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바늘 뜨개질, 십자수, 손뜨개, 퀼트, 스킬 자수. 고요하고 따듯한 바느질이 트렌디해진 사연.

로에베의 광고 캠페인.

로에베의 광고 캠페인.

패션 브랜드의 광고 캠페인은 세련된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며 궁금증을 유발한다. 2018년 봄/여름 시즌 스티븐 마이젤이 찍은 로에베의 맨즈웨어 광고에는 성별이 모호한 단발 머리 모델이 니트 모자를 쓰고 카메라를 응시한다. 수려하고 많고 많은 룩 중에서, 단 한 장의 광고 사진에 니트 모자를 쓴 사진을 선택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알고 보니 그는 2018 F/W 시즌 맨즈 웨어 컬렉션에서 선보일 손으로 짠 듯한 니트, 크로셰를 옷뿐만 아니라 가방, 슈즈에 장식했고, 쇼 시작 전 광고 이미지를 통해 힌트를 준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의 니트웨어,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의 크로셰가 J.W.앤더슨의 손을 거쳐 아티스틱한 작품으로 변모했다. 그의 니트가 할머니스럽지 않고, 특별해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데는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보라, 노랑, 파랑과 회색, 연두, 하늘색 등의 창의적 조합이 그것. 그 간단한 아이디어가 평범한 크로셰에 아티스틱한 감각을 부여한 것이다.

MULB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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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방식의 크로셰는 멀버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니 코카의 첫 시즌인 2018 F/W 멀버리 컬렉션에서도 볼 수 있다. 멀버리는 크로셰로 만든 드레스를 안이 보이게 시스루 드레스처럼 스타일링했고, 감각적인 컬러 조합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겨자색 크로셰 베스트와 연보라색 크로셰 드레스, 그리고 초록색 부츠의 조화라는 창의적인 색 조합이 고즈넉한 니트를 단숨에 입고 싶은 드레스로 등극시켰다.


한편 이번 시즌 유독 런던 컬렉션에서 바느질을 활용한 패션이 자주 등장했는데, 알렉산더 매퀸 쇼에서는 그 누구보다 정교한, 쿠튀르적 형태의 자수 기법을 만날 수 있었다. 세인트 마틴 재학 시절부터 고고학자 혹은 리서치의 여왕이라 불린 사라 버튼은 2018 F/W 시즌을 위해 디자인팀을 영국 최남단의 콘월 지방으로 데려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고대의 돌, 중세 교회 그리고 광활한 자연과 전통에서 영감 받은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꿈을 실현시켜줄 도구로 자수를 택했다. 사라 버튼의 아이디어를 완성시킨 주인공이 바로 작은 바늘이었던 것. 그들은 드레스에 전통 문양과 동식물, 고대의 기호를 곱게 수놓았고, 미완의 작품처럼 실을 마무리하지 않고 남겨두어 재미를 더했다. 모델이 드레스를 입고 걸어 나오자 마무리하지 않은 실오라기가 부드럽게 휘날렸고, 그 모습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대지의 여신을 연상시켰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 정교함은 쿠튀르 컬렉션의 수준을 뛰어넘어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장인의 손 자수에는 기계 자수가 줄 수 없는 진한 감동이 있다.이런 감동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지휘하는 최근의 구찌 컬렉션에서도 자주 느낄 수 있다. 그가 들어온 이후 자수가 빈번하게 등장한 이유가 있는데, 미켈레는 워낙 손으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정신 집중을 위해서 자수를 즐기기 때문이다(최근 그는 유튜브를 통해 새로운 스티치를 배우고 있다고 밝혔다). 런던의 리버티 백화점 6층에 가면 자수에 필요한 책부터, 총천연색 실과 도안을 구할 수 있는데, 그는 런던에 머무를 때면 이곳에서의 쇼핑을 즐긴다고 한다.

