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변했다, 작고 가볍고 예쁘게. 독자에게 더 가깝게 밀착하기 위한, SNS 시대의 생존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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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점에서는 작고 가벼운 책이 유독 눈에 띈다. 유유의 ‘땅콩문고’, 마음산책의 ‘마음산문고’, 민음사의 ‘쏜살문고’, 플레이타임의 ‘오브젝트 레슨스’ 같은 시리 즈가 그것이다. 창비에서는 청소년이나 문학 입문자를 위한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가 나왔으며,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군데의 일인출판사에서 협력해서 펴내는 에세이 시리즈인 ‘아무튼 00’도 요즘 주목받는다. 200쪽이 안 되는 두께에 손 안에 들어오는 폭, 좀 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이 서가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은 날씬하고 경쾌하며, 만원권을 내면 거스름돈을 좀 돌려받는 가격도 부담 없이 가볍다. 스타 저자의 책, 방송에 소개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유행이 굳건한 한편 이런 형식의 문고가 한두 해 사이 조용하게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작은 책의 트렌드에 대해 누군가는 ‘문고본으로의 회귀’라고 말한다. 70~80년대를 겪었거나, 집안의 막내이거나, 복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전의 문고에 대해 알 수도 있다. 시인 장정일은 ‘열다섯 살 하면 떠오르는, 백오십원 했던’ 삼중당 문고를 자신의 시에서 회고했다. 그가 1962년생이니까 70년대의 오래된 풍경인 셈이다. 조금 뒷세대라면 빨간 책등이 인상적이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해문 추리문고’ 시리즈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학생들 용돈으로도 가볍게 사 모을 수 있는 가격에 붙잡으면 후루룩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분량이었다. 문고본의 시대는 <토지> <태백산맥> <장길산> 같은 대하 장편 소설이 널리 읽히고, <영웅문>같은 수십 권짜리 무협지를 돌려보던 긴 독서의 경향이 공존하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십 년 사이 이제 책 자체의 위상이 달라졌다.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주된 매체가 종이책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웹사이트나 SNS로 옮아온 것이다. 모바일 폰을 통해 글을 읽는 시대는 독자들이 텍스트를 소화하는 리듬 감각 또한 바꾸어놓았다. ‘책은 가장 덜 읽지만 글은 가장 많이 읽는 세대’라는 말이 있듯이 요즘의 독자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각종 뉴스 사이트를 보며 조각 정보를 왕성하게 받아들이고, 그만큼 짧은 글을 끊어서 독해하는 데 익숙하다. 소설 전문 서비스 사이트인 ‘판다플립(pandaflip.com)’은 지난달부터 원고지 10매 내외의 초단편 콘텐츠를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이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데 3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홍보하는데, 장강명, 조남주, 김연수, 천명관 등 쟁쟁한 작가들의 글은 과연 금세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분량이지만 꽤나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판다플립을 운영하는 스튜디오봄봄에서는 독자들이 온라인으로 한 번에 글을 읽는 분량 상한선에 대해 5천 자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힌다. 2016 년의 출판 트렌드로 시집의 판매량이 늘어났다는 점도 얇은 분량, 짧은 호흡이 이유라는 분석이 많았다.

