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리의 울림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베일리의 울림

2018-03-28T05:31:57+00:002017.10.30|FASHION, FEATURE, 트렌드, 피플|

음율을 맞춘 듯 섬세하고 시적인 단어로 자신의 일, 꿈, 비전을 토로한 크리스토퍼 베일리. 그와의 대화 내내 명료한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영국이 낳은 이 천재에게는 아직도 보여줄 것이 무척이나 많다는 사실을. 9월 컬렉션을 마친 직후 만난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총괄 책임자, 베일리와의 인터뷰.

Burberry President and Chief Creative Officer Christopher Bailey
“전 펫샵보이즈와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어릴 적부터 그들의 노래를 좋아했죠.” 18세기에 지은 옛 법원 청사 건물인 ‘올드 세션 하우스(Old Sessions House)’에서 2017년 9월 버버리 쇼를 펼친 까닭이 궁금할 새도 없이 고풍스러운 공간 곳곳으로 펫샵보이즈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익숙한 듯 리듬감 넘치는 음악, 클래식한 쇼장, 곳곳에 배치된 여러 의자들, 고전적이면서도 스트리트 무드 넘치는 의상. 모든 것이 어지럽게 혼재한 듯하지만 조화로운, 낯선 듯 신선한 조합이 눈길을 끌었다. 케이트 모스, 나오미 캠벨, 카라 델러빈 등 초특급 브리티시 셀렙의 출현으로 떠들썩한 쇼장에는 갤러리를 방불케 하는 수많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컬렉션과 함께 공개한 전시 <히어 위 아, Here We Are>의 작품들이었다. 베일리와 패션/사진 전문 서점인 클래르 드 루앙(Claire de Rouen)의 디렉터이자 작가인 루시 쿠마라 무어(Lucy Kumara Moore), 영국 출신의 사진작가 앨러스데어 맥렐란(Alasdair McLellan)이 공동으로 기획한 이 전시는 ‘영국적인 삶의 방식과 스타일’을 주제로 다피 존스 (Dafydd Jones), 빌 브란트(Bill Brandt), 브라이언 그리핀(Brian Griffin), 셜리 베이커(Shirley Baker) 등의 사진가들이 포착한 20세기 영국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전시를 둘러본 후, ‘영국답다’는 것은 오히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니언잭, 로열 패밀리, 클래식한 신사 등 흔히 떠올리는 단편적인 영국의 이미지 너머에는 20세기 들어 더욱 풍성해진 문화적 다양성, 지극히 다른 요소들의 충돌과 포용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베일리가 사진 속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 영감을 받아 이번 컬렉션을 선보인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전통의 하우스이자, 새로운 변화에 가장 기민하게 응대하고 선도하며, 모험을 서슴지 않는 브랜드가 바로 버버리이니 말이다.


<W Korea>이번 버버리 9월 컬렉션의 하이라이트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CB 영국적인 삶의 면면을 포착한 20세기 이미지들을 보고 당시 찍힌 사람들과 부족, 계급, 집단, 문화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안에 담긴 아이덴티티와 진실성(Honesty)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격동적인 문화의 혼재 속에서 탄생한 영감을 바탕으로 한 컬렉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새로운 버버리 쇼장으로 올드 세션 하우스(OldSessions House)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이곳은 원래 1782년 완공해 오랫동안 법원 청사로 쓰인 건물이다. 처음에 이곳을 둘러보러 왔을 때만 해도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보수 중이었는데, 우아하고 안정적인 공간감에 압도됐고, 이번 쇼를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날것 같은 분위기도 좋았다. 18세기 이래 이곳을 드나들었을 상류 사회 사람들은 물론 다양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쇼를 보는 관객들에게 보다 사적이고 친밀한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히어 위 아> 사진전 프로젝트를 쇼와 동시에 진행하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는?
9월 컬렉션과 함께 사진전을 선보인 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담은 쇼였고, 사진에서 영감을 많이 받은 쇼였으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시각성을 지닌 사진, 책, 전시, 영상 등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이미지 안에 빠져들곤 한다. 이번에 사진 작품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문득 깨달은 점이 있다. 일종의 사회적 다큐멘터리로서 영국의 역사와 문화 코드의 원천과도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라는 사실이다. 이번 시즌이야말로 이런 모티프를 컬렉션을 통해 표현하고, 공유하기에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는지 몰라 당황하지 않나. 이런 세상에서 아이덴티티를 정의하는 것, 중심을 잡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바로 그 중요성을 전시를 통해 나누고 싶었다.

