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기억 Vol.1

이채민

강다니엘이 등장했고, 방탄소년단은 빌보드의 선택을 받았다. 스크린에서 여배우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으며, SNS엔 고백과 폭로가 쏟아졌다. 언제나 숨 가쁘게 흘러가버리는 한 해를 또다시 돌아봤다.

대박 드라마 없는 한 해
<비밀의 숲>과 추리 스릴러 강세, 백미경 작가와 JTBC의 도약

연말결산_2부드라마 분야에서 2017년은 언뜻 보면 대박 없는 한 해였다. 2016년만 해도 시청률도 높았을뿐더러, 전 국민에게 유행어를 퍼뜨린 드라마 이름을 몇 개는 댈 수 있었다. 송송 커플을 탄생시킨 <태양의 후예>, 박보검을 톱스타로 올린 <구르미 그린 달빛>,촛불만 보면 불고 싶게 만든 <도깨비>까지(2017년 1월까지 방영), 예능, 광고에 이미지가 퍼지고 유통된 작품이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2017년에 접어들자 사드로 인해 중국 합작 드라마 제작 붐이 주춤하고 대작 소식은 들리지 않았으며, 차일피일 미루던 거대 프로젝트 <사임당, 빛의 일기>는 등 떠밀리듯 방영한 후 별다른 반응 없이 사라졌다. 드라마는 대부분 외주 제작이라 공중파 방송국의 파업에도 중단되지 않고 이어갔지만, 중간에 방영 시간이 뜨기도 하는 등 파업의 영향을 받았다. 대중적 어젠다로서 드라마가 차지하는 지분을 <프로듀스 101> 같은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일정 부분 가져간 면도 있었다. 현재 방송국들이 앞다투어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내적으로 보면 2017년에도 나름의 수확은 있었다. 올해는 추리 스릴러 장르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내용도 좋은 평을 받았다. KBS는 <완벽한 아내>나 <추리의 여왕> 등 일상적 드라마 요소와 추리적 긴장감을 배합한 작품을 내놓았고,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 SBS는 < 피고인>, <귓속말>, <조작>과 같은 사회파 미스터리 라인업을 꾸준히 내보냈고, 로맨스와 법정 추리를 배합한 <수상한 파트너>와 판타지적 능력으로 사건을 푸는 <당신이 잠든 사이에>까지 방영했다.

추리 스릴러 장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단연 tvN의 <비밀의 숲>이다. 응집성 있는 사건 구조, 개별성이 확실한 인물, 전문적인 디테일까지 살린 이 작품은 열혈팬들을 상당수 끌어모으며 2017년 최고 수작의 대열에 올랐다. 넷플릭스와 동시 개봉이라는 형태도 드라마가 TV에 국한된 장르라는 개념을 깼다.