사람들이 긴 분량의 글을 부담스러워해서 책을 덜 산다면, 호흡을 짧게 가져가고 가격을 낮추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1935년 영국에서 창간한 펭귄북스 역시 ‘담뱃값으로 책 한 권을’이라는 슬로건을 달고 있었다. 파격적으로 저렴한 가격, 기차역 가판대에서 판매하는 쉬운 접근성으로 큰 인기를 얻어 현재까지 살아 남은 브랜드가 된 것이다. 당시 펭귄북스 권당 가격인 6펜스는 영국 노동자 하루 임금의 5%였다고 한다. 민음사에서는 쏜살문고에 대해 “저마다 가벼운 몸피에 부담 없는 가격이지만, 감동의 무게와 사유의 깊이만큼은 절대 만만찮다”고 소개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서점에서 ‘부담 없는 가격’의 선은 어느 정도일까? 책이 아닌 영화에 착안해 ‘아무튼 00’ 시리즈의 기획에 접근했다고 말하는 코난북스 이정규 대표의 발상이 흥미롭다. “만원 안팎을 들여 영화관에 가면 2시간 정도의 재미를 얻고 오죠. 책도 그렇다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필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를, 2시간 정도 몰입해서 경험하고 부담 없이 빠져나올 수 있는 독서 경험을 만드는 거죠. 그 분량을 역산하니 문고본 150쪽 정도가 나오더라고요.” 이 대표는 수요자 관점으로 접근한 이런 기획이, 공급자 측면에서는 필자 유입의 허들을 낮춰주는 효과도 있었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단행본 한 권 분량의 역량은 안 되더라도 너무 길지 않은 매수의 원고를 순발력과 속도감 있게 쓸 수 있는 젊은 저자를 확보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현재 ‘아무튼 00’ 시리즈는 시인, 활동가, 목수, 약사,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필자의 글을 담아내고 있다. 피트니스, 게스트하우스, 망원동, 서재 등이 발간된 주제이며, 앞으로 택시, 쇼핑, 잡지 등도 추가할 예정이다. 가성비를 따지는 요즘 독자들의 소비 스타일상 몇천원짜리 책에 대해 구매 저항이 적은 만큼 내용에 대해 관대해지는 특성도 있다. 1만3천8백원짜리 에세이, 1만5천원짜리 하드커버 외국 소설이라면 그만큼 비용과 시간을 들여 읽었을 때 재미가 없다고 느낄 경우 혹독한 평가를 하게 되지만, 8천8백원짜리 인문서, 9천9백원짜리 에세이에 대한 평가는 한결 너그러워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페이퍼백이 잘 안 되는 시장이었지만, 요즘의 문고 시리즈는 가벼움을 위해 종이질을 포기한 듯한 페이퍼백에 비해 앙증맞고 예쁜 쪽이다. 만듦새가 전혀 거칠지 않다.

제주에 있는 한 독립서점의 대표는 이런 얘기를 했다. “사람들이 여행하면서 책을 많이 산다는 건 책도 일종의 ‘허세템’이 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죠.” 허세템 대신 ‘여유템’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꼭 필요해서 하는 소비가 아니라도 기분을 내기 위해, 혹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사는 아이템이 기프트 숍의 열쇠고리나 엽서 세트 대신 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행지의 카페 테이블에, 수영장 선데크 곁에 다른 소지품에 섞여 책이 한 권 놓여 있다면 그 장면은 한결 여유로워지면서 어떤 내러티브를 갖게 된다. 취향에 대해서도 말해준다.요즘 사람들에게 독서만큼이나 중요한 건 책을 읽는 자신을 SNS로 멋지게 표현하는 일이니까. 그럴 때 디자인이 예쁘고 사진발을 잘 받으며 가방에 넣었을 때 무겁지 않은 책, 해시태그로 제목을 올렸을 때 흥미로운 키워드, 한두 문장 공감 가는 구절을 발췌하기 좋은 내용이 선호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허세라면 누구에게도 해로울 리가 없다. 이정규 대표는 작은 책이 사랑받는 일은 반가운 한편으로 도서 생태계의 균형에 대해 근심도 된다고 말한다. “에세이 외의 인문사회 장르를 생각해보면 분명 일정 분량의 진득함과 깊이, 그에 대한 비용 투자가 필요하거든요.” 작고 단단한 책이 많아지며 독서 경험을 넓히고, 그것으로 힘을 얻은 출판사들이 또 크고 두껍고 묵직한 책도 꿈꿔볼 수 있게 되는 일이 아마 조화로운 생태계의 그림에 가깝지 않을까. 가볍게 또 건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