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한 해가 저물어간다. 패션계는 2017년에도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패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놀라운 협업, 정든 하우스를 떠나는 디자이너, 페미니스트 열풍 등 패션계의 2017년을 되짚어봤다.

 

07/JUL

구찌의 러브하우스

미켈레 부임 후 수직 상승하던 구찌가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간 듯 보인 여름, 개인 의류 및 수납공간을 꾸밀 수 있는 ‘구찌 데코 컬렉션’이 나왔다. 장식적 요소가 강한 의상과 디스플레이 구성을 보며 ‘라이프스타일 제품이 나오기만 하면 대박일 텐데’라는 생각을 한 것이 어디 나뿐이었을까.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데코 용품이 가득해 행복했다. 특히 틀에 박힌 장식용 스타일이 아닌, 개개인의 개성을 살려 주거 공간을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도록 한 점은 독보적이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쇼에 자주 보인 디자인 모티프도 대거 등장한다. 구찌는 데코 컬렉션을 소개하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지 않는다. 이를 활용해 자연스럽게 매장을 꾸미고 바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한다. 미켈레의 공간 디렉팅 능력을 볼 수 있는 셈인데, 그의 천재성이 어떻게 발휘될지 궁금할 따름이다. 아마도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공간이 탄생하지 않을까? 구찌 데코 컬렉션은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 호텔 사업까지 손을 뻗은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그랬듯, 미켈레 역시 구찌 왕국을 건설하는 ‘빅 픽처’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태양은 빛나고

펜디가 태양과의 협업 캡슐 컬렉션을 발표했다. 바로 ‘펜디 포 영배(Fendi for Young Bae)’. 협업은 1월 2017 F/W 쇼 이후 태양이 펜디 아틀리에를 방문하며 구체화됐다. 태양은 수개월 동안 컬렉션을 준비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디자인에 반영했다. 이를테면 ‘Saved’나 ‘Hope’, ‘Bae’ 같은 단어, 그리고 사인할 때 그릴 만큼 좋아한다는 데이지꽃 등이다. 태양은 소재 선택부터, 슬로건 선정, 샘플링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참여할 만큼 남다른 애정을 보였고, 그렇게 오롯이 태양만의 컬렉션이 탄생했다.

 

09/SEP

카이아 거버 창대한 시작

2018 S/S 패션위크를 사로잡은 건 우리 나이로 이제 겨우 만 16세에 불과한 카이아 거버였다. 175cm 키에 완벽한 보디라인, 왕년 슈퍼모델 엄마 신디 크로퍼드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받은 ‘될성부른 떡잎’이 바로 그녀다. 10세 되던 해 광고를 찍고, 13세 때부터 다수의 패션지와 커버까지 장식했지만 패션쇼에서만큼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유는 런웨이에 설 수 있는 최소 연령이 16세이기 때문. 만 16세가 지난 이번 시즌, 드디어 모습을 나타낸 그녀. 샤넬과 베르사체, 알렉산더 왕의 오프닝을 맡았고, 모스키노, 생로랑, 캘빈 클라인, 프라다 등의 빅 쇼에 서며 패션위크 데뷔와 동시에 최고의 스타로 화려하게 떠올랐다. 버버리 쇼에선 오빠 프레슬리 거버와 함께 쇼에 섰고, 베르사체 쇼에는 엄마도 함께했으니(신디 크로퍼드는 나오미 캠벨, 카를라 브루니, 클라우디아 시퍼, 헬레나 크리스텐슨과 함께 피날레에 등장했다) 이 슈퍼 소녀는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넥스트 스텝

지속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세계, 바로 패션계다. 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변화에 가장 빠르고 기민하게 대응하는 디자이너이자 변화를 선도하는 프런티어다. ‘씨 나우 바이 나우’, 남성과 여성 쇼 통합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온 그는 지난 시즌엔 조각가 헨리 무어의 작품에서 영감 받은 컬렉션을 VR 체험을 통해 소개했다. 프라다 역시 밀란 컬렉션 기간 프라다 폰다치오네에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제작한 4D 영화 <육체와 모래>를 프레스들에게 공개해 특별한 체험을 하도록 했다.

 

10/OCT 

뜨거운 남자, 버질 아블로

2017년 가장 바빴던 사람 중 하나일 버질 아블로. 오프화이트와 몽클레르, 나이키, 최근 공개된 리모와, 지미추까지 끊임없이 협업을 선보이고, 또 준비하고 있다. 그중 인스타그램을 떠들썩하게 한 나이키와의 ‘더 텐(The Ten)’ 시리즈는 한동안 주춤했던 오프화이트의 위상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오프화이트 계정의 사진을 리그램하면 추첨을 통해 ‘구입할 수 있는’ 자격을 준다는 독특한 방식 때문에 인스타그램 피드가 몇 주간 이 사진들로 도배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해외에서 선발매된 제품은 발매가에 10배가량의 프리미엄이 붙었고, 그조차 뜨거운 경쟁을 치러야 한다. 이 작업은 과거 파이렉스 비전 때 보여준 버질 아블로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스트리트 패션과 하이 패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버질 아블로. 공공연하게 럭셔리 하우스의 수장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기도 한 그가 내년엔 또 어떤 놀라운 이슈를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헬로, 굿바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또 다른 만남이 있는 법. 유독 오랜 시간 한 브랜드를 맡았던 디자이너들의 들고남이 잦은 한 해였다. 마르니는 프란체스코 리소가 2017 F/W로 신고식을 치렀다. 브랜드의 설립자이자 디렉터로 22년간 마르니를 이끌어온 콘수엘로 카스틸리오니가 떠난 빈자리를 채워가야 하는 그의 어깨가 무겁다. 지방시 역시 12년간 하우스를 이끌어온 리카르도 티시가 떠나고 공석이었던 자리에 하우스 최초로 여성 디렉터 클레어 웨이트 켈러를 맞이했다. 그녀는 파격보다는 차분하고 섬세한 룩으로 첫 컬렉션을 치렀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폴리오 리고니가 떠난 자리에 슈즈 디렉터 폴 앤드루를 여성복 디렉터로 임명했고, 끌로에는 나타샤 램지 레비가 데뷔 무대를 가졌다. 버버리는 17년간 디렉터이자 최고책임자로서 지금의 버버리를 일군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떠난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알려왔다. 조금은 고루할 수 있는 클래식의 대명사 버버리를 가장 동시대적 브랜드로 탈바꿈시킨 건 그의 혁신과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후임자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얼마 전 셀린과 이별을 발표한 피비 파일로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루이 비통의 기묘한 이야기