‘영국적인 삶, 영국적인 옷 입기’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번 전시를 큐레이팅했다는 인스타그램의 전시 소개 포스팅이 인상적이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헤리티지 브랜드를 이끌어온 장본인으로서 진정한 영국적인 삶의 방식과 스타일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개성 있고,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것. 괴짜 같으면서도 예술적이고, 어떨때는 반항적이기도, 스포티하기도 하지만 클래식함이 은은하게 느껴지는것.

200여 점이 넘는 전시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과 그 이유는?
켄 러셀(Ken Russell)의 영상. 일상 속의 사람들, 일상의 건물을 솔직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만약 당신이 사진가라면, 지금 뷰파인더를 통해 가장 담고 싶은 영국적인 순간은 무엇일까?
문화적 복합성과 다양성. 우리 영국은 섬이라는 지형적인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정말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다. 라이프스타일부터 섹슈얼리티, 색깔, 역사, 예술, 삶에 이르는 풍성한 문화적 스펙트럼 속에서 ‘영국다움’이 탄생했다. 이 풍부한 다양성이 영국을 생기와 활기 넘치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런 ‘영국다움’을 보길 원하는 이에게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장소는?
진짜 영국을 알고 싶다면 오히려 런던 밖의 지역을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요크셔 출신인데, 내 고향도 추천한다. 광대하고 멋진 자연, 격조 높은 건축물과 예술적 영감으로 가득 찬 그곳에는 세계적 규모의 박물관은 물론 좋은 극장 등이 즐비하다.

올해 초에 서울에 방문했다. 당신이 바라본 ‘한국다움’이 란 어떤 인상이었을지 궁금하다.
유스 컬처의 힘이 강렬했다. 독립적이면서도 확신이 넘치던 기운도 생각이 난다. 시기적인 변화 속에서 오가는 다양한 논쟁과 토론, 결정. 그 안에서 용기와 패기를 느꼈다.

개인적으로 이번 쇼장에 배치된 수많은 의자들이 신기했다.
정말 오랜 시간에 걸쳐 컬렉팅한 것들이다. 나도 직접 고르는데 함께했는데, 런던은 물론이고, 영국 전체를 뒤지듯 다니면서 중고 빈티지 가게에서 찾아낸 것들이다.

<히어 위 아> 전시장 1층 한쪽에 ‘클래르 드 루앙’ 서점을 옮겨놓은 것이 눈에 띈다.
이번 전시의 조력자인 루시 무어가 운영하는 서점이다. 패션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이미지, 사진, 책으로 가득한 그녀의 서점이 좋다. 루시는 정말 특별하고, 멋진 여인이다.

당신 주위에는 특별하고 멋진 사람들이 정말 많다!
행운이다. 협업은 물론이고, 타인과 일하면서 생기는 시너지를 즐기는 편이다. 단, 조건이 하나 있는데, 상대방이 진심으로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한다. 서로 영감을 주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일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꼽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우리와 함께 작업하기도 한 블런디 맥코이(Blondey McCoy).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커다란 검정 벽에 버버리를 모티프로 벽화를 제작했다.

버버리는 그동안 다양한 종류의 전시와 협업을 펼쳤다.
몇 시즌에 걸쳐 전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패션은 물리적으로 이 광활한 세계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그런 한편 그 물리적인 크기보다 더 방대한 콘텍스트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매개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패션을 외부의 것과 섞는 방식과 표현법에 대해 항상 고민해야 한다. 무언가에 의미와 맥락을 부여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지금 시대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직접 전시 기획과 큐레이션도 하니, 나중에 베일리 갤러리를 오픈해도 되겠다.
아, 언젠가 그러면 좋겠다!

버버리만의 헤리티지와 클래식한 아카이브를 차용하면서 가장 먼저 디지털 혁명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패션 캘린더까지 만들어냈다. 새로운 흐름을 포착하고 깨어 있게 하는 노하우는?
내가 좋아하는 전통과 역사 위에 모던함을 세우는 ‘밸런스 찾기’는 자연스럽게 일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시 나우 바이 나우’도 그렇다.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한다. 패션도 바뀌어야 한다. 오늘과 내일이 다를 수도 있다. 고객들은 지루한 걸 원하지 않고, 같은 것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길 바란다.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어가며 고객이, 패션계가, 나아가 사회 문화적인 흐름이 무엇을 원하는지 읽어야 한다.

디지털 패션의 리더이지만, 아날로그적인 것에도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가상의 세계와 현실을 특별히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디지털, 아날로그라는 이분법적인 분류를 접어두고, 이제 다 하나가 되고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아날로그를 바탕으로 한 ‘실제’ 없이는 디지털 속 가상 세계가 생겨날 수 없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탄생한 결과가 바로 디지털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