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R이라는 감각의 제국

이채민

짜릿하게 전율을 느끼다가도, 복종하는 아이처럼 심신의 힘이 빠져나갈지 모른다. ASMR 세계에 진입하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듣고 볼 수도 있다.

귀
매일 밤 나의 ‘최애캐’가 귓가에 대고 무슨 말이든 속삭여준다면 어떨까? 처음엔 짜릿함에 신경이 곤두서겠지만 이내 미소 지은 채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에이핑크는 신보 티저 영상에서 이어폰을 껴달라는 자막을 띄운 뒤 속삭이듯 흥얼거린 적이 있고, 슈퍼주니어의 예성과 헨리는 누군가의 옆에 초밀착한 상태로 귓속말을 하는 ‘네 귀에 인터뷰’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이런 콘텐츠의 의도에 딱히 의아함을 느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들은 ASMR이 부상하는 흐름과 맞물리며 등장했다.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라는 어려운 영어의 줄임말로 직역하면 ‘자율 감각 쾌감 반응’인 이 용어는 다양한 감각적 자극에 반응해 나타나는, 형언하기 어렵지만 안정과 쾌감을 느끼는 경험을 말한다. 유튜브에서 ASMR을 검색하면 자동 맞춤 검색어로 뜨는 말들은 ‘먹방’ ‘귀파기’ ‘입소리’ ‘액괴(액체괴물)’ 등. ASMR이 낯선 사람은 이제 ‘응?’ 하고 슬슬 의아해진다. 유튜버와 아프리카 BJ 등을 통해 퍼지기 시작한 ASMR 영상은 재작년보다 작년에, 그리고 작년보다 올해 훨씬 눈에 자주 띄고 있다. 클릭하면, 다종다양하고 사뭇 기괴한 신세계가 그곳에 있다.

수많은 ASMR 콘텐츠가 핵심 타깃으로 삼는 건 청각이다. 그 세계에선 음향효과상에 도전하지 않는 이상 이런 것을 정성스럽게 모아둘 필요가 있을까 싶은 소리, 평소에는 존재한다고 의식하지도 못한 각종 소리가 펼쳐진다. 물뿌리개로 물 뿌리는 소리, 가위질하는 소리, 연필 깎는 소리, 모닥불을 지피는 소리, 나무에서 눈이 떨어지는 소리, 손톱으로 나무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 등은 그래도 듣기 전에 어떤 소리일지 짐작이 간다. 비누 하나가 다양한 소리의 가능성을 품은 수단으로 등극하는 모습은 놀랍기만 하다. 조각칼로 비누 겉면을 사각사각 긁어내고, 벅벅 소리가 나게 퍼 내고, 엉덩이에 주사를 놓기 전에 하는 것처럼 톡톡 두드리다가, 물을 묻혀 미끄러지는 소리마저 포착한다면? ‘진정성’ 있는 ASMR을 위해 필수적인 건 바로 성능 좋은 마이크. 그것과 함께라면 입 안에서 혀를 굴리는 행위조차 질감이 있는 엄청난 소리로 증폭될 수 있다. 영상에 출연하는 크리에이터가 솜털이 달린 귀이개를 마이크에 대고 아주 천천히 흔들거나 마이크에 털을 붙여 두고 핀셋으로 뽑는 기이한 행위는 곧 내 귀를 간질이거나 귀가 시원해지는 듯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 두드리고(Tapping), 속삭이고(Whispering), 비스킷이나 치킨 등 바삭거리는 각종 음식을 먹고 (Eating), 목소리가 아닌 입과 숨결을 이용하는 등 ASMR 세상이 탐닉하는 소리는 끝도 없다.