10월 열린 루이 비통의 2018 S/S 런웨이에서 가장 주목받은 옷은 다름 아닌 한 장의 티셔츠였다. 모델 최소라가 여성스러운 블라우스 위에 레이어드하고 등장한 티셔츠에는 미드 <기묘한 이야기>의 포스터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 흥미로운 티셔츠는 SNS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큰 이슈가 됐다. 올해 초, 〈기묘한 이야기>의 배우들이 루이 비통 본사를 방문해 궁금증을 자아냈던 이유가 드디어 공개된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드라마 속 초능력 소녀로 등장해 전 세계 시청자와 패션계의 눈을 사로잡은 밀리 바비 브라운. 13세에 불과한 그녀는 미국 <보그>가 뽑은 2017년을 이끌어갈 10대 패셔니스타 8인에 뽑혔다. 거기다 캘빈 클라인의 라프 시몬스가 그녀를 모델로 발탁했으니,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이 어린 소녀가 어떻게 성장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테리 리처드슨 OUT!

Brandon Maxwell - Front Row - February 2017 - New York Fashion Week: The Shows

미국의 출판사인 콘데나스트 인터내셔널은 테리 리처드슨과의 작업 및 지난 사진 사용을 전 세계적으로 금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유는 아마도 최근 뉴스화된 모델 추행 문제 때문인 듯. 발렌티노를 비롯한 몇몇 브랜드도 그와의 작업을 금지했다. 패션계에서 윤리적 문제는 늘 대두되기 마련이지만, 이렇게까지 공개적으로 어떤 조치가 취해지는 것은 드문 일이기에 충격적이다. 그의 사진을 유수의 패션지에서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아쉽지만, 아무리 뛰어난 감각과 실력도 윤리적 문제보다 우선순위에 있을 수는 없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그의 사진을 보긴 어려울 것 같다.

 

11/NOV

웰컴 투 서울

올해는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귀한 손님들이 많았다. 우선 폴 앤드루는 4월, 페라가모 여성 슈즈 디렉터로서 첫 컬렉션을 서울에서 선보였다. 그리고 부임 1년 만에 여성 컬렉션 총괄 디렉터가 되기에 이른다. 여러모로 서울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듯하다. 벨루티의 디렉터로 임명되며 큰 이슈가 됐던 하이더 애커만도 한국을 찾았다. 10월엔 니나리치의 기욤 앙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파리에서 드라마틱한 2018S/S 쇼를 선보인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먼 한국까지 날아와 2017F/W 프레젠테이션을 직접 진행했다. 11월엔 나이키와의 협업 제품 발매를 위해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와 수줍은 미소가 인상적인 디자이너 로에베의 조너선 앤더슨도 서울을 방문했다.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버질 아블로와 달리 조너선 앤더슨은 이번이 첫 방문이다. 해외 로에베 매장 윈도에 백자 달항아리를 놓는 등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고 알려진 그이기에 기대를 모았다.

 

12/DEC

카운트다운

콜레트가 폐점을 알렸다. 12월 20일이 되면 20년 시간을 뒤로한 채 상징적인 편집숍의 역사가 막을 내린다. 콜레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라 앙델만은 어머니이자 창업자인 콜레트 루소의 은퇴에 따라 “콜레트 루소가 없는 콜레트는 존재할 수 없다. 그녀는 그녀만의 시간을 가질 때가 되었다”고 폐점 이유를 밝혔다. 경영에 어려움을 느낀 것도, 특별한 이슈가 있던 것도 아닌데, 그 어렵다는 ‘박수 칠 때 떠나라’를 시전한 것이다. 콜레트는 전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편집숍이자 파리 패션과 문화 교류의 중심이었다. 칼 라거펠트는 콜레트를 가리켜 “내가 가는 유일한 매장”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콜레트는 6월 발렌시아가를 시작으로 독점 컬래보레이션을 소개하고 있다. 사카이와 톰 브라운, 샤넬, 마지막으로는 콜레트 폐점 후 이곳에 입점할 생로랑의 행사가 이어진다. 최근 샤넬x퍼렐x아디다스가 협업한 스니커즈를 인스타그램에 공개하며 전 세계 패션 피플을 또 한 번 들썩이게 만들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세기의 편집숍다운 마지막 불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