그러나 시청률 쪽에서는 단연 JTBC의 약진이 눈에 띈다. 백미경 작가는 <힘쎈여자 도봉순>, <품위있는 그녀>라는 성격도 스토리도 전혀 다른 두 작품을 한 해에 히트시키면서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했다. 특히 재벌가의 속내를 다룬 <품위있는그녀>는 그간 안판석 PD-정성주 작가의 콤비가 기반을 다진 풍속 풍자 드라마의 계보를 이으면서 JTBC 드라마의 성격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한 우물만 파는 OCN은 <보이스>, <터널>, <듀얼>, <구해줘>까지 준수한 스릴러 장르물을 내놓으면서 마니아층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사랑의 온도> 같은 정통 멜로물이 드물게 있었지만, 올해는 한국 드라마가 추리와 수사물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음을 보여준 한 해였다. 이제는 범죄의 발생과 해결이라는 중심 요소 없이 진행되는 드라마를 찾기 어렵다. 판타지적 설정은 사건을 푸는 데 필요한 초능력으로 도입된다. 비록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았더라도 올해 뿌린 이 씨앗이 앞으로 어떤 모습의 숲을 이루게 될지, 2018년을 기대해본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18
“요리하는 사람은, 미쉐린 평가단이 방문할 때뿐 아니라 언제라도 평가대에 놓여 있습니다. 한번 실망하면 더 이상 가지 않는 게 고객이니까요.” 한식 레스토랑 비채나의 방기수 셰프는 시그니엘 호텔 안으로 이전하면서 가진 더블유와의 4월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불시에 다녀가는 미쉐린 평가단의 방문은 지난해 별을 받은 레스토랑들에게 예민하고 긴장되는 이슈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두 번째 해인 2018년에 해당하는 미쉐린 가이드가 발표되었다. 미쉐린 가이드의 마이클 엘리스 인터내셔널 디렉터는 발표에 앞선 스피치를 통해 ‘일관성’이 미쉐린에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언급했다. 별을 받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요약하자면, 결과에 이변은 없었다. 방기수 셰프의 비채나를 비롯해 14개의 레스토랑은 원 스타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새로 별 하나를 받은 곳은 도사, 익스퀴진, 주옥, 테이블 포포 등 네 군데였다. 지난해 별 하나였던 정식당과 코지마는 별 하나씩을 더 얻었으며, 곳간과 권숙수는 레벨을 그대로 가져갔다. ‘요리가 매우 훌륭하여 특별히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을 의미하는 별 셋을 받은 두 군데의 한식당, 가온과 신라호텔 라연 역시 별을 잃지 않고 유지했다. 어쩔 수 없이 리스트에서 사라진 곳을 찾아보게 되는데, 2017년에 별 둘이었던 피에르 가니에르, 그리고 별 하나였던 곳 가운데는 보름쇠, 이십사절기, 하모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1등의 자리에서는 그대로이면 다행, 내려가는 위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2년 연속 미쉐린 스리 스타 레스토랑으로서 가지는 중압감과 부담감에 대해 가온의 김병진 셰프는 이렇게 말한다. “즐겨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감정이 다양한 것처럼 압박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여러 가지일 수 있겠죠. 부담감이 팀으로 뭉쳤을 때는 더 강력한 힘과 철학으로 발휘될 수 있습니다.”

#MeToo 와인스타인 스캔들
성폭력은 섹스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최근 이 사실을 다시 일깨운 것은 할리우드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아니 가졌던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다. 작품 홍보나 대본 검토 등의 핑계를 대거나 파티가 있다고 속여 배우들을 자신의 호텔 방으로 불러들이는 수법을 수십 년간 수십 명에게 반복한 것. <뉴욕 타임스>의 보도로 추행 사실이 알려지고, 귀네스 팰트로, 앤젤리나 졸리, 에바 그린, 애슐리 주드 등 배우들의 고발과 증언이 이어지면서 그는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뒤이어 <엑스맨>의 감독 브렛 레트너, 배우 케빈 스페이시, 더스틴 호프만, 코미디언 루이 C. K. 등도 성폭행 또는 추행 가해자로 지목당했다. 할리우드의 이런 움직임은 #MeToo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나도 성폭행 피해자다”라는 연쇄 고발을 일으키는 중. 2016년 국내에서 해시태그를 달고 이어진 ‘미술계’ ‘문학계’ 등의 내부 성폭력 고발과 비슷한 흐름이다. 최근 회사 내 성폭력 사건을 고발한 여성도, 다른 사례에 힘을 얻었다고 말한 바와 같이 용기는 전염된다. 와인스타인과 한국의 다른 사례들에 차이가 있다면, 대다수 가해자들이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자리를 보전한다는 점이겠지만 말이다. 거물 제작자와 신인 배우, 직장 상사와 신입 직원, 선생과 제자, 큐레이터와 작가처럼 상하 관계에서 이런 권력의 남용은 멈추지 않는다. 버락과 미셸 오바마 부부는 여성을 비하하고 모멸감을 주는 남성을 비난하는 한편 책임을 촉구하면서 “앞에 나서서 고통스러운 얘기를 밝힌 여성들의 용기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약자들의 목소리는 작지만 세상이 귀 기울일 때, 그리고 여성들이 서로 연대하고 힘을 보탤 때 모여서 번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17 올해의 물건