ASMR을 뜻하는 원 구절을 보면 의학 전문 용어 같지만, 이 말은 그냥 신조어다. 2010년 스테디헬스닷컴이라는 미국의 건강 정보 사이트에 몇 가지 상황 예시를 들며 ‘이런 때 기분 좋은 느낌이 들지 않는지’ 묻는 게시물이 올라왔고, 누군가 ‘그런 건 자율 감각 쾌락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의견을 낸 후 이 용어가 퍼져 나갔다고 한다. 과학적, 학술적 연구가 뒷받침된 개념도 아니다. 어떤 자극에 반응하는 쾌락과 감각이란 주관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중독적인 소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름 끼치고 변태 같은 소리일 뿐이다. 뾰족하게 특정 감각을 자극하기보다 생활 속 익숙한 소리로 BGM 역할을 하는 ‘백색소음’과는 그런 점에서 구분된다. 유튜브에서 ‘Gentle Whispering ASMR’ 채널을 운영하는 미국인은 유치원 시절 친구가 팔 뒷살을 만졌을 때 아련하게 좋았던 기억과 유사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들을 찾다가 아예 크리에이터의 길로 들어선 경우다. 처음 이 이야기를 주변에 털어놨을 때는 괴짜란 소리를 들었다지만, 지금 그녀의 채널 구독자는 100만 명이 넘는다.

이 감각적 놀이가 대체 우리 안에서 어떤 작동을 일으키기에 수요와 공급이 계속 늘고 있는 걸까? 우리보다 몇 년 앞서 <뉴욕 타임스> 같은 유명 매체에서도 ASMR을 다루기 시작한 해외의 경우 연관 분야의 전문가들이 의견을 내놓는 경우가 있었다. 정체가 명확하진 않아도 공감각에 비유할 수 있다거나 긴장을 완화해 테라피 효과가 있다는 의견 등이었다. 예일대학교 의대 신경의학과 교수인 스티븐 노벨라는 ASMR이 한마디로 ‘즐거운 발작’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발작이라고 하니 뉘앙스가 영 심각한데, 다시 ‘최애캐’가 내 귀에 속삭인다고 생각하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겠다. 호기심에 유튜브에서 ASMR을 처음 검색해본 당신은 육성이 튀어나올 정도로 질겁하다가도 이내 엉덩이가 간질거리거나 뭔가에 점령당했다고 인정할지도 모른다.

ASMR 콘텐츠를 찾는 사용자의 상당수가 하는 ‘간증’은 불면증에 효과를 봤다는 이야기다. 기분 좋은 자극이 곧 안정감 있는 자극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유튜브 ‘DANA ASMR’ 채널 운영자인 한국인 역시 처음 ASMR을 찾아 들었다가 전율을 느끼며 이내 잠이 잘 들었던 경험을 계기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모든 ASMR 콘텐츠의 공통점은 여기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절대 힘이 들어가 있지 않고 소곤소곤 다가온다는 것. 사물 소리가 아닌 목소리일 경우, 해가 떠 있는 동안 웬만해선 겪을 일 없는 누군가의 속삭임은 역설적이게도 내 귀에 바로 꽂히는 흥분제이자 안정제다. 라디오 디제이를 하던 성시경의 “잘자요” 한마디가 했던 역할처럼.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싫지 않고 심지어 중독되는 감각적 경험은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다. 어릴 적 엄마가 귀를 파줄 때 아픈 듯하면서도 등줄기를 따라 나른함이 퍼진 일화나 누군가 머리를 빗겨줄 때 기분 좋았던 것쯤이 그럴까? ASMR에 본격 입문한 자들이 당황할 수 있는 콘셉트 중 하나는 ‘롤 플레잉’ 이라는 상황극이다. 영상 제작자인 크리에이터가 예를 들면 ‘머리를 감겨주는 미용실 스태프’ ‘당신에게 속삭이는 천사와 악마’ 정도로 콘셉추얼하게 등장해 사용자가 바로 곁에 있는 상황처럼 임한다. 인기 있는 크리에이터 상당수가 이런 콘텐츠를 꼭 만든다는 점에서 ASMR은 코스프레 문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때로 영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심신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신비주의 초과학이, 어떤 이들에게 마니아틱한 현상이라는 점에서는 서브 컬처가 떠오른다. 그 위세가 넓어가는 감각적 제국의 주 구성원은 사실 이 각각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수면 유도나 안정감 따위의 효과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더욱 다양해지는 ASMR 영상을 재미 삼아 즐기기 좋다. 유병재는 한국 영화 속 각종 욕과 터프한 대사를 ASMR화한다. 이어폰을 꽂고 침대에 누우면 그가 영화 <범죄 와의 전쟁>에 나온 대사를 당신의 귓가에 달콤하게 읊조려줄 것이다.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에디터
권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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