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를 향한 패션계의 사랑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 방식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90년대 열풍을 몰고 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베트멍의 룩. 구조적인 실루엣의 트렌치코트, 오버사이즈 셔츠, 절개가 독특한 데님 팬츠는 모두 베트멍 by 무이 제품. 각 6백만원, 72만원, 1백56만원.

90년대 열풍을 몰고 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베트멍의 룩. 구조적인 실루엣의 트렌치코트, 오버사이즈 셔츠, 절개가 독특한 데님 팬츠는 모두 베트멍 by 무이 제품. 각 6백만원, 72만원, 1백56만원.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지난해부터 관용구처럼 쓰이는 이 문장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는가? 이는 1994년 MBC 정관웅 기자의 ‘X 세대 패션’ 취재 영상 속 한 인터뷰이의 답변에서 비롯되었다. 20여 년이 지난 최근 들어 다시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이 보도 영상은, 이런 멘트와 함께 시작된다. “패션의 거리인 신촌 대학가와 강남을 휩쓸고 있는 이른바 X세대 패션입니다. 한쪽 멜빵을 풀어헤친 옷차림, 찢어버린 청바지, 그리고 미니 스커트 정장에 군화를 신은 소위 밀리터리 패션. X세대는 바로 위와 아래, 좌와 우가 제각각인 파격적인 모습으로 올 가을 패션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어, 한껏 꾸민 거리의 남성을 보여주며 ‘남녀 구별 없는 유니섹스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하고, 크롭트 티셔츠에 와이드 팬츠를 입고 넓은 벨트를 늘어뜨린 여성을 쫓아가 묻는다. “남의 시선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녀가 ‘쿨하게’ 답한다. “아니요.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요,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표준어 표기로 ‘좋거든요’인 이 마지막 말의 독특한 억양이 인상적인 덕에 유행어까지 낳은 이 영상이 최근 각광받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영상 속에서 보이는 X세대 패션이 소위 2017년 현재 ‘힙’ 함을 추구하는이들이 좇는 이상적인 스타일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로의 회귀. 패션뿐만 아니라 음악은 물론 문화 전반적으로 몇 년째 지속 중인 세계적 현상인 이를 패션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되는 두 단어는 예상대로 베트멍, 그리고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다. 2014년 첫 컬렉션을 선보이고,1년 뒤 극단적인 오버사이즈 후디를 비롯한 아이템으로 대히트를 기록한 채 여전히 승승장구 중인 이 브랜드의 대두가, 패션계 전반의 분위기가 바뀌는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와 헬무트 랭이 근간으로 삼은 ‘해체와 재조합’을 키워드로 한 테일러링, 90년대 힙합 문화를 베이스로 한 스트리트 무드를 접목한 이 브랜드의 컬렉션은 다른 하우스 브랜드들의 일회성 협업 작업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하이패션과 스트리트 신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당연히 늘 목마른 대중은(그중에서도 90년대를 경험하지 못한 밀레니얼 세대는 더욱!) 뜨겁게 열광했다. 그런데 그 열풍이 유독 거셌기 때문일까? 비슷비슷한 무드를 내놓는 브랜드들이 우후죽순 난립한 지 어느덧 2년. 패션계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1990년대 수많은 추종자를 낳은 헬무트 랭의 데님.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케이트 베츠(Kate Betts)는 “헬무트 랭이 티셔츠와 데님을 패션 아이템으로 ‘승격’ 시켰다”고 말했다. 사진 속 제품은 90년대 헬무트 랭 오리지널 블루종.

1990년대 수많은 추종자를 낳은 헬무트 랭의 데님.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케이트 베츠(Kate Betts)는 “헬무트 랭이 티셔츠와 데님을 패션 아이템으로 ‘승격’ 시켰다”고 말했다. 사진 속 제품은 90년대 헬무트 랭 오리지널 블루종.