인공지능 스피커

라인프렌즈스피커-누끼

AI 스피커는 이제 10만원대의 보급형 모델까지 출시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캐릭터 시장에서 라인프렌즈 VS. 카카오프렌즈 구도를 이루며 엎치락뒤치락하는 네이버와 카카오톡 역시 AI 스피커를 모두 10월에 출시했고, 사전 예약 때부터 반응은 뜨거웠다. ‘프렌즈’는 브라운과 샐리 등의 얼굴에 몸통이 일자로 쭉 늘어져 있어 귀여움이라는 것이 폭발한다. 휴대 가능한 사이즈에 전선을 연결할 필요 없이 배터리가 내장돼 있다는 게 큰 장점. ‘카카오미니’는 스피커 위에 카카오프렌즈의 캐릭터가 앙증맞은 피규어로 매달려 있다. 스피커를 향해 카카오를 부른 뒤 음성으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게 경쟁력 중 하나. 뭘 물어보면 검색 정보를 알아서 읊고, 음악 틀어달라면 틀어주고, 무엇보다 ‘스피커’인 만큼 제법 시원한 출력의 소리를 내는 것들인데, 내 손가락을 쉬게 해주려는 이 작은 비서들과 친해지려면 한동안은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아이코스(IQOS)
아이코스-누끼

기존의 전자담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좀 더 작고 예쁘다. 통통한 볼펜 같은 이것을 입에 물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담배계의 아이폰’이라고 불리며 일본에서 품귀 현상까지 일으킨 후, 올해 6월부터 국내 출시된 아이코스는 필립 모리스에서 만든 독특한 전자담배. 뷰티 제품으로 치면 질 좋은 메이크업을 위한 애플리케이터와 비슷하달까? 담배에 불을 붙여 태우는 게 아닌, 쪄서 증기를 만드는 원리로 일반 담배보다 유해성이 적다는 게 필립 모리스의 설명이다. 특히 아이코스를 이용해 전용 담배를 피우면 냄새가 훨씬 덜 나기 때문에 보다 ‘인간다운 흡연 생활’을 추구하며 이 제품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금연자는 이렇게 정체를 알 필요도 없는 대상이지만, 흡연자에겐 ‘힙’한 아이템인 셈이다.

‘한남’과 ‘내로남불’
한 해의 끝자락에서 돌아보면 매해가 다사다난하지만, 유독 정신의 타격과 각성이 빈번한 듯한 2017년이었다. 이젠 안부 인사로 당신의 정신은 안녕한지를 물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새해를 맞기 전 목욕재계하는 마음으로 일단 지금의 한국 사회와 한국인을 진단해보고자, 전문가의 소견서를 받았다.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의 저자인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은 올해의 두드러진 키워드로 ‘한남’과 ‘내로남불’을 언급한다. 여성 일반이 ‘김치녀’라는 희대의 작명으로 치환되고 비하되길 몇 년, 그에 맞서는 상징적 단어로 떠오른 것이 ‘한남(한국남성)’이다. “억눌려 있던 여성의 아우성이 폭발적이고 연쇄적으로 일어났어요. 직장 내 힘의 불균형, 택시를 이용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부당함과 두려움의 경험담 등등이 쏟아졌죠. 스스로 꽤 공정하다고 자부한 남성조차 우리 사회에 미처 인식하지 못한 성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물론 그에 반발하는 남성도 존재하고요. 과거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역할을 한 세대가 이제 오피니언 리더 자리에 오르고, 많은 이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흐름 속에서 분화는 계속 일어나겠죠.

‘한남’이 젠더 이슈와 맞물린 키워드라면, ‘내로남불’은 인간 심리의 영역이다. 사자성어처럼 보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준말인 이 사고방식은 개인의 작은 태도 하나에서부터 공동체의 가치 기준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든 심어질 수 있는 씨앗이다. “특정 정책을 비판하던 고위직 후보들이 알고 보니 제법 치밀하게 자신과 가족의 잇속을 취하고 있었죠. 나라의 요직처럼 훗날 큰일을 할 경우를 대비해 모든 사람이 자기 욕망을 매번 검열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적인 욕망이 권력이나 명예 등으로 넘어갈 때는 최소한의 양심이 작동하며 판단할 줄 알아야죠. 공동의 선을 입에 올리던 사람들마저 자기 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는 ‘남들도 뒤에선 다 이렇게 할 텐데’ 식으로 상황에 따라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유독 많이 보였어요. 이건 윤리나 도덕과도 연결되는 문제예요. 그 문제가 외부의 제재보다는 개인의 염치에 따랐으면 좋겠는데, 염치 있게 살다간 손해를 본다는 인식이 사회에 자리 잡을까 봐 우려됩니다.” 이를테면 ‘다른 개는 몰라도 우리 개는 사람 안 물어’라는 믿음 역시 이중 잣대나 자기 합리화일 수 있다. 페미니즘이야 싸워서 쟁취해야 할 문제라고 쳐도, 여러모로 양심과 염치가 있는 사회를 바라는 게 그리 무리일까?

