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럭셔리 브랜드는 시대 정신이라는 수맥을 찾아내 브랜드와 함께 가져가야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로에베의 수장 조너선 앤더슨은 인터뷰에서 “럭셔리는 그저 좋은 옷을 파는 것이 아니다. 당대의 문화적 동향을 적극 수반해야 한다. 그 옷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것을 만들기 위해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만드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딱히 로에베뿐만 아니라 수많은 럭셔리 브랜드에서는 브랜드 고유의 헤리티지와 정체성을 다양한 매개를 통해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미디어의 발달은 당대의 문화와 예술 세계에 깊이 연루되지 않은 브랜드 활동이란 것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를 이끌었다.

조너선 앤더슨의 인터뷰 인용으로 말길을 풀었으니, 로에베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로에베 파운데이션은 1988년 로에베 창업 가족의 4대 멤버 엔리케 로에베가 설립한 사설 문화 재단이다. 지금은 그의 딸 셰일라 로에베의 지휘하에 운영되고 있으며, 재단의 핵심 활동 중 하나는 디자인과 장인 정신을 지원하는 것이다. 로에베의 크래프트 프라이즈는 이번에 첫 번째로 선보이는 재단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미적 가치가 뛰어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탁월한 인재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제작자의 개인적 언어와 뚜렷한 기량을 반영하면서 기존의 지식을 재해석, 재창조 하는 작업에 경의를 표한달까, 우리 시대의 문화에 대한 공예의 지속적인 기여를 이끄는 것이 목표다. 우승자에게는 상금과 마이애미 아트 바젤에서의 전시 기회가 주어지는데, 2017년 로에베 파운데이션의 우승자인 도예가 사라 플린은 2017 마이애미 아트 바젤의 로에베 부스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사라 플린은 물레에서 만든 도자기를 손으로 다듬고, 자르고 변형시켜 기하학적인 형태의 도자를 만든다. 이렇게 로에베는 하우스 탄생과 발전의 근간이었던 공예의 문화적 가치를 수호하고 그 진화에 힘쓰며 또 한 명의 탁월한 도예가를 세상에 알렸다.

시대 정신을 담은 예술 문화를 패션과 융합시키는 브랜드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전부터 그것을 독보적으로 실천하고, 가장 다양한 분야에 균형 있게 관심을 기울이는 브랜드는 단연 프라다일 것이다. 프라다는 이미 2001년 뉴욕을 시작으로 에피 센터라는 갤러리 겸 매장을 오픈한 바 있다. 쇼핑 공간인 동시에 브랜드의 철학을 보여주는 전시실로 활용하는데, 에피 센터를 설계한 렘 콜하스는 “에피 센터는 프라다가 무엇이고, 무엇을 하며,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모든 개념을 거스르고 불안정하게 만들어 브랜드를 새롭게 하는 도구가 된다”라고 말했다. 프라다의 문화 예술 활동의 중심에 있는 그녀, 미우치아 프라다는 일찌감치 브랜드의 문화 정신 확립에 공을 들였다. 프라다의 예술 재단 폰다치오네 프라다는 2015년 밀라노 남부에 대형 창고 부지를 매입해 렘 콜하스와 함께 오랜 숙원 사업이던 복합 문화 예술 공간을 오픈했다.


그녀는 늘 이 시대 예술의 의미에 대해 질문해왔는데 그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그 답을 찾아 낼것이다. 이처럼 프라다의 행보는 예술가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협업을 통해 그들의 능력을 끌어올리고 현대의 삶에 기여한다. 앞서 언급한 로에베와 프라다가 예술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공통점은 재단과 기업 간의 철저한 독립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를 발굴하고 세상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수익 창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핵심이다. 한편 미우치아 프라다는 지금 가장 각광받는 분야인 필름에도 관심을 보여왔다.

그녀는 2011년 ‘미우미우 우먼스 테일’이라는 단편영화 프로젝트를 시작해 여성 감독이 여성의 이야기를 담는 일종의 그릇을 만들었다. 이 그릇을 통해 단편영화 14편이 제작됐다.

이쯤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예술과 문화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대중도 향유할 수 있도록 럭셔리 브랜드가 택한 갖가지 방법 중 하나를 살펴보자. 아이코닉한 백에 문화를 담는 방법이 그것인데, 먼저 최근 역대급 전시를 선보인 디올.

디올은 1955년 제작된 레이디 디올 백을 국적과 나이가 각기 다른 10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아이코닉한 백으로 재해석해 선보였다. 스위스의 남바 루사, 한국의 이불, 미국의 스펜서 스위니, 프랑스의 베티 마리알니 등 다양한 아티스트의 작품이 루이 비통의 가방과 조우해 신선한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한편 루이 비통의 마스터스 컬렉션 가방은 현대 미술가 제프 쿤스와 협업한 결과물이다.