MOLLY GORDDARD

MOLLY GORDDARD

한편 런던 디자이너들의 자수 사랑은 이번 시즌 유독 두드러졌다. 그중에서도 런던의 신예 디자이너 몰리 고다드의 아티스트적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지난 2월 런던 그리니치 페닌슐라에 있는 ‘Now’ 갤러리에서 〈What I Like〉라는 이름의 전시를 열었는데, 전시 제목 그대로 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컬러풀한 색감과 부드럽고 우아한 튤 소재를 사랑하는 그녀는 26피트에 이르는 알록달록한 튤 드레스를 천장에 걸어두었고, 드레스를 보러 온 관람객들이 직접 드레스 밑단에 자수를 놓을 수 있게 재료와 의자를 마련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재봉사가 되어보면 좋겠어요.” 그녀의 드레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가는 사람들의 메시지로 가득 찬 자수 드레스로 변해갔다. 패션을 그저 사치나 허영의 산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만큼, 진한 감동을 준 전시였다.

자수 브랜드를 서치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 왕실의 자수 문화가 계승되고 있어서인지 런던에는 손 자수를 활용하는 디자이너가 유난히 많았다. 그중 가장 시선을 끈 자수 브랜드가 바로 브루타(Bruta). 브루타는 2015년에 세운 런던 베이스의 자수 셔츠 브랜드인데, 디자이너 아서 예츠(Arthur Yates)는 전위적이고 미래적이며, 초현실적인 아티스트 장 콕토의 아방가르드한 작품에 영감 받아 자수를 놓은 귀여운 셔츠를 만든다. 주로 여행지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다는 그가 지금까지 선보인 시리즈로는 이탈리아 컬렉션, 타히티 컬렉션, 아르헨티나 컬렉션 등이 있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두고 마치 ‘기념품’과 같다고 말한다. 자신의 기억이 기념품처럼 셔츠에 담긴다는 의미다. 사진과 같은 기억의 수단으로 자수를 놓는다는 로맨틱한 접근이 무척이나 신선하다.

하딩레인의 스시 자수 베이스볼 캡.

하딩레인의 스시 자수 베이스볼 캡.

옷뿐만 아니라 모자 같은 액세서리 영역에도 자수 브랜드가 꽤 있다. 하딩 레인이라는 미국 액세서리 브랜드는 매사추세츠주의 두 남매에 의해 탄생한 잡화 브랜드로, 워싱된 캔버스 위에 니들 포인트 기법으로 자연과 동물 이미지를 수놓는다. 최근 오프닝 세레모니와 협업을 진행해 대중에 알려졌는데, 스시, 장미, 깨진 하트 등 동식물을 벗어난 자수 모자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특히 깨진 하트 모양 자수 모자는 리한나의 스트리트 룩에서 포착되어 유명세를 탔다. 자수는 이렇듯 어떤 아이템에 수놓느냐에 따라서 무드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알렉산더 매퀸의 드레스가 우아하고 고풍스럽다면, 하딩 레인의 모자 위에서는 귀엽고 앙증맞은 무드로, JW.앤더슨의 의상에서는 원색적이고 감각적인 아티스틱한 무드로 변모하니 말이다.

알렉사 청의 니트 뜨개질 톱.

알렉사 청의 니트 뜨개질 톱.

무드의 결합과 변주도 가능하다. 최근 지암바티스타 발리 컬렉션에서 선보인 앙증맞은 체리 자수 드레스처럼 고풍스러운 디자인과 빈티지한 자수 느낌이 공존할 수도 있고, 이자벨 마랑의 중세풍 블라우스 디자인 위에 귀여운 꽃 자수를 놓을 수도, 알렉사 청의 런던 빈티지 숍에 있을 법한 작고 귀여운 빈티지 꽃자수처럼 복고풍 무드를 띨 수도 있다. 이처럼 자수의 스펙트럼은 의외로 넓고 깊다.

최근 아크네 스튜디오의 남성 컬렉션에서 선보인 십자수 디테일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으로도 자수는 활용될 수 있다. 자수나 코르셰, 손뜨개 장식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할머니가 생각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구식이 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