YOLO vs ‘스투핏!’
경제나 재테크를 엔터테인먼트화한 콘텐츠는 지금까지 케이블 TV의 증권이나 부동산 채널 영역이었다. 김생민은 여기에 젊은이를 끌어들이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알뜰한 저축왕의 관점으로 소비 패턴을 분석하고 일침을 날리는 팟캐스트 ‘영수증’이 큰 화제를 낳으며 공중파 정규 편성까지 된 것. 불필요한 지출을 지적하는 ‘스투핏!’, ‘돈은 안 쓰는 것입니다’ 같은 말은 올해의 유행어가 되었으며, 쇼핑 사이트들은 합리적인 소비에 따라붙는 ‘그뤠잇!’을 저마다 광고 문구로 사용했다. ‘YOLO’ ‘탕진잼’ ‘시발비용’ 같은 한탕주의 트렌드도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에까지 등장하며 올해 공존했지만 결국 짠테크 개념에 밀려나는 모양새였다. 씁쓸한 건 극단에 있는 이 양쪽이 모두 ‘88만원 세대’ 이후 이어져온 빈곤하고 불안정한 20대의 정체성 안에서 닿아 있다는 것. 충분히 즐기면서 동시에 내일을 위해 저축할 수 있는 여유는, 2017년의 젊은 세대에게는 두 마리 토끼 같았다.

베스트셀러의 온도
인터넷과 SNS에서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영상이나 게임 같은 즐길 거리도 무궁무진한 시대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여전히 책을 살까? 각박한 마음에 텍스트로 된 위로나 치유를 얻고 싶은 심리, 방송 콘텐츠로 만만하고 친숙한 교양을 손 닿는 데 두고 싶은 지적 허영, 엔터테이너로서의 작가에게 가지는 호감과 호기심 등이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적당히 온기 있는 말이 슬픔을 감싸 안아준다’는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 미래 사회의 주요 키워드를 강연과 다큐멘터리를 결합한 형식으로 푼 KBS 교양 프로그램을 정리한 <명견만리>, ‘알쓸신잡’ 출연자들인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 <살인자의 기억법>, 그리고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대선 특수를 탄 <문재인의 운명>,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등이 2017년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 많던 여배우들은 어디로 갔을까
여전히 불균형했던 한국 영화, 그 속에서 분투한 여성 배우들

연말결산_1부
<미씽: 사라진여자>. 2017년의 한국 영화계에 부제를 단다면 이런 말을 덧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사라졌다. 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올해 박스오피스 10위권에 안착한 한국 영화의 포스터를 떠올려보면 된다. <택시 운전사>와 <공조>, <군함도>와 <범죄도시>, <청년경찰>과 <더 킹>, 그리고 <남한산성>. 이들 중 이정현이 등장한 <군함도>를 제외한 어떤 작품의 포스터에서도 여자 배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덕혜옹주>와 <아가씨>, <비밀은 없다>와 <미씽: 사라진 여자>, <우리들>이 극장에 걸렸던 지난 2016년의 풍경이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 영화가 여성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2017년의 개봉작은 많은 문제점을 남겼다. 우리는 두 명의 ’청년경찰’이 매력적인 여성을 길에서 발견하고 그녀를 몰래 미행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목격해야 했으며(<청년경찰>), 연쇄살인범에게 납치된 여성이 고통스럽게 성폭행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브이아이피>)를 마주해야 했다. 어떤 여성 캐릭터들은 남자 주인공이 집에 귀가해야만 만날 수 있었다. <공조>에는 형부에게 “300만원만 빌려달라”던 백수 처제가, <보안관>에는 남편 타박이 일과인 주부가 등장한다. 이처럼 올해의 한국 영화 흥행작들이 매년 수많은 관객이 지적해 온, 수동적이고 대상화된 여성 캐릭터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을 듯하다.