루이 비통과 제프 쿤스가 협업한 마스터스 컬렉션 백.

루이 비통과 제프 쿤스가 협업한 마스터스 컬렉션 백.

클로드 모네의 ‘수련’, 윌리엄 터너의 ‘고대 로마: 게르마니쿠스 유골을 들고 있는 아그리피나’, 프랑수아 부셰의 ‘엎드려 있는 소녀’, 폴 고갱의 ‘환희의 땅’ 등 명화 페인팅을 루이 비통의 아이코닉한 백 에피 시리즈에 담은 것. 얼핏 보면 미술관 굿즈 숍에서 파는 명화 우산과 다를 게 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제프 쿤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모네는 제게 중요한 예술가 중 한명입니다. 모네의 이미지를 이용해 예술가가 서로에게 주는 중요성을 강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진정한 주인을 재발견하는 일입니다.” 루이 비통은 화가의 작품을 가방에 담아 걸어 다니는 갤러리를 만든 셈. 그것을 통해 얼마의 이윤을 남기든 이미지를 남기든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퍼포먼스는 중요한 비즈니스 영역으로 떠올랐다. 그 방식도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다양하다는 것이 흥미롭다. 브랜드가 어떻게 문화적 사업을 하는지, 문화를 앞세워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부각시키는지 알면 알수록 빠져든다.

펜디는 수십 년 동안 이탈리아의 뉴웨이브에서 미국의 블록버스터에 이르는, 세계 곳곳의 영화를 위한 의상과 액세서리, 모피를 제작해왔는데, 이탈리아 영화계와의 오랜 인연을 기념해 ‘로마 필름 페스티벌’ 기간에 맞춰 <펜디 스튜디오>라는 제목의 전시를 펼친다.

펜디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는 영화와 늘 함께해왔음을 전시를 통해 강조하는 것. 한편 유적지가 많은 로마는 패션 브랜드의 재미있는 기부가 이어진다. 로마의 재정 부족으로 도시의 문화적 유산들을 패션 브랜드의 지원을 통해 복원하고 있는데, 로마에 본사를 둔 펜디는 로마의 대표적 명소인 트레비 분수의 2015년 재단장 작업에 약 270억원을 쾌척하는 등 로마의 문화 예술 후원에 앞장서고 있고, 로마의 관광 명소 콜로세움은 이탈리아 슈즈 브랜드 토즈의 후원으로 새 단장을 마쳤으며, 로마의 또 다른 명물 스페인 계단은 불가리의 후원으로 복원을 거쳐 본 모습을 되찾았다. 로마에 베이스를 두고 있는 패션 브랜드의 문화적 행보는 유적지 복원에 집중되는데 이 역시 또 다른 행태의 문화 사업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패션 피플이 크게 열광한 이벤트를 언급하고 싶다. 바로 에르메스의 6대손 파스칼 뮈사르가 2010년 탄생시킨 에르메스 쁘띠 아쉬다.

 가방을 만들고 남은 가죽이나 실크로 만든 오브제, 에르메스 쁘띠 아쉬.

가방을 만들고 남은 가죽이나 실크로 만든 오브제, 에르메스 쁘띠 아쉬.

쁘띠 아쉬는 에르메스의 제품을 만들고 남은 가죽 소재를 브랜드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이 한곳에 모여 새로운 오브제로 탄생시키는 크리에이티브한 워크숍을 말한다. 장인의 손길로 재단되고 남은 가죽 조각이 아티스트의 시각과 전문가의 손길 속에 제2의 생명을 부여받아 세계 각국을 돌며 소비자와 만나게 된다. 질 좋은 소재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말해주는 얼굴이자, 그들의 노하우를 담아 완성한 제품 역시 브랜드의 기술력과 미적 감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의 말대로 이 모든 것은 그냥 방치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것들이다. 에르메스가 진행하는 공방 워크숍은 단숨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럭셔리 브랜드의 장인 정신을 함께 배우고 경험하며, 재료를 직접 만지고 느껴봄으로써 브랜드를 깊이 이해하는 통로이니까.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는 럭셔리 브랜드의 문화적 활동을 확인했다. 단순히 아트에 대한 관심을 과장해 보여주는 식이 아닌, 브랜드의 파워풀한 힘이 문화 전반에 그리고 구석구석에 제대로 스미는 창구가 되는 그 길이 여전히 뜨겁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