족시키는 저희만의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행보인 셈입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사업 파트너, 패션 업계 전체와 함께 항상 새로운 방법을 시도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추진할 만한 규모와 영향력, 재력이 따르지 않는 디자이너 브랜드에게는 씨 나우 바이 나우는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인스턴트 패션이 미래의 방식처럼 여겨지지만, 정작 중요한 과정이 이를 힘들게 하고 있다. 업계가 고수하는 기존의 스케줄링은 새로운 유통, 배송 방식의 실질적 변화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라며 포기를 선언한 톰 포드의 염려처럼 말이다. 온라인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스토어에 일찌감치 컬렉션에 올려질 아이템을 미리, 넉넉히 준비해놔야 한다는 건, 축지법 같은 마술이 필요한 일이다. 많은 브랜드들이 크고 작은 SNS 이슈를 만들어내기 위해 협업이나 팝업 이벤트를 끊임없이 진행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에디터로서도 변화하는 패션 캘린더에 적응하는 일이 아직도 어색하다. 예전처럼 컬렉션 기간 후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고, 통찰력 있는 화보 촬영이나 기사를 기획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 가장 떠오르는 이슈,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는 것,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말이다. ‘씨 나우, 슛 나우’라고 하면 맞겠다. 런웨이에서 본 옷을 다음 날 사서 입는 것도 좋았지만, 문득 런웨이 등장과 동시에 감동받아 흐트러지게 그리곤 했던 예전 수첩 속 컬렉션 의상이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