가장 먼저 1990년대 트렌드와 관련해 이번 2017년 하반기에 새롭게 대두한 중요 키워드는, ‘돌아온 헬무트 랭’이다. 헬무트 랭 사조를 좇는 뉴 브랜드 물결이 아닌, 진짜 브랜드 헬무트 랭. 물론, 베트멍으로 인해 점화된 90년대 유행이 시작된 시점부터 헬무트 랭은 지금의 디자이너들이 영감을 얻는 주요 디자이너로 지속적으로 언급되어 왔다. 규모나 세일즈 부분에 있어 대중에게도 익숙한 마르지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1986년 첫 컬렉션을 내놓은 뒤 2005년 디자이너 본인은 브랜드를 떠난 이 브랜드가 다시 급부상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헬무트 랭의 조각가로서의 기량을 엿볼 수 있었던 개인전이 2015년 뉴욕에서 열렸다.

헬무트 랭의 조각가로서의 기량을 엿볼 수 있었던 개인전이 2015년 뉴욕에서 열렸다.

랭 자신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랭은 이후로 조각과 설치 작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소유 그룹이 본격적인 재시동을 알렸기 때문. 이를 소유하고 있는 띠어리 홀딩스 그룹의 CEO 앤드루 로즌(Andrew Rosen)은 이 전설적인 레이블을 어떻게 되살릴지 숙고했고, 고심 끝에 지난 3월 디자이너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신 영국 <데이즈드&컨퓨즈드>의 에디터 ‘이사벨라 벌리(Isabella Burley)’를 브랜드를 ‘에디팅’ 해줄 이로 고용했다. 그리고 이사벨라에게 이런 주문을 던졌다. “브랜드에 다시금 짜릿함을 불어넣을 것.”

그 결과, 헬무트 랭 브랜드는 이제까지와 다른 행보를 걷게 되는데 그 방식이 꽤 흥미롭다. 첫 번째로 헬무트 랭은 이사벨라와 함께하는 동안 컬렉션을 특정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캡슐 컬렉션’ 형태로 선보이겠다고 밝혔다. 첫 타자 는 후드 바이 에어의 셰인 올리버. 이 작업을 위해 올리버는 레일라 베인롭과 함께 이끌어온 본인의 레이블을 잠시 접었는데, 많은 이들의 기대와 우려 속에 지난 9월 2018 S/S 뉴욕 패션위크 기간 중 베일을 벗은 그의 첫 랭 컬렉션은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았다. 이사벨라는 랭 아카이브의 아이코닉한 피스들을 복각해서 내놓는 ‘Re-Edition’ 프로젝트도 벌이고 있다.

일정 기간 동안 특정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헬무트 랭 하우스의 새로운 방식이 마치 밴드의 투어 세션을 섭외하는 것 같다고 한 셰인 올리버가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내놓은 ‘Autumn Tour’ 시리즈의 티셔츠.

일정 기간 동안 특정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헬무트 랭 하우스의 새로운 방식이 마치 밴드의 투어 세션을 섭외하는 것 같다고 한 셰인 올리버가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내놓은 ‘Autumn Tour’ 시리즈의 티셔츠.

1999년의 실버 모터사이클 재킷, 1998년의 페인트 프린트 데님 팬츠, 2004년의 말총 백 등 랭을 좋아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총 15피스의 아이템이 복각되어 온라인 사이트와 소수 숍에서 판매되는 중. 그뿐 아니라 예전 혤무트 랭 본인이 제니 홀저나 루이즈 부르주아와 그런 것처럼, 아티스트들과의 활발한 협업도 예정되어 있다.

 얼마 전 공개된 헬무트 랭 아티스트 시리즈의 첫 주인공은 사진가 발터 피퍼다. 작가의 80년대 사진들이 무척 인상적이다.

얼마 전 공개된 헬무트 랭 아티스트 시리즈의 첫 주인공은 사진가 발터 피퍼다. 작가의 80년대 사진들이 무척 인상적이다.

그 첫 타자로 관능적인 시선으로 유명한 스위스 사진가 발터 파이퍼(Walter Pfeiffer)와의 작업이 며칠 전 첫번째로 공개됐으며, 프린트 티셔츠부터 포스터까지 다양한 리미티드 에디션을 판매하는 중이다.