그러나 ’남자 영화’의 홍수 속에서도 유의미한 활약을 보여준 여자 배우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배우는 <아이캔 스피크>의 나문희다. 극장을 찾은 모두의 눈물샘을 자극한, 페이소스 짙은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이 영화를 통해 그녀가 이룬 가장 큰 성취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아픈 과거가 있는 여성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할머니로 묘사했다는 점일 것이다. <박열>의 최희서 배우 또한 박열의 연인이자 동지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역을 통해 일제 시대라는 소재의 무게감에서 얽매이지 않는 주체적이고 활기 넘치는 여성상을 보여줬다. 연출과 주연을 겸한 여자 감독/배우의 등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여배우는 오늘도> 의 문소리는 자신의 첫 장편 연출작을 통해 끊임없이 대상화되던 여배우라는 존재의 실체를 가감없이 파헤쳤다. 남자 배우 이상의 파워와 카리스마를 보여준 <악녀>의 김옥빈과 <미옥>의 김혜수는 어떤가. 그녀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범죄 액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아직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쯤이면 사랑 때문에 분노하거나 모성애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여전사를 한국 영화 속에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내년에는 한국 영화 포스터에서 사라진 여자 배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2018년의 한국 영화계에 많은 것들을 기대하게 되는 연말이다.

아이돌 패자부활전
아이돌이 한국 K팝 시장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면, 방송 엔터테인먼트계에서는 이 아이돌을 키워내는 과정이 큰 축을 이뤘다. 2017년은 아이돌 육성 프로세스가 쇼 프로그램에서 아예 하나의 사이클을 이룬 해였다. 이전의 <슈퍼스타 K>, ,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등의 1세대 오디션 프로그램이 숨어 있는 재능을 발굴하는 쇼였다면, 이제 기존 기획사에서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연습생을 넘어서 이미 데뷔했지만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한 아이돌의 ‘이삭줍기’ 내지는 ‘패자부활전’으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여기에는 시즌 2로 넘어와 남자 아이돌로 참가자가 바뀌면서 더 큰 추진력을 얻은 <프로듀스 101>이 큰 몫을 했다. 뉴이스트, 탑독, 핫샷 등 기존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이 출연해 최종 11명 안에 합격하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크게 주목받는 성과를 낸 것이다. 연습생 기간부터 데뷔 이후까지 오래 노력해왔지만 크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아이돌 팀의 멤버들을 재조명한다는 KBS <더 유닛>,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가 다양한 군소 기획사를 직접 찾아가 스타를 발 굴한다는 JTBC <믹스나인>의 기획은 이런 면에서 <프로듀스 101>에 빚지고 있음이 명백하다. 1세대 오디션 쇼를 구성하는 재미가 주로 의외의 재능을 발견하는 데 있었다면, <더 유닛>과 <믹스나인>에서 목격하게 되는 주된 정서는 간절함과 불안이다. 참가자들의 재능이나 매력을 눈여겨보면서도, “28세이면 이제 아이돌에서 은퇴할 나인데?” 하는 양현석의 코멘트에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 건 그런 이유다. 훅이 강한 작곡법, 칼군무 같은 퍼포먼스, 인공적인 미학 등 아이돌 음악의 구성 요소가 K팝의 정체성을 주로 이뤄왔다면, 이제 이 과밀한 시장 속의 포화 상태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음악 제작자들의 능동적인 고민이 필요할 때다. 안일한 이삭줍기를 거듭하다가 서른 즈음에 이르면 팀을 해체시키고 또 어린아이들로 대체하기만 하는 구조는 소모적이다. 그건 더 많은 10대가 아이돌을 꿈꾸는 지금 일종의 묵인된 희망 고문이자 꿈을 볼모로 한 인질극이 아닐까.

피쳐 에디터
황선우, 권은경
박현주_소설가, 팟캐스트 〈더 드라마〉진행자 (대박 드라마 없는 한 해), 장영엽_〈씨네21〉기자 (그 많던 여배우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트웍
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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