이러한 행보를 미국판  <W>와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유수 해외 매체가 주목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일곱 가지 요소를 곱씹어보자. 하나, 밀리터리 무드를 차용해 디자인하기. 둘, 남성과 여성의 구분없는 유니섹스 아이템 만들기. 셋, 런웨이에 일반인 모델을 내보내기. 넷, 패션 브랜드의 옷이 등장하지 않는 광고 캠페인을 선보이기. 다섯, 아티스트부터 셀레브리티, 스타일리스트까지 자신의 ‘스쿼드’를 만들기. 여섯, 각종 분야의 아티스트와 끊임없이 협업하기. 일곱, 패션위크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곳에서 패션쇼를 열기다. 이는 명백하게 현재의 트렌드지만, 이 모든 것이 바로 1986년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한 디자이너 헬무트 랭이 90년대에 처음 시작해, 지속해온 요소들이다. 실로 굉장했던 랭(패션위크 순서가 뉴욕부터 시작한 것도 그가 패션위크 기간 시작 전에 파리에서 뉴욕으로 브랜드를 옮겨와 마음대로 쇼를 열었기 때문)의 사조가 2018년인 지금도 ‘세련되다’고 여겨지는 패션의 애티튜드 이니만큼, 이 브랜드의 공격적인 재도약 시도가 어떻게 이어질지 다들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진짜’의 귀환과 대두는, 헬무트 랭뿐만 아니라 캘빈 클라인과 타미 힐피거 같은 오리지널 미국 브랜드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캘빈 클라인의 경우 라프 시몬스가 부임하며 데뷔 쇼로 선보인 이번 F/W 컬렉션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라프식으로 재해석된 셀비지 데님과 선이 살아있는 테일러링 피스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캘빈 클라인 하우스가 90년대를 소환하는 트렌드의 중심에 서는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

라프 시몬스의 캘빈 클라인 레디투웨어 라인은 캘빈 클라인 하우스의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시스루 소재와 게이지 수 높은 니트로 짠 소매의 극단적인 대비가 멋진 톱과 날렵한 테일러링의 미디스커트, PVC 소재와 스웨이드 소재가 믹스된 슈즈는 모두 캘빈 클라인 제품. 모두 가격 미정 .

라프 시몬스의 캘빈 클라인 레디투웨어 라인은 캘빈 클라인 하우스의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시스루 소재와 게이지 수 높은 니트로 짠 소매의 극단적인 대비가 멋진 톱과 날렵한 테일러링의 미디스커트, PVC 소재와 스웨이드 소재가 믹스된 슈즈는 모두 캘빈 클라인 제품. 모두 가격 미정.

해체와 재조합, PVC 소재 사용 등으로 랭과 마르지엘라가 연상된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라프로 인해 캘빈 클라인 하우스에 새로운 전성기가 도래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타미힐피거의 경우, 보다 서브 컬처적인 90년대 이미지를 살려 회심의 한방을 날리고 있다. 90년대 패션의 여러가지 요소 중 ‘스트리트 캐주얼 무드’에 무게중심을 싣는 전략이 제너와 하디드 자매를 우상처럼 여기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제대로 힘을 발휘하면서 다시금 승승장구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칼럼을 준비하고 작성하면서 유튜브에 박제된 채 있는 많은 90년대 영상을 보았다.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슈트를 비롯한 테일러링 피스, 그리고 스파게티 스트랩 톱과 드레스가 스무 살 넘은 성인에겐 당연한 아이템처럼 느껴지던 그 시절. 성숙하고 자유롭게 옷 입는 걸 즐기던 시절이 대세로 떠오른 이 시점이 꽤나 반갑게 느껴졌다. 한동안 우리는 성인인 이들까지도 짧은 테니스스커트, 세라복을 차용한 톱, 흰 양말과 흰 운동화의 조화를 즐기는 어찌 보면 좀 ‘아스트랄’한 시절을 지나왔으니까. 하지만, 더 파고들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요,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의 자세야말로, 눈치 보며 옷 입기 바쁜 현재의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하는. 사실, 테니스 스커트면 어떻고 헐렁한 테일러드 재킷이면 어떤가. 입은 사람이 좋다는데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다. 그런, 진짜 90년대식의 좀 더 편안한 관용과 당당함에 끌려 다들 그시절을 더 그리워하